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ang Eunkyung, Invisible Body, Tangible Word, 2024, six-channel video, 9min. 31sec. © Yang Eunkyung

사회적/문화적 질환–조현병

정신분열병, 이제는 조현병(調絃病)으로 고쳐 불리는 만성질환은 가장 극악한 살인의 ‘원인’으로(만) 매체에서 재현된다. 칼을 들고 거리를 배회하거나 일면식도 없는 사람을 잔인하게 찌르는 범죄자는 조현병이기 십상이라고 하고, 조현병은 진단명 속 이야기들-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재현 불가능한 스펙트럼임에도 불구하고 무조건 사회적으로 격리/감금해야 하는 잠재적 살인의 동기로 간주된다.

전체 인구의 1% 정도를 차지하는 비교적 흔한 유병률과 범죄자 중 0.0003%가 조현병자라는 통계적 사실과 무관하게 조현병을 재현하는 매체의 태도는 선정적이고 ‘폭력적’이다. “증상이 그다지 심하지 않으면서 오래 끌고 잘 낫지 않는 질병을 통틀어 이르는”(국어사전) 만성질환 중 조현병을 진단받는 것은 일종의 사회적 낙인이 찍히는 경험이다. 조현병 당사자의 목소리를 거의 들을 수 없는 우리 사회의 분위기를 이렇듯 짧은 정보, 상황만 갖고도 확인할 수 있다.

상황이 완전히 다른 경우로 이탈리아가 있다. 이탈리아는 20세기 중엽 이미 국가가 운영하는 정신병원을 모두 폐쇄했다. 이탈리아에서 정신질환자는 지역사회, 커뮤니티 안에서 일반인과 함께 살고 병원에서 일반 질병과 동등하게 대우한다.

이런 환경을 이야기할 때 꼭 등장하는 의사가 프랑코 바잘리아(Franco BASAGLIA)인데 그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병원에 격리/감금되어 있던 환자들 ‘인간화’하는 데서 나아가 일명 ‘바잘리아법’이라고 알려진 ‘180호 법’을 통과시켜 정신병원의 해체, 혹은 정신질환자의 ‘탈원화’를 실현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격리가 아니라 “지역사회 중심의 정신건강 프로그램을 확산하려는 정책적 노력” 중심의 이탈리아의 ‘진보적’ 상황은 이미 국내에도 소개되어 있다.1

2024년 번역된 책 『정신병의 신화』2는 근대의학이 어떻게 질병을 ‘발명’하고 인구의 일부를 병리화하면서 그들의 자유와 존엄을 훼손하는지를 폭로한다. 문제는 개인의 운명-불운 혹은 책임으로서의 조현병이 아니라 비장애중심주의를 축으로 한 건강 담론 혹은 의료 권력이라는 게 당사자-활동가들의 분석이다.

주변부의 대항 담론도 조금만 노력을 기울이면 금방 찾아볼 수 있는 지금의 환경을 놓고 보면 정신질환에 대한 사회적 재현을 포함한 혐오스러운 타자의 재생산-확대에 골몰하는 우리의 사회 자체가 병리적이다. ‘정상과 비정상이 무의미한 경계다, 분별의 정신병을 앓고 있는 게 우리 사회다’라는 문장에 나는 줄을 친다. 조현병에 대한 인식 제고가 필수적이고, 질환을 앓는 당사자들의 ‘가시화’ 혹은 자기-표현이 절실하다.

질환자들이 원하는 것은 ‘탈원화’이고, 우리가 상상하고 사유해야 하는 것은 ‘공동의 삶’이다. 정상성(광기?)을 중심으로 질병과 장애를 재현해 온 기존 방식을 해체하고 다른 프레임을 짜고 다르게 생각하는 데 있어서 전문가들-대표자들만이 아닌, 혹은 그들보다 당사자들이 더 많은 목소리를 내는 현장의 가시화가 절실하다. 혹은 짧은 리서치 중에도 그들이 계속 나타나는 매체들, 장면들을 볼 수 있었기에, 비관 속 어떤 희망을 본다, 강요당한다, 희망을 포기할 수는 없다.


질환의 정동을 번역하려는 미장센

우연한 기회에 국내 정신질환 전문가들을 따라 캄보디아 정신질환자들의 현장을 방문하고 사진과 기록 영상을 찍고, 바잘리아 ‘팀’의 성취가 녹아있는 이탈리아 트리에스테(Trieste)도 역시 영상과 사진으로 담은 양은경은, 그러나 정신질환에 대한 사회적 인식 제고를 위한 사진을 찍는 데는 실패했다. 양은경은 타자를 자신의 거울 이미지로 재현하는 대신에 그들의 “손이나 발, 풍경과 같은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므로 양은경의 사진은 설명, 정보, 계몽적 지식의 수단으로서의 대상화된 사진이 되지 못했고 파편으로서, 부분으로서 타자와 함께있음(withness)의 정동을 건드리며 침묵과 부재에 충실한 듯하다. 활동가들이 원하는 다큐를 제작하는 데도 거의 실패한 듯하고, “자신을 증언불가능한 외부자로 정체화하는 가운데 구성했던 삐걱거리는 세계를 통과하려는 시도”로 《도채비 가로지르기》(아트스페이스 카고, 인천, 2022)와 같은 개인전을 제출했다.

그것은 “만들어지지 못한 단편영화 〈도깨비불〉의 시나리오를 읽어나가는 전시”였고 영화의 “주인공은 조현병자와 집이 없는 연주자 두 사람”이었다. 양은경은 수원정신건강복지센터 증축에 대한 지역민들의 격렬한 반대를 목격하면서, 2-30년 동안 그곳에 있던 센터(집)가 공적으로 가시화되는 데 대한 동네 사람들의 반대로 결국 증축이 무산되는 것을 목격하면서 질환자들의 센터-병원-집, 있지만 없고, 존재하지만 눈에 보여서는 안 되는 어떤 장소에 대한 상상을 윤리로서, 윤리적 임무로서 붙들게 된 듯하다.

킬링필드와 같은 대량 학살 사건 이후 인구의 35%가 정신의학적 문제를 앓고 있다고 하는 캄보디아 어느 지역의 질환자들은 집에서는 쇠고랑에 묶여 있지만 바깥에서는 일을 하며 지역 공동체의 일원으로 공존하는 것을 양은경은 목격했다. 국가가 관리하는 정신의학적 시스템은 거의 부재하는, 그러므로 낙후된 변방이면서 동시에 질환자들의 공동체적 삶이 가능한 곳이 그곳이었다.

사회적 격리에서 사회로의 분산을 겪은 이탈리아는 우리에게는 귀감이지만, 대부분의 정신병원이 사설 기관인 우리에게는 넘어야 할 산이 너무 많고 너무 크다. 양은경이 인터뷰한 국내 질환자들의 이야기는 모두 다른 것이어서 그들을 “단일한(single)” 이야기로 묶는 것이 불가능했다. 어떻게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시선으로 조현병을 이해가능하게 만들 것인가가 아니라 당사자들의 이야기의 복수성, 다양성을 붙들 것인가. “당사자들의 이야기를, 귀한 말을 풀어놓는 작업”이 양은경에게는 관건이었다.

설치-영상, 사진으로 구성된 이번 개인전 《몸과 말의 경계에서》(인천아트플랫폼 프로젝트 스페이스 2, 인천, 2025)는 이해가능한 내부를 만들어줄 언어, 프레임이 거의 부재하는 작업이다. 양은경이 만나고 본 한국(특히 수원의), 이탈리아(바잘리아의 “자유가 치료다”가 적힌 건물 외관도 보인다), 캄보디아의 당사자들, 현장들, 풍경들이 “병렬”되고, 우리의 ‘눈’을 위한 것이 아닌 읽기-보기가 작동한다.

4분가량의 영상 〈빛으로 만들어진 도시〉(2025)는 복잡한- 정교한-섬세한-아득한 설치 작업인데, 우선 우리는 전시장으로 들어가 흔히 스크린과 동일시되는 한 벽면이 아닌, 두 면이 만나는 모서리에 영사되는, 불친절한 영상을 보아야 한다. 양은경의 운송수단인 지하철에서 본 바깥 풍경, 특히 텅 빈 지하철 안을 찍은 영상이 있고, 역시 사진들이 있고 양은경의 문장들이 있다. 영상과 사진은 아무것도 “말”할 수 없음에 대해, “말하지 않음”의 가치에 대해 말하려는 것 같다.

대신에 양은경의 문장들, 가령 “머리는 눈이 있는 곳에 내가 있다고 믿는다.”, “그런데 이것들을 지나쳐 왔던 몸을 돌리는 순간이 있다. 그때 문이 생겨난다. 지나쳐왔지만 보지 못한 무능력한 몸과 눈은 알지 못하는 그리움으로 몸과 눈을 돌려 뒤를 돌아본다”와 같은, 역시 암호나 지극히 주관적 체험을 체현한 문장들이 있다. 양은경은 “빈 공간을 찍는다”고 말한다. “빈 공간이 있으면 거기에 ‘사람’이 있을 것 같다.

있었던 사람, 지나간 사람, 흔적일. 그걸 눈치채면 다음에는 뭔가를 볼 수 있지 않을까”라고 제대로 보는 데 실패한, 혹은 당사자의 “시선을 자주 피했던” 소심한/‘지적이면서 감각적인’ 사람 양은경의 보기를 구현했다. 그리고 침묵-암호-수수께끼로 채워진 영상 앞에서 몸을 돌리면 양은경의 오랜 인터뷰이, 2019년부터 만나고 대화하고 배우는 당사자-활동가 김순득 씨의 인터뷰 영상이 있다. 김순득 씨 한 사람의 환청, 망상의 ‘기원’에 대한 고백이 있다.

말하자면 양은경의 ‘미장센’ 안에서 조현병은 우리가 예의 영상을 감상하는 상투적 자세에서 몸을 돌려야만(사실 모서리에 영사되고 있던 영상도 중첩되어 있어서 ‘보기’에 저항하는데), 명료한 보기를 경계하도록 메인 영상에 흐릿하게 겹쳐진 영상을 제대로 보려면 뒤돌아보아야만 한다. 그래야 우리는 순득 씨를 ‘볼/들을’ 수 있다. “실제로 존재하지만 안 보이는 조현병과 마찬가지로 안 보이는 것을 붙잡으려면 어느 위치까지 가야 한다”는 게 양은경의 설명이었다.

그들이 우리를 위해 차이가 제거된 단일한 개념, 진단명으로 재현되는 데 대한 양은경의 불편함이고, 정면이 아닌 돌아봄을 통해서나 그들이 겨우 보일 수 있음에 대한 양은경의 섬세한 텍스트-짜기/번역이다. 그리고 하나 더 있는데, 정면의 벽 모서리에 영사되는 ‘빛’ 안에 아주 작고 아주 적게 배치된 물질-종이-텍스트가 그것이다. 집 같기도집 아닌 것 같기도 한, 겨우 집을 가리키는 형상에 수신자를 찾는, 말 걸기를 하는 문장이 있다.

양은경이 좋아하고 갖고 다니는 존 버거, 페소아, 김현경의 문장들이 그 ‘안’에 있다. 양은경은 “내가 생각하는 집은 문과 소리만 있으면 된다”고 했다. 그런 집을 이미 이야기한 작가들의 타자들의 환대, 타자들에 대한 환대를 체현한 글자들이 거기에 겨우 모여 있다.


1 백재중, 『자유가 치료다–바살리아와 이탈리아 정신보건 혁명』(서울: 건강미디어협동조합, 2018), 존 풋, 『정신병원을 폐쇄한 사람: 프랑코 바잘리아와 정신보건 혁명』 권루시안 옮김(파주: 문학동네, 2020)을 참고하라.
2 토머스 사스, 『정신병의 신화』, 윤삼호 옮김(서울: 고양인, 2024).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