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ang Jung-uk, Once Saw a Man Who Stood Still, 2024, Wood, motor, lamp, thread, 220×300×250 cm ⓒ Yang Jung-uk

그의 작품은 ‘이야기 기계’라고 부를 수 있다. 양정욱의 이야기 기계는 공간을 차지하면서, 우리 몸을 암시하고 그 현존을 일깨운다. 균형 잡힌 구조와 반복되는 움직임으로 전달하는 이야기는, 거창한 서사시라기보다는 소소한 일상의 담소, 따뜻하게 건네는 위로, 끝내는 전해야만 하는 진심 같은 것이다. 양정욱이 말이나 글보다는 움직이는 기계를 이야기하기의 미디어로 삼은 이유는 이야기가 전하는 사람의 정서와 삶의 감각을 더 직접적으로 전달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결국, 양정욱의 작품은 단순한 기계 미학의 실험, 기술 매체의 기능, 기술적 객체의 존재에 관한 관심이라기보다는 인간 주체뿐만 아니라 그를 둘러싼 타자와 환경을 포함한 광범위한 상호 주체성에 대한 관심이라 하겠다.

1. 삶으로부터 온 이야기 기계

펠릭스 가타리(Pierre-Félix Guattari)는 주체화의 기계적인 차원을 고려하면서, 디지털 기술이 일상화된 오늘날 기술적인 정보 기계와 소통 기계가 인간 주체성의 핵심에서 작동함을 지적했다. 이러한 기계는 기억과 지성 속에서뿐만 아니라 감정, 정서, 무의식적인 환상 속에서도 작동한다. 주체성을 재정의하려는 시도는, 주체성 생산을 관장하는 요소들의 이질성에 대한 강조로부터 시작될 수 있다.1 양정욱의 이야기 기계는 자본과 정보 기계와 소통 기계를 대신할 미학적 기계의 사례로서 등장한다. 이야기 기계는 주체성을 생산하는 여러 요소들에 이질적인 층위를 부여함으로써 단절과 변화의 계기를 만든다. 양정욱의 이야기 기계는 모든 수사를 동원해서 특정한 상황에 있는 사람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야기하기라는 미술 작품의 목적은 지극히 고전적이다. 유구한 미술사를 통틀어 위대하다고 여겨지는 많은 그림과 조각들이 영원히 기억되고 되새겨질 위대한 인물, 역사적 사건, 신이 창조한 자연에 대한 이야기를 전달한다. 이를 위하여 예술가들은 아름답고 이상적인 몸을 형상화하기 위해 부단한 훈련과 방대한 자원을 투여해 왔다. 양정욱 또한 이야기를 위해 세심한 노력과 시간을 투여한다. 그러나 양정욱의 작품이 생산하고 전달하는 이야기는 일상에서 만나는 사람들, 주변의 소소한 경험들로부터 온 관찰과 상상에 관한 것이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사람으로부터 시작하는 이야기 짓기이고, 일종의 초상 작업이라 할 수 있다.

양정욱의 이야기 짓기는 다른 사람에 대한 관찰, 그리고 자신의 행위와 말을 포함한 일상에 대한 반성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는 이 과정을 추동시키고 이끄는 것은 대상에 대한 ‘약한 마음’이라고 말한다. 우연히 마주치는 특정 직업군의 사람들, 친밀한 관계 속에서 생활하는 가족, 그리고 뒤돌아봤을 때 보게 되는 그들의 참모습, 그래서 울리는 마음 등이 작품에 표현된다. 여기에는 대상에 대한 애틋한 마음 씀씀이가 있고, 상상력을 동원해서 그에 대한 이야기를 만든다. 양정욱의 작품은 언어 기호의 구조를 띠는 대신에 조형 기호의 관례를 따르면서 이야기를 생산한다.

이때 그는 나무와 모터를 이용한 움직이는 장치를 동원하는데, 이러한 작품의 시작은 감동을 주는 작은 선물로서 만들어진 오토마타였다. 이후 그는 몸의 움직임에 대한 면밀한 관찰을 통해 하나의 기계 장치를 만들어 그로부터 야기되는 마음의 움직임까지도 포착하고자 했다. <고난은 희망이라고 속삭인다>(2011), <저녁이 되서야 알게 된 세 명의 동료들>(2013), <서서 일하는 사람들> 연작(2015, 2022), <사랑하는 사랑의 어깨를 안마기기는 모른다)>(2015), <그는 선이 긴 유선전화기로 한참을 설명했다>(2016)와 같은 작품들은 제목에서부터 한 인물과 그가 처한 상황을 유추할 수 있도록 하였다. 작품의 주제는 관찰자의 입장에서 더 나아가 <대화의 풍경> 연작(2018–2019), <당신은 옆이라고 말했고 나는 왼쪽이라고 말했다>(2021), <우리는 어제를 힘껏 안고, 좁게 앉아, 익숙한 방향을 바라보았다>(2022)와 같이 상호적 관계에서의 위치와 주고받음으로 확대된다. 신작 <아는 사람의 모르는 밭에서>(2024)는 한 사람이 일궈 놓은 풍경을 통해 그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전한다.

양정욱의 작품에 동원되는 기술은 생각을 구현하기에 족한 정도의 최소한의 것으로서, 인간적인 시간이 보존되고 사랑의 에너지가 모일 수 있는 정도의 것이다. 그는 자신이 생각하는 기술은 살아온 경험 속에서 습득한 수단으로서의 최소한의 기술이며, 이런 기술에 의해 움직이는 기계는 정성의 기계라고 말한다. 그는 자동화되어 인간의 손이 필요 없는 기계가 아니라, 사람의 돌봄이 필요하고 온기가 남아 있는 기계를 만든다.

양정욱의 이야기 기계는 한 번 설치된 이후에는 사라진다. 작품은 한 번 설치된 이후에 소장처와 컬렉터를 찾지 못하면, 오직 작가의 머릿속에만 존재하게 된다. 작품의 물리적 구조물이 보관되고 보존되어 다음에 같은 것이 전시되는 것이 아니라 작가가 기억에 의지하여 그것을 다시 제작한다. 양정욱의 작품은 다른 이가 대신 제작할 수 있을 정도의 상세하고 규격화된 설계도가 없기 때문에 작가 자신만이 반복할 수 있다. 이 상황은 마치 구술자가 하나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나서 다시 다른 버전으로 반복하는 것과 같다. 산업 사회의 여러 직업인들의 고단한 삶의 풍경과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의 장면들이 순간적인 직관에 의해 포착되고 공간적인 장치들의 움직임을 통해 지속적인 시간 속에서 몸과 몸의 만남으로 전환된 이야기가 되어 펼쳐진다.

Yang Jung-uk, A Cherishing Heart, 2024, Wood, motor, lamp, thread, 400×450×450 cm ⓒ Yang Jung-uk.

2. 움직이는 기계, 말을 거는 몸

양정욱 작품은 관찰의 기억에서 떠올리는 움직임에서 시작한다. 한 캐릭터의 이미지를 움직이는 장치로 구체화함으로써 작품은 움직이며 말을 거는 몸이 된다. 이 장치의 신체성은 전시장에 하나의 분명한 물리적 현존으로 존재하면서 시각과 촉각으로 동시에 지각되는 상황과 연결된다. 몸을 통해 습관적으로 지각된 세계가 바로 우리의 현상학적인 현존을 이룬다. 이때 물리적 공간과 거기에 놓여 있는 구체적인 대상, 그 대상을 경험하는 주체가 작품의 중요한 요소로 대두된다. 회화로 미술을 시작한 양정욱이 평면이 아닌 입체 작업을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나의 관찰로부터 한 대상의 이미지를 상상하고 이를 움직임으로 실재화한다.

오늘날 우리가 만나는 다수의 기계들이 그 내부를 알 수 없는 블랙박스인 반면, 양정욱이 만든 기계는 역학적 구조를 그대로 드러내며 작동의 메커니즘을 보여 준다. 양정욱의 이야기 기계가 조직화되는 과정은 기계의 물질성과 관련된다. 다시 말해, 기계의 물질성이 이야기의 생산과 연결되어 있다. 기계의 물질성과 이야기를 잇는 것은 감각과 정동의 흐름이다. 이 기계는 실제 공간 안에 견고한 사물로 놓인다. 부분들은 물리적인 힘의 교환 관계로 서로 연결되고, 원운동과 직선운동의 상호 전환을 통해 특정한 신체적인 움직임을 표현한다. 전체 나무 골조에 모터를 단 수평, 수직, 원형의 부분 구조물들이 나무 관절과 베어링, 끈 등으로 연결되어 이완과 긴장을 반복하며 움직인다. 군데군데 달린 등과 다른 재료들이 움직임의 흐름을 중개하고 에너지의 강도에 반응한다.

이렇게 양정욱의 기계는 시각적, 촉각적, 청각적 요소를 통하여 이야기를 전달한다. 작가는 하나의 관찰 대상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지만, 정작 작품 안에서는 비사유적인 요소들을 가져온다. 시각을 통해 즉각적으로 파악되는 형태와 구조는 작품이 작동하는 방식을 인지하게 하며, 이때 인지된 움직임은 시각적이라기보다는 몸 전체를 개입시키는 촉각적인 것이다. 양정욱의 기계들은 뼈, 인대, 근육, 그리고 여러 감각 기관을 모방하여 모터의 움직임, 소리, 진동 등으로 다양한 감각을 동시에 자극한다. 작가가 작품의 주재료로 나무를 선택한 이유도 그것이 손으로 만져 보는 행위를 유도하는 재료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손으로 감지되는 대상의 상태, 몸을 통해 지각하는 공간, 청각으로 입력되는 정보들로 자신만의 상상적인 세계, 상상적인 대상을 만든다. 사람과 그가 서 있는 환경이 기계적인 구축물로 전환되고, 이 과정에서 구분된 둘은 가타리가 말하는 기계의 작동에서 발현시키는 타자성의 차원에 의해 상호 의존하게 된다.2

양정욱의 기계가 물리적인 공간을 차지하고 강력한 구체성을 지님에도 불구하고 상상적인 차원으로 후퇴해 가는 이유는 바로 이 기계가 이야기 기계라는 점에 있다. 이 기계는 하나의 역학적 기계이면서 동시에 담론의 기능을 하는 추상 기계인 것이다. 양정욱의 기계들은 실제 공간과 상상 공간 사이에서 말을 건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누군가에게 말을 걸기 위해 사용하는 디지털 기기가 가상 공간을 경유하고 분절된 신호를 배열하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양정욱의 이야기 기계들은 실제 공간에 견고하게 놓인 모습으로 관객들을 상상의 공간으로 이끈다. 한 사람과 마주쳤던 순간의 기억으로부터 하나의 도상, 이미지가 떠오르고, 그것은 감정과 느낌이 실린 형태와 색의 뉘앙스로 전환되어 기계의 구조와 움직임을 통해 표현된다.

바닥 위에 놓인 작품을 비추는 빛과 그로 인해 만들어진 그림자는 그것을 둘러싼 물리적 공간에 대한 지표적인 요소들이며, 동시에 작품을 하나의 상상적인 퍼포머로 전환시키는 요소들이다. 빛과 그림자는 하나의 무대를 연출하여 관객과 작품이 만나게 한다. 무대는 전시된 작품이 두 가지 차원을 오가게 하는데, 하나는 물리적인 현존으로서의 견고한 몸이고, 다른 하나는 각본에 의해 전개될 이야기이다. 이렇게 실제 공간의 빛과 그림자가 상상적인 공간을 구축한다. 실제 공간에서의 움직임이 상상의 영역으로 미끄러지는 것은 작가가 결국에는 이야기를 전달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양정욱의 이야기 기계는 관객에게 관조하는 재현 이미지를 제시하기보다는, 움직이는 기계의 구조를 띤 한 주체를 직면하게 한다. 관람자를 주체화의 벡터 앞에 서도록 함으로써 언어적인 인식이 아니라 정서적인 인식을 통해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그리고 세계의 현존 속에서 새로운 주체로서 재탄생시킨다. 이것은 가타리가 말하는 모든 주체화 양식의 뿌리가 되는 정념적 주체화(pathic subjectivation)이다.3 이렇게 양정욱의 기계는 물리적인 요소들이 배열된 장치이면서, 서로 다른 요소들의 얽힘과 움직임을 통해 의미를 생성하는 추상 기계이고, 관객들의 타자성으로서 등장하여 상호 주체성에 의한 자기 생산을 가능하게 하는 기계이다.4

Yang Jung-uk, Three Workmen I Came to Know Only in the Evening, 2024, Steel, motor, LED, PLA, wire, Dimensions variable. ⓒ Yang Jung-uk

3. 이야기 기계가 그리는 얼굴 없는 초상

양정욱의 기계가 전달하는 이야기는 한 주체의 실재에 대한 것이다. 앞에서 양정욱의 작품이 사람으로부터 시작하는 이야기 짓기라는 점에서 일종의 초상 작업이라고 했다. 작가는 일상에서 만나는 사람들에 대한 관찰과 그들에 대해 새겨진 감정들로부터 작품의 물질적인 구조와 움직임을 상상한다. 다시 말해, 이 초상 작업은 얼굴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자세, 움직임, 긴장과 이완 등의 몸체로부터 시작한다. 이 이야기 기계는 언어로 상징화되거나 이미지로 치환하는 대신, 전 기표적인 기호 체제, 즉 몸짓, 리듬, 잡음, 빛 등을 통해 이야기를 전달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기계가 전달하는 이야기는 체험된다. 관찰된 인물의 사연, 운동하는 신체의 현존, 상상적인 표현의 차원들이 뒤얽혀 있기 때문에 양정욱의 기계는 기이한 환상 신체도, 합리성의 기계 장치도 아닌 이상한 것이 된다.

이 기계는 질 들뢰즈(Gilles Deleuze)와 가타리가 강조하는 기호계의 다른 두 축인 의미 생성과 주체화의 지층을 형성시킨다. 이야기를 구성하기 위해 기입된 기표들, 그리고 기계의 전 기표적인 요소들의 배열과 움직임으로부터 형성되는 의식, 정념 등이 이끌어 내는 주체화를 위해서는, 기표를 기입할 흰 벽과 의식, 정념, 잉여들을 위치시킬 주체화의 검은 구멍이 필요하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러한 의미 생성과 주체화의 두 층이 생산하는 얼굴을 말하는데, 이것은 얼굴성이라는 추상적인 기계에 의해 태어난다. 얼굴성이라는 추상적인 기계는 경제와 집단, 권력의 필요에 의해 작동하면서 개별화되지 않은 얼굴을 생산한다. 이 기계는 검은 구멍과 흰 벽의 체계를 만들고, 이에 따라 얼굴의 사회적 생산이 이뤄진다. 그러나 이러한 얼굴의 사회적 생산으로부터 탈주한 기계는 탈영토화된 얼굴을 만든다. 탈영토화된 얼굴은 눈, 코, 입뿐만 아니라 얼굴화된 가슴, 손, 온몸, 도구 자체도 포함한다. 얼굴화된 몸체와 관계 맺는 기표와는 거리를 두면서 몸체의 탈코드화가 가능하다.5 양정욱의 기계는 들뢰즈와 가타리가 말하는 탈코드화된 얼굴을 넘어서, 얼굴 없는 몸체의 탈코드화를 통한 초상 만들기를 수행한다. 작가는 얼굴을 만드는 두 눈을 찍을 필요 없이, 그리고 눈을 찍을 흰 벽을 세우는 대신에 작동하는 사지를 조립한다.

이 이상한 기계가 그리는 초상은 두 개의 축 위에서 구성되는데, 하나는 이야기라는 의미 생성의 축과 다른 하나는 기계적 움직임에 의한 주체화 축이다. 기계가 전하는 이야기는 작품 제목이 제시하는 문장으로부터 시작된다. 그것은 하나의 장면, 또는 그때의 직관이다. <점심을 먹은 사람들은 어디로 가나)>(2012), <3명의 남매는 집으로 가면서도 가게를 간다>(2013), <우리들의 주말을 거북이만 모른다>(2014), <아버지는 일주일 동안 어떤 잠을 주무셨나요>(2016)와 같은 제목들에서 하나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렇게 시작된 이야기 기계로부터 실재와 상상 사이에 만들어지는 균형에 의해 파토스(pathos)가 온다. 이 정서적인 강렬함은 얼굴의 표정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분열된 몸이 만드는 복합적인 리토르넬로(ritornello)에서 온다. 가타리가 말하는 리토르넬로는 실존적 정동(affect)을 결정화하는 반복적인 연속체인데, 이것은 소리 차원, 감정 차원, 얼굴 차원을 지니고 끊임없이 서로를 침윤한다.6 양정욱의 기계가 만드는 움직임은 바로 이러한 리토르넬로이다.

양정욱은 분열된 몸들의 파편들로 기계를 구성하면서 직관성, 이야기, 효과 사이의 긴장과 균형을 찾으려고 한다. 이 기계는 지극히 개인적인 차원에서의 탈영토화된 얼굴성의 기계이다. 이것은 물리적인 요소의 배열 장치이면서 문학적인 임무를 수행하고 감각적 체험을 제공하는 미학적 기계이기도 하다. 작가는 이 기계로부터 팽팽한 관계의 확장과 함께 감각과 의미의 다변화를 꿈꿀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이야기 기계가 그리는 초상은 하나의 이야기 속에서 탈코드화된 몸체들의 리토르넬로로 그려진다. 즉, 언어의 영역에 머물러 있는 이야기가 물리적 공간에서의 움직임을 통하여 현실로 끌어내진다. 이야기 기계는 디지털 기기와 네트워크 상에서 만들어지는 흘러가 버리는 이야기와는 다른 끊임없이 반복되는 이야기를 구사한다. 인간의 경험과 기억이 말로 전승되던 아주 오래 전부터 되풀이되는 이야기처럼 그것은 우리에게 체화된 반복 구조를 통하여 하나의 관찰로부터 시작된 이야기를 움직임으로 전한다.

이런 의미에서 양정욱의 작업은 이야기 기계가 그리는 얼굴 없는 초상이라 하겠다. 이 초상은 관객과 더불어 마주한 상호 주체성으로서 삶과 인간에 대한 깨달음을 준다. 그것은 마치 거울 속 내 얼굴을 보았을 때, 내 옆의 가족을 대할 때, 삶의 순간마다 타인을 만날 때, 무심하게 주변 풍경을 돌아볼 때 느끼는 이상한 떨림이 주는 충격 같은 것이다. 다만, 양정욱의 기계에는 소름 끼치는 검은 구멍과 흰 벽 대신에 그것을 해체하면 풀려나오는 몸짓과 소리가 있다. 반복하는 그것이 궁극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무엇일까? 검은 구멍의 눈이 바라보는 인간의 초상, 삶의 진실이 아닐까?

1. 펠릭스 가타리, 『카오스모제』, 윤수종 옮김(서울: 동문선, 2003), 13.

2. 가타리, 60–62.

3. 가타리, 42.

4. 가타리, 51–62 참조.

5. 질 들뢰즈, 펠릭스 가타리, 『천 개의 고원: 자본주의와 분열증 2』, 김재인 옮김 (서울: 새물결, 2001), 321–363 참조.

6. 가타리, 『카오스모제』, 28. 리토르넬로는 교향곡과 합창곡에서의 반복구를 의미하는데,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변주를 동반한 반복이다. 가타리는, 실존적 정동을 결정화하는 것이 반복적인 연속체를 리토르넬로라고 칭한다. 이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들뢰즈, 가타리, 『천 개의 고원: 자본주의와 분열증 2』, 589–667 참조.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