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정주, 〈롤링 페이퍼즈〉, 2014, 2채널 비디오, 2.1채널 사운드, 4분 © 안정주

많은 예술들이 진짜 언어를 닮고 싶어했다. 회화는 대상의 이름을 대신할 수 있는 재현에 매달렸고, 음악은 이야기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하는 데 집착한 때가 있었으며, 건축은 그 높이와 화려함으로 신의 영광을 대변하려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영상은 좀 달랐다. 대상, 소리, 음악, 언어 등 수없이 많은 의미 요소를 이미 그 안에 품고 태어난 영상은 일찍부터 선명한 의미전달보다는 영상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언어화하기 힘든 무언가, 즉 이미지에 집요하게 매달렸다. 안정주의 계속되는 노력은 바로 이미지를 대상으로 한다. 어떻게 다른 언어가 감당할 수 없는 영상 이미지의 고유한 힘을 찾아낼 것인가?

그러나 동시에 안정주는 좀더 골치 아픈 과제를 짊어진다. 어떻게 언어 기호들로 환원되지 않는 이미지의 힘만으로 그 이미지들이 사회적 현상들에 대해 ‘말하게’ 할 수 있을까? 다시 말해 언어로 환원되지는 않지만 의미를 발생시키는 영상 이미지를 찾는 일이 바로 안정주의 탐구의 대상이다.

〈롤링 페이퍼즈〉는 서로 닮지 않은 두 개의 화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한 쪽에서는 상호간의 연관성을 파악하기 힘든 평범한 장면들이 짧게 끊어지며 계속되고, 오른쪽에서는 신문을 찍어내는 모습이 리드미컬한 기계의 굉음과 함께 이어진다. 의미는 쉽게 주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쿨레쇼프(Koulechov)가 입증했듯, 인간 정신은 본성상 그 무의미해 보이는 이미지들의 연쇄에서도 애써, 능동적으로 의미를 찾아내려고 한다.

영상 기호학자 크리스티앙 메츠는 그런 상태를 기호학 개념인 “랑가주”라고 부른다. 그는 『영화: 랑그인가 랑가주인가?』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사진 한 장은 이야기를 할 수 없다. 하지만 나란히 놓인 사진 두 장이라면 달라진다. 왜 병렬된 두 장의 사진은 반드시 무엇인가를 이야기하게 되는 것일까? 이미지 한 개에서 두 개로 넘어가는 순간, 이미지에서 랑가주로 이행한다.”

이 때의 랑가주는 소통의 코드를 문법에 의존하는 언어와는 전혀 다른 것으로, 이미지들의 배치로 인해 의미를 발생시키는 영화 고유의 의미 생성 방식을 가리킨다.

이미지들의 다양한 배치로 이루어진 〈롤링 페이퍼즈〉에도 랑가주가 있으리라는 가정 하에, 의미를 찾으려는 인간 관성에 충실한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 보자. 왼쪽의 컬러 화면에서 나오는 일상적인 장면들은 쇼트마다 움직이는 대상들을 보여주고, 한 쇼트에서 다른 쇼트로 빠른 속도로 바뀐다. 화면 속에서는 정지, 수직, 수평, 회전, 포물선 등 다양한 움직임들이 등장한다.

이 화면들은 작가가 자신을 끌어당기는 이미지들을 미리 계획하지 않고 틈틈이 기록한 것으로 명시적인 공통점은 없어 보이고, 특별한 사건을 보여주지도 않는다. 소리 역시 현장에서 동시에 녹음된 평범한 일상의 소음들이다. 하지만 영상으로 기록한 그 행위, 즉 프레이밍 때문에 우리는 여전히 거기에 어떤 의도가 있으리라는 가정을 포기하지 않는다. 아직도 선명한 의미는 잡히지 않지만 이제 오른쪽 화면으로 넘어가자.


안정주, 〈롤링 페이퍼즈〉, 2014, 2채널 비디오, 2.1채널 사운드, 4분 © 안정주

신문을 찍어내는 장면을 보여주는 오른쪽의 흑백 화면에서는 기계가 빠른 속도로 움직이고, 화면이 바뀌는 속도 역시 다양하다. 영상과 소리는 모두 특징을 포착할 수 있는 강렬한 반복적인 리듬을 만들어 내며 음악이 된다. 왼쪽의 평범한 장면들에 비해서 오른쪽의 이미지들은 좀더 두드러진 강도를 보여준다. 좌우 영상들 사이에는 아무런 논리적 연관이 없지만 양쪽 화면의 역동성(dynamism)의 강도가 보여주는 차이 때문에 우리는 비로소 의미가 덧붙을 수 있는 작은 결정핵을 찾게 된다.

신문은 쉼 없이 발생하는 자잘한 일상의 사건들 사이에서 유의미하게 보일 정도의 특이성을 가진 사건들만을 선별하여 담아낸다. 그것은 다시 매체적 조작을 통해 특정한 지점을 부각시키고, 강조하고, 때로는 과장하고 조작하기도 한다. 그렇게 해서 일정 정도 이상의 강도를 가진 정보들이 기사가 되고, 그 기사들은 흑백의 기호가 되어 대량으로 배포된다.

그러나 이 시대는 일정한 강도를 지니도록 만들어진 이 정보들조차 포화상태를 넘은 지 오래기 때문에, 대부분의 정보들이 인지되지도, 반향을 일으키지도 않고 사라져버린다. 수많은 정보가 반복적으로, 엄청난 속도로 배포되지만 그 안에서 유의미한 정보를 추려내기는 점점 더 어려워진다. 이런 정보의 생멸은 정확히 영상을 만드는 과정과 닮아있다. 영상은 일상의 흘러가는 장면들 중에서 특정한 부분을 발췌하고 강조하고, 부각시키고, 편집하여 특별한 의미를 지닌 기호들의 덩어리, 즉 랑가주로 만들어낸다.

그러나 흔하디 흔한 이 시대의 영상 이미지들은 특별한 이미지가 되기는 점점 더 어려워진다. 블랙박스나 감시카메라의 영상처럼 촬영의 주체나 의도, 보는 사람도 불분명한 영상들이 일상을 가득 채운 상황에서 영상들은 수많은 정보들처럼 특이점을 상실한다. 〈롤링 페이퍼즈〉라는 제목은 바로 그런 뉘앙스를 갖는다. 엄청난 속도로 “찍어내는” 정보와 영상들이 의미를 부여받지만 의미의 포화상태에서 다시 무의미한 대상이 되어버리는 상황이 신문을 찍어내는 기계의 움직임에 압축되어 있다.

영상과 정보 사이의 유사성은 좀더 심층적인 차원에서도 나타난다. 안정주는 영상에서 대상과 주제를 명확히 하기 위한 장치를 생략하고, 의도적으로 정보를 제한한다. 공통점을 찾기 힘든 다양한 화면은 빠른 속도로 끊어지고 지나간다. 쇼트와 쇼트 사이에는 알아채기 힘들 정도로 순식간에 지나가는 검은 화면이 있어서 화면은 더 불연속적으로 혼란스럽게 보이고, 보는 이가 패턴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더 집중을 해야 한다. 초점이 맞지 않는 화면들은 보는 이로 하여금 대상을 알아보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게 만든다.

이런 과정들은 정보 엔트로피와 유사하다. 정보이론에서 수신자가 규칙성을 파악하기 힘든 매우 제한된 정보를 접했을 때 엔트로피는 증가하고, 그만큼 전달되는 정보량이 증가한다. 이것은 물론 수학적 연산이 가능한 신호에 대한 이론이지만, 넓은 의미의 정보이론에서는 모든 것이 규칙적이고 명확할 때보다 적절한 무질서도가 있을 때 커뮤니케이션이 최대치에 도달하는 의미로 이해된다.

작가가 정보이론을 염두에 두고 작업을 한 것은 아니지만, 작가의 장치들은 관객들이 유의미한 정보를 찾도록 집중하게 만든다. 동시에 이런 제한된 화면들은 바로 영화가 그토록 찾으려 했던 영상 고유의 언어, 즉 랑가주의 가능성을 보게 한다. 작가는 이런 편집을 통해 외부의 관습적이고 상투적인 의미들을 배제시킨다. 예를 들면 영상 속의 자연의 풍경들, 글씨들, 스포츠의 장면 등은 긴 호흡으로 기록되었다면 상투적인 클리셰 화면에 머물렀을 것이다.

그러나 의미를 알 수 없고 혼란스럽게 편집된 화면 속에서 관객은 영상의 역동성에 집중하게 되고, 정보의 움직임과의 유사성을 통해 새로운 의미를 얻어내게 된다. 따라서 안정주의 영상들은 의미론(Semantics)이 아니라 통사론(Syntax)이다. 무엇을 의미하는지, 무엇을 가리키는 지 미리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들의 연쇄를 통해 서서히 의미가 형성되고, 거기서부터 새로운 해석도 생성된다.


안정주, 〈롤링 페이퍼즈〉, 2014, 2채널 비디오, 2.1채널 사운드, 4분 © 안정주

그런데 이 영상에는 또 다른 관찰자가 있다. 바로 카메라를 든 자신의 태도를 바라보고 있는 작가 자신이다. 이것은 물론 화면에 직접 등장하는 요소는 아니지만, 작가가 집요할 만큼 정서나 감정, 혹은 화면의 형식적 아름다움을 배제하고 있다는 점에서 잘 드러난다. 안정주의 시선은 이미지와 소리들이 만들어내는 관계를 추적하는 관찰자나 과학자의 시선이며, 이미지의 본성을 탐구하기 위해 실험 영상을 찍는 듯한 영상이론가의 시선이다.

실제로 작가의 그 동안의 작업을 보면 영상 이미지가 특정한 가치관과 선명한 주장으로 곧 바로 환원되는 것에 대해 매우 조심스러워했고, 영상을 찍는 자신이 특정한 선입견을 가지는 것을 피하려 했음을 알 수 있다. 편집에서도 특정한 대상이나 상황을 강조하기 보다는 건조하고 중립적인 시선으로 화면을 재구성했다. 그러나 작가는 자신의 그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작품이 읽히는 사회적 상황과 조건에 따라 화면을 벗어나서 나타나는 확장된 해석이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작가는 뜻밖에도 이 영상의 아이디어를 롤링 스톤즈의 유명한 곡 〈검은 색으로 칠해(Paint it Black)〉에서 얻었다고 했다. 세상을 검은 색으로 칠하고 싶고 다채로운 색들로부터 고개를 돌려 어둠을 이야기하는 가사 내용은 그 자체로는 모호한 색채의 이미지들로 가득 차 있지만, 베트남 전쟁이라는 맥락에서 해석되고, 또 베트남 전쟁을 배경으로 하는 드라마의 타이틀곡으로 쓰이면서 반전에 대한 상징적인 노래가 되었다.

작가는 이 음악이 전쟁의 맥락에서 읽히게 된 과정을 보면서 자신이 순수한 강도를 가지고 만든 이미지들이 영상의 랑가주가 되어 사회적 의미로 확장되어 가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작가가 어떻게 방향을 설정해야 하는지를 고민하게 된다.

이런 고민들은 영상의 고유한 힘을 확인하고, 영상 랑가주를 발전시키고 싶어하는 작가의 진지한 노력의 일환이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이런 작가의 재귀적 시선은 때로 심리학의 ‘관찰자 역할(spectator role)’처럼 작가 본인이 이미지를 자유롭게 실험하는 것을 억압할 위험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어떤 주제나 특징에 대한 관심으로 이미지들을 자유롭게 영상에 담아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어떤 이미지에 끌리고 그것을 기록하고 있는지 매번 초월자적 시선에서 지켜보고 스스로의 경향을 일반화하려 할 위험도 있고, 또 자신의 반복적인 태도를 찾아내어 그것을 자신이 영상을 찍는 하나의 태도로 고정시킬 위험도 있다. 실제로 〈롤링 페이퍼즈〉의 왼쪽 화면의 이미지들은 작가가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져 온 반복적 움직임과 구성들을 보여주지만 무미건조하고 특징이 없어 쉽게 각인되지 않는다.

기름진 허세의 언어들에 의존하지 않으려는 작가의 담백함에 대한 집착이 읽히지만, 자신이 보여주었듯 이미지의 포화의 시대에 시적인 요소도 찌르는 요소(punctum)도 없는 이미지가 힘 있는 랑가주가 될 수 있을까? 감정적 요소를 극도로 배제하고 화면의 형식적인 아름다움에도 집착하지 않는 그의 영상들은 탐구적이기는 하나 너무 금욕적이고 산문적이다.

안정주가 순수한 강도를 통해 어떤 사회현상을 다루려고 하는 것은 영상의 고유한 언어를 스스로 찾겠다는 진지한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며, 〈롤링 페이퍼즈〉는 그 믿음을 성실한 실험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자신에게 명석판명한 것만을 진리로 받아들였던 데카르트의 성실함을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그런 태도는 데카르트의 주체에 대한 확신만큼이나 좁은 영역에 이미지를 가두는 것이다. 이미지는 일상 언어보다 훨씬 크고 다양한 강도를 지닐 수 있고, 언어화 되지 않는 부분에 진정한 힘을 가지고 있다.

그 힘은 보는 이를 사로잡아 모든 형식적 실험과 사회적 메시지를 놓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런 의미들을 부각시켜 줄 수도 있다. 그것은 작가가 참고한 노래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검은 색으로 칠해〉의 가사와 상징 외에 믹 재거의 우울하고도 분노에 찬 듯한 목소리와 묘한 멜로디가 없었다면 이 노래가 그토록 각인된 반전의 아이콘이 되었을까?

안정주가 영상 이미지의 고유한 힘을 간직한 강도의 정치학을 찾으려고 한다면 그것은 이제 산문이 아니라 시가 되어야 한다. 차분한 관찰자이자 실험가로서의 시선을 버릴 필요는 없다. 영상의 리듬에 대한 섬세한 감각을 유지하면서 정서적 잔향을 남기는 시적 이미지들을 찾아낼 때 안정주의 영상들은 좀더 강한 랑가주가 될 수 있을 것이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