Installation view of 《New Independent : Crossword》 (Yangpyeong Museum of Art, 2025) © Hee Vaak

1. 희박은 경건한 믿음 그 자체가 아니라, 믿음이 발생하는 조건과 그 경과를 다룬다. 그렇기에 그녀의 작품에서 성스러운 이미지에만 주목하는 것은 희박의 세계를 이해하는 데 불충분하다. 오히려 핵심은 그녀가 예술을 어떠한 방식으로 다루느냐에 있으며, 그 방식이 우리의 무엇을 폭로할 수 있는지에 있다. 희박은 동시대의 종교(religion)를 다루는 많은 작가들과 달리 재기발랄하기보다는 겸허하고, 논쟁을 원한다기보다 되돌아보기를 원한다.

그녀는 자신이 다루는 상징들이 타인에게 어떠한 의미가 될 수 있는지를 잘 아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아마 희박의 도상이 진심으로 수녀가 되고자 했던 어린 시절의 기억(memory)에서 출발하기 때문일 것이다. 명제와 선언이 아니라 내밀한 경험에서 출발하는 것, 이것이 희박을 동시대의 수많은 ‘말’하는 작품과 구분할 수 있는 지점이다.


  2. 동시대의 많은 예술들이 말을 한다. 거기에는 보통 명제의 형태로 요약할 수 있는 내용들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감상하고 하나나 두 개의 명제로 요약해 낼 수 있다. 문제는 여기 있다. 말하는 예술 작품에서 요약할 수 있는 내용들의 집합을 A라고 해보자. 만약 예술 작품의 목적이 A의 전달이나 습득이라면, A를 예술 작품을 통해 전달받거나 습득해야 할 필연적 이유가 있는가? 작품의 목적이 그와 같다면, A의 원소들을 잘 정리한 논문이나 보고서를 읽는 편이 여러모로 좋을 것이다.

종종 말하는 예술은 맹목적이고 독단적인 태도와 함께하고, 그것은 계몽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기도 한다. 이광수(李光洙)의 『무정』 속 형식은 "과학! 과학!"이라 외치고, 그것이 결정적 순간에 작품을 망친다. 계몽에 대해 아는 것이 목적이라면 칸트의 『계몽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을 읽는 것이 여러모로 낫다. 어떤 명제를 위해 예술이 희생되어야 할 특별한 이유는 없다. 말하는 예술은 종국에 자기 자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희박은 ‘말하는 예술’과는 반대편에 서 있다. 그녀는 단편 영화 〈옥순의 조각〉에서 자신의 외조모를 아주 오랫동안 추적한다. 희박의 카메라는 자신의 할머니가 옥순이라는 이름 말고 사이교쿠준, 춘자, 하루애라는 다른 이름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부터 돌기 시작한다. 거기에는 답동성당에서 프랑스 신부에게 자라며 수녀가 되길 바랐던 소녀 춘자, 만주와 오사카의 공장에서 시대의 격랑을 견딘 청춘 사이교쿠준, 매주 성당에 나와 조용히 미사를 드리는 한 노인 옥순의 이야기가 있다.

〈옥순의 조각〉에 명료한 주장이 있는가? 그렇지 않다. 희박은 조용히 옥순을 따라 걸을 뿐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거기서 명제를 볼 수 있으며, 윤리를 볼 수 있고, 우리의 세계가 옹립되어 온 궤적을 볼 수 있다. 어떤 예술은 이념을 위해 인물을 호출하지만, 어떤 예술은 인물과 함께 세계와 만난다. 관조(contemplation)는 말하지 않고 보여주는 첫 번째 방법이자, 자기 자신의 지성을 사용하는 더 세련된 방식이다. 희박의 작품은 훌륭한 문학을 닮았다.
   

   3. 말하는 예술은 자기 자신을 필요로 하지 않지만, 모든 말하는 예술이 맹목적이라거나 독단적이라는 것은 아니다. 어떤 말하는 예술은 사회학이 그러하듯, 자신의 말을 세계에 대한 ‘폭로’로 사용한다. 바바라 크루거(Barbara Kruger)나 제니 홀저(Jenny Holzer)의 몇몇 작업이 그렇다. 거기서 말은 우리가 이미 받아들인 정당화된 믿음(justified belief)들의 집합인 ‘믿음 체계(belief system)’에 균열을 낸다.

“사물은 우리가 보는 대로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이 사회학이 우리에게 주는 첫 번째 통찰이다. 어떤 예술 작품을 사회학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조건은 그것이 폭로할 수 있느냐에 달려있다.

그러나 우리의 희박은 말하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폭로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녀가 보여주는 것은 믿음 그 이후의 세계, 세속화(secularization)된 동시대다. 전시장 한 면을 차지하는 〈믿음으로 작동하는 세계〉는 제목 그대로, 우리의 세계가 자명한 토대 위에 세워진 것이 아닐 수 있음을 폭로한다. 거기서 희박은 믿는 과정과 따라오는 결과를 분리한다. 믿음이 있어야 비로소 세계는 작동한다.

사실 믿음이란, 희박의 작품이 보여주는 것처럼 ‘정당화’되어야만 믿음이다. 정당화는 과정이고, 믿음이 그 결과다. 그리고 그것들의 집합이 우리의 세계를 구성한다. 물론 우리의 믿음들의 집합이 참일 것이란 보장은 없다. 그것은 별개의 문제다.
 
믿음의 과정과 결과를 분리하는 희박에게 믿음은 자명한 것이 아니라 마음의 인지 과정(cognitive process)일뿐이다. ‘믿음 체계는 믿어야 작동한다.’ 그것은 엄격한 토대주의(foundationalism)을 버리고 정합주의(coherentism)를 택한 세속화된 세계의 사고방식이다.

종교를 잃어버린 세계에서 종교는 그 자체로 자명한 토대가 아니라 하나의 세계관, 그러니까 여러 믿음 체계 중 하나가 된다. 그렇기에 그것은 다를 수 있으며, 다르다고 비난하지 않는 것이 시대적 미덕이 된다. 우리나라 헌법도 종교의 자유를 보장한다(20조). 희박의 작품은 충분히 사회학적이다.

희박은 건조한 세속주의적 입장에서 세계의 토대가 될 수 있는 것들의 경과를 진지하게 관찰한다. 그녀는 〈오늘도 무사히〉, 〈기도하는 세 개〉에서도 1970년대 버스나 이발소에 자주 있던 ‘기도하는 소녀’의 이미지를 빌려온다. 그 이미지는 원래 조슈아 레이놀즈(Joshua Reynolds)의 〈어린 사무엘〉이다. 원작의 사무엘은 경건하게 기도하는 소년이지만, 한국으로 넘어와 소녀가 되었으며 대량생산과 함께 점점 더 조악한 모습으로 대량으로 유통되었다.

거기서 희박은 현세의 기복을 금하는 종교적 교리도, 이미지의 진위나 신성함도 보지 않는다. 희박은 그 이미지가 유행할 수 있었던 이유를 험난한 세상에서 ‘안위를 바라고 복을 기원하는’ 인간 마음의 자연적 경향에서 찾는다.

그녀의 작업이 이처럼 경건한 믿음 그 자체보다 믿음의 조건이 되는 인간을 다룰 때, 희박의 작품은 동시대의 민족지학(ethnography)의 연구들과 닮아있다. 이미지와 믿음 사이의 관계가 ‘기도하는 소녀’ 작품들의 핵심이다. 희박은 중세 성상(icon)에 대한 철학적 논쟁의 한 꼭지를 훌륭하게 재해석한다.


4. 희박은 더 이상 수녀가 되고자 하지 않는다. 그녀는 그 기억을 할머니들을 따라 ‘대를 이어 물려받은’이라는 표현을 쓰거나 ‘스스로에게 강요한’이라 표현하며 억압의 기억이라고 보고 있다. 2009년 그려진 첫 번째 〈1996〉의 흐릿한 이미지가 희박이 생각하는 자신의 어린 시절일 것이다. 희박은 성당에 나가지 않았어도, 벼락을 맞지 않은 그날을 회상한다. 조건문은 전건이 참이지만 후건이 거짓인 오직 그 경우에만 거짓이다.

벼락 맞지 않았던 그날 이후, 그녀는 “썩지 않는 금은 없다”고 말한다. 아마 그것은 ‘영원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와 거의 비슷한 말일 것이다. 이처럼 희박이 건조한 세속주의적 시선을 가졌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그것이 키치라던가 신성모독에 가깝다고 보기는 힘들다. 왜냐하면 희박의 작업은 겸허하고, 논란을 원한다기보다 성찰을 원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희박의 종교에 대한 양가감정이 각 작품의 묘한 인상을 결정하는 듯이 보인다. 희박의 〈Pink to Purple〉은 성당에서 성스러운 것으로 축복받기 전 비닐 포장지에 쌓인 성모상이다. 그녀는 포장지 안의 사물에서 세속적인 공산품과 성스러운 성물을 동시에 본다. 어떤 사물에서 두 가지 상반된 속성을 동시에 보는 이중적인 시선은, 그녀에게 아직 종교에 대한 존중이 남아 있음을 보여준다.

희박의 이중적 태도는 아주 고요해 보이는 청색의 〈Maria〉에서 조금 더 명확해 보인다. 거기서 얼굴 없는 성모는 신성함을 마주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인간의 마음을 은유하는 것처럼 보인다(출 33:20). 문학을 닮은 희박은 영국의 문호 필립 라킨(Philip Larkin)이 〈교회 가기〉에서 그랬던 것과 비슷하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지금 믿지 않는다고 해서 신성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에요.”

희박의 작품에서 맹목과 독단을 반대하는 것처럼 보이는 태도는 ‘부정’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그녀는 어떤 것이 없다고 선언하기보다 판단을 유보한다. 그것이 세속화된 세계에서 동시대의 종교를 다루는 희박의 독특한 점이자 장점이다. ‘성당에 나가지 않아도 벼락을 맞지 않는다’라는 명제는 참이지만 희박의 경험은 그 문장의 진리값을 확인해 줄 뿐, 그 이상의 무언가를 보증하지는 않는다.

결국 희박의 작품이 보여주는 것은 믿음의 확고한 부정이 아니라, 믿음을 받아들이는 습관적이고 맹목적 태도에 대한 의심이다. 그것은 공허해 보이는 믿음 이후의 세계에서도 인간이 무엇을 믿으며 삶을 살아갈 수 있는지를 묻는 우리 마음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에 가깝다.



¹ 이광수, 무정, (애플북스, 2014), 446.
² Peter L. Berger, Invitation to Sociology: A Humanistic Perspective, (New York: Anchor Books, 1963), 23.
³ 믿는 과정과 따라오는 결과를 구분하는 것을 분석적으로 처음 제기한 것은 앨빙 골드만이다. 다음 저술을 참고할 것. Alvin I Goldman, “What is Justified Belief?” in Justification and Knowledge, ed. George Pappas (Boston: D. Reidel, 1979), 1-25.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