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이야기
기계가 그리는 얼굴 없는 초상
양정욱의 기계가 전달하는 이야기는 한 주체의 실재에 대한 것이다. 앞에서 양정욱의
작품이 사람으로부터 시작하는 이야기 짓기라는 점에서 일종의 초상 작업이라고 했다. 작가는 일상에서 만나는
사람들에 대한 관찰과 그들에 대해 새겨진 감정들로부터 작품의 물질적인 구조와 움직임을 상상한다. 다시
말해, 이 초상 작업은 얼굴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자세, 움직임, 긴장과 이완 등의 몸체로부터 시작한다. 이 이야기 기계는 언어로
상징화되거나 이미지로 치환하는 대신, 전 기표적인 기호 체제, 즉
몸짓, 리듬, 잡음, 빛
등을 통해 이야기를 전달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기계가 전달하는 이야기는 체험된다. 관찰된 인물의 사연, 운동하는 신체의 현존, 상상적인 표현의 차원들이 뒤얽혀 있기 때문에 양정욱의 기계는 기이한 환상 신체도, 합리성의 기계 장치도 아닌 이상한 것이 된다.
이 기계는 질 들뢰즈(Gilles Deleuze)와 가타리가 강조하는 기호계의
다른 두 축인 의미 생성과 주체화의 지층을 형성시킨다. 이야기를 구성하기 위해 기입된 기표들, 그리고 기계의 전 기표적인 요소들의 배열과 움직임으로부터 형성되는 의식, 정념
등이 이끌어 내는 주체화를 위해서는, 기표를 기입할 흰 벽과 의식, 정념, 잉여들을 위치시킬 주체화의 검은 구멍이 필요하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러한 의미 생성과 주체화의 두 층이 생산하는 얼굴을 말하는데, 이것은 얼굴성이라는 추상적인 기계에
의해 태어난다. 얼굴성이라는 추상적인 기계는 경제와 집단, 권력의
필요에 의해 작동하면서 개별화되지 않은 얼굴을 생산한다. 이 기계는 검은 구멍과 흰 벽의 체계를 만들고, 이에 따라 얼굴의 사회적 생산이 이뤄진다. 그러나 이러한 얼굴의
사회적 생산으로부터 탈주한 기계는 탈영토화된 얼굴을 만든다. 탈영토화된 얼굴은 눈, 코, 입뿐만 아니라 얼굴화된 가슴,
손, 온몸, 도구 자체도 포함한다. 얼굴화된 몸체와 관계 맺는 기표와는 거리를 두면서 몸체의 탈코드화가 가능하다.5 양정욱의
기계는 들뢰즈와 가타리가 말하는 탈코드화된 얼굴을 넘어서, 얼굴 없는 몸체의 탈코드화를 통한 초상 만들기를
수행한다. 작가는 얼굴을 만드는 두 눈을 찍을 필요 없이, 그리고
눈을 찍을 흰 벽을 세우는 대신에 작동하는 사지를 조립한다.
이 이상한 기계가 그리는 초상은 두 개의 축 위에서 구성되는데, 하나는 이야기라는
의미 생성의 축과 다른 하나는 기계적 움직임에 의한 주체화 축이다. 기계가 전하는 이야기는 작품 제목이
제시하는 문장으로부터 시작된다. 그것은 하나의 장면, 또는
그때의 직관이다. <점심을 먹은 사람들은 어디로 가나)>(2012),
<3명의 남매는 집으로 가면서도 가게를 간다>(2013), <우리들의 주말을
거북이만 모른다>(2014), <아버지는 일주일 동안 어떤 잠을 주무셨나요>(2016)와 같은 제목들에서 하나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렇게
시작된 이야기 기계로부터 실재와 상상 사이에 만들어지는 균형에 의해 파토스(pathos)가 온다. 이 정서적인 강렬함은 얼굴의 표정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분열된
몸이 만드는 복합적인 리토르넬로(ritornello)에서 온다. 가타리가
말하는 리토르넬로는 실존적 정동(affect)을 결정화하는 반복적인 연속체인데, 이것은 소리 차원, 감정 차원, 얼굴
차원을 지니고 끊임없이 서로를 침윤한다.6 양정욱의 기계가 만드는 움직임은
바로 이러한 리토르넬로이다.
양정욱은 분열된 몸들의 파편들로 기계를 구성하면서 직관성, 이야기, 효과 사이의 긴장과 균형을 찾으려고 한다. 이 기계는 지극히 개인적인
차원에서의 탈영토화된 얼굴성의 기계이다. 이것은 물리적인 요소의 배열 장치이면서 문학적인 임무를 수행하고
감각적 체험을 제공하는 미학적 기계이기도 하다. 작가는 이 기계로부터 팽팽한 관계의 확장과 함께 감각과
의미의 다변화를 꿈꿀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이야기 기계가 그리는 초상은 하나의 이야기 속에서 탈코드화된
몸체들의 리토르넬로로 그려진다. 즉, 언어의 영역에 머물러
있는 이야기가 물리적 공간에서의 움직임을 통하여 현실로 끌어내진다. 이야기 기계는 디지털 기기와 네트워크
상에서 만들어지는 흘러가 버리는 이야기와는 다른 끊임없이 반복되는 이야기를 구사한다. 인간의 경험과
기억이 말로 전승되던 아주 오래 전부터 되풀이되는 이야기처럼 그것은 우리에게 체화된 반복 구조를 통하여 하나의 관찰로부터 시작된 이야기를 움직임으로
전한다.
이런 의미에서 양정욱의 작업은 이야기 기계가 그리는 얼굴 없는 초상이라 하겠다. 이
초상은 관객과 더불어 마주한 상호 주체성으로서 삶과 인간에 대한 깨달음을 준다. 그것은 마치 거울 속
내 얼굴을 보았을 때, 내 옆의 가족을 대할 때, 삶의 순간마다
타인을 만날 때, 무심하게 주변 풍경을 돌아볼 때 느끼는 이상한 떨림이 주는 충격 같은 것이다. 다만, 양정욱의 기계에는 소름 끼치는 검은 구멍과 흰 벽 대신에
그것을 해체하면 풀려나오는 몸짓과 소리가 있다. 반복하는 그것이 궁극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무엇일까? 검은 구멍의 눈이 바라보는 인간의 초상, 삶의 진실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