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llation view of 《Ironclad Fragger》 (Alterside, 2023) © Kim Yesul 

2022년 2월 추운 겨울날 두산아트센터에서 김예슬의 〈미술시간〉을 처음 보았다. 어린 날 합창단, 무용단을 꿈꿔본 이라면 동경할 벨벳 원피스, 턱시도 차림의 어린이들이 피아노 반주에 맞춰 율동을 하며 노래 부른다.

장음조의 동요풍에 “태권도 사범님/영어과외 선생님/미술시간 제일 좋아/죄송합니다”로 시작하는 노래는 돌돌 말리는 도화지, 알록달록 크레파스를 언급하여 그 옛날 기억을 지긋이 소환한다. 흥겹게 듣다 점점 고개를 갸웃하게 만드는데 예를 들어 “퍼포먼스 알 수 없어/작가와의 대화 몰라/……/현대미술 포스트모던/대체 뭘까 아방가르드/”같은 부분이 그렇다.

이쯤 되면 미술시간이 왠지 흑화되는 기분이다. 이 노래는 어른이 되면 예술가가 되고 싶다는 소리에 엄마가 “예슬아!(아아아아아아악)” 소리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그렇다. 이 이야기는 유치원생 때부터 꿈이 예술가였던 김예슬에 대해서다. 4분 39초만에 “어린이의 목소리를 빌려서 내가 느끼는 미술의 무게와 거리에 관해서” 말한 이 작품에 매료되고 말았다.

2023년 우리의 미팅은 김예슬의 개인전 《철갑신참 프레거》(얼터사이드, 2023) 이후로 잡혔다. 비장하게 자리잡은 프로젝션 룸까지 궁륭식 통로가 좁고 길게 조성되어 한편 과잉이란 의구심이 들었다. 새빨간 통로 너머 새파란 룸이 펼쳐져 있고 그 속에서는 〈Sub zero excidian(서브 제로 엑시디언)〉(2023) 영상이 구동됐다. 코딩을 통해 세계를 구해야 하는 어린이가 멸망을 바라는 적들과 싸워내는 서사를 디자인적으로 리폼된 육중한 의자에 앉아 관람했다.

궁륭 밖에는 〈Tech titan(테크 타이탄)〉(2023)과 사운드 작업인 〈Coding champion(코딩 챔피언)〉(2023)이 모니터와 스피커로 각각 출력되고 있었다. 김예슬의 설명에 따르면 〈Sub zero excidian〉이 애니메이션 오프닝이고 〈Tech titan〉이 엔딩에 해당한다고 한다. 혼란스럽다. 세카이계(セカイ系; 世界系) 애니메이션의 영향을 받았다는 얘기에 세카이계를 찾아보니 1990년대 후반 일본 문화의 한 장르라고 한다. (용어 자체는 2000년대 들어 사용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땐 이미 대학생이었기에 내게 세카이계란 참 멀기만 하다. 이 작업은 물론 수입 문화만을 배경으로 하진 않는다. 소년병, 프레거(fragger)의 풋내와 피비린내가 코딩 학원에 내몰려 창의력을 배가시켜야 하는 이 시대 어린이와 고약하게 섞였다.

절망스럽게도 김예슬이 〈신세계 에반게리온〉과 〈너의 이름은〉 같은 애니메이션을 언급할 때 나는 요술봉 휘두르는 요정이 등장하는 만화영화 정도를 떠올릴 따름이었다. 파사삭 바스라질 것만 같았지만 김예슬은 참 품이 넉넉한 작가였다. 이내 나를 위해 윌리엄 골딩(William Golding)의 『파리 대왕』을 대화거리로 던져주었고 나는 비톨트 곰브로비치(Witold Gombrowicz)의 『페르디 두르케』로 응수했다.

이 정도 읽다 보면 나보다 김예슬에 대해 글 이상으로 더 해박하게 파악했을 법한 이들이 있을지 모른다. 나는 세카이계를 감각하지 못하고 단지 글로 배웠기에 구원과 멸망이란 이분법적 과업 아래 평범한 주인공이 특수한 조건과 상황으로 인해 세계를 구하기 위해 희생돼야 하는데, 그 주인공은 평범한 삶을 원하는, 도돌이표의 증식처럼 다가오는 서사를 떠올릴 따름이다.

이 가운데 증식은 위키피디아에서 세카이계에 대해 읽는 와중 눈에 들어 온 ‘자의식 과잉’과 마치 동의어처럼 느껴진다. 나는 아마 세카이계에 대한 이해에 실패할 테다. 그러나 세카이계는 외피일지 몰라. 다른 방식으로 김예슬에게 접근해야지. 언젠가 “예슬아!(아아아아아아악)” 소리칠지 몰라도 말이다.

가장 근작이 공교롭게도 어린이를 전면에 내세운 작품들이기에 우리의 대화는 자연스럽게 어린이로 향했다. 〈미술시간〉 작가노트는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나는 어린이가 가장 정치적인 존재라고 생각한다.” 그녀는 연이어 “어린이는 또한 가장 소외된 존재다”라는 말을 덧붙였다. 어린이에 대한 이야기는 유년 시절을 더듬게 만들었다. 김예슬은 어린 시절의 일화들에 대해 가감 없이 터놓았다.

나 혼자만 간직해야 할 법한 일화도 있지만 단적으로 스테이플러를 손가락에 찍어 본 아이 정도라면 그녀의 유년기를 짐작할 수 있을까. 그때가 자신의 삶에서 가장 재밌었던 기억이라 말할 때 황금기를 떠올렸지만, 이내 방치되어 어두운 밤 방에서 밤새 애니메이션을 보았다는 말에 좁은 어깨가 가여워지기도 하고, 패륜아와 강력범죄자의 유년시절을 자신에게 이입할 때엔 직접 경험과 간접 경험을 괴이하게 끼워 맞추는 (과잉) 상상력이 지금껏 옅게 연장되고 있지 않나 의구심을 품기도 했다.

대화는 몇 번 교차 매듭을 얻었는데 디디에 에리봉(Didier Eribon)의 『랭스로 되돌아가다』에서 에리봉이 느꼈던 이중적인 감정에 다다른 때엔 (자신이) “부모님에 대해서 감추고 싶은 것도 있지만 부모님도 나를 감추고 싶어 하는 지점이 작동”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런 김예슬 어린이가 유치원생 때부터 예술가를 꿈꾸었단 것이다.


Kim Yesul, Sub zero excidian, 2023, Video, color, sound, 3min 7sec. © Kim Yesul 

그렇다면 김예슬은 자라서 어떤 예술가가 되었는가. 근래에는 어린이에 대한 주제를 선점하고자 야심(?)을 부리기도 하지만, 김예슬을 거론할 때 주되게 각인되는 지점은 미술 작가이자 그래픽 디자이너라는 이중 전략 구사다. 그녀가 디자인공학을 전공하며 습득하게 된 기저는 유니버설 디자인, 즉 ‘모두를 위한 디자인’이라는 철학이자 방법론이다.

디자인이 1%를 위한 사람만을 향하고 있을 때 실질적으로 99%를 위한 디자인을 하고 싶다는 접근은 래디컬하다 할 만하다. (물론 이쯤에서 멈추면 김예슬답지 않다. 이런 자기 생각조차 종종 혐오의 대상으로 삼곤 한다.) ‘일반인’에 대한 기준 탑재를 의도적으로 저어하며 그녀가 눈길을 두는 건 그 외의 존재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노인, 장애인, 특히 그중에서도 어린이는 지속적인 관심의 대상이다. (이렇게 쓰고 보니 어린이 주제 선점에 대한 그녀의 야심이 그럴듯하다.)

더불어 자크 캐럴만(Jacques Carelman)의 불가능한 디자인을 예로 들면서 흥미로운 형태이지만 세상에 나오지 못한 조형적 형태를 요모조모 궁리한 결과, 《스토커》(서울시립미술관 SeMA 창고, 2023) 전시에 요상한 입체를 설치하기에 이르렀는데 원형판 위에 네 개의 스케이드 보드가 결합된 〈추진력 연습기〉(2023)나 말 그대로 〈협동 킥 연습기〉(2023)인 킥보드 세 개의 결합은 공간상 제약이 있거나 안전상 금기인 형태를 전시공간 내로 도입한 디자이너적 관점과 닿아 있다.

요즘은 A급 위에 S급이 있다지만 S도 A도 아닌 B급 감수성은 김예슬이 슬며시 지향하는 바이다. 《철갑신참 프레거》 속 배우 연기를 위해서도 〈신비한 TV 서프라이즈〉 속 재연 배우들 정도의 수준을 요구하며 말끔한 봉합을 부러 훼방 놓기도 하는데 응급 처치같은 이런 시도는 부사 ‘차라리’를 전용(全用)하는 전략으로 보이기도 하다.

김예슬이란 작가명을 각인시킨 작품이 〈미술시간〉이지만 포트폴리오를 보며 예습하는 가운데 미래에 도래할 조각에 대한 패션쇼적 접근 《Hardcore Futuregraphy》(2019)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보여주기(showing)로 기억되는 〈Tab〉(2019)이 그녀의 작품임을 확인하고 희열을 느꼈다. 기묘한 조각품들이 각기 다른 조각의 방계를 주장하면서 스테이지로 등장하던 와중에 살아있는 몸둥이들이 매트를 짊어지고 나와 현장에서 몇 분가량 주짓수를 펼쳤던 것이다.

주짓수 경기를 ‘조각’이라는 상태로 바라보고자 했다고 밝히고 있는 이 퍼포먼스에 대해 부가하자면 “…싸울 수 있는 것, 상처 입힐 수 있는 것, 울게 만들 수 있는 것, 달랠 수 있는 것”으로의 조각 설정이다. 묘연한 조각의 정수 대신 차라리 조각 아니어도 건네고 싶은 예술에 대한 입장을 에둘러 던졌다.

김예슬은 주어진 기회는 좀처럼 놓지 않고서 타점을 높일 수 있는 방식에 대해 야전병처럼 접근한다. 그 과정에서 디자인공학을 배우며 습관이 된 리서치 베이스의 작업 방식은 구(舊) 남영동 대공분실 창에서부터 떨어지는 물줄기인 〈분실〉(2019)에 무맥락적으로 작용된다. 그녀는 독재시절 대공분실 수도 요금을 확인했는데 자료가 남아 있지 않자 최근 10-20 년간의 수도 요금을 체크해서 요금이 뛴 구간들을 찾아냈다.

독재타도의 시기와 지난 십여 년간 수도 요금 데이터 사이는 무맥락이지만 단순하면서도 보는 사람에게는 즉각적으로 시차를 확인케 하는 작업으로 의미를 고양시켰다. 또한 그녀가 기이한 생의 기간이라 부르는 6년간의 나이트클럽 포스터 디자이너의 경험을 살린 〈Constellation〉(2020)은 ‘지하경제’에서 작동하는 ‘비이상성’과 그 기간 동안에 남긴 촬영 기록, 업체들과 주고받은 견적서 등의 내용이 설치와 플립북 형태로 제시됐다.

“사회 구조를 읽고 탐구하여 작업 안에서 그 서열을 다시 조정”하는 접근 방식은 “예슬이는 어떤 작업하는 사람인지 모르겠어”라는 말들을 들으면서도 자신은 계정을 따라서 가고 있다는 확신을 들게 만든다.

내가 사는 사회 시스템이 왜 이렇게 디자인 되었는지에 대해, 해체와 배제의 방식으로 그 열화된 구조를 드러내고 싶다. 어떠한 이상점을 목적으로 가지는 구조와 그 실패를 보여주며 현실에 더 가까워진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도 디자인과 그가 갖는 정치적 함의를 적극적으로 드러내며 현실의 모습을 다루고자 한다.

위와 같은 작가 노트의 구절 중 구조적 실패가 차라리 현실을 보여준다는 입장에서 외부적 실패에 결국 포개어질 자신의 실패를 예감하면서도 주어진 몫을 하고 마는 이를 끝내 보고 만다. 그이는 어쩔 수 없이, 어쩌다 보니 유산을 물려받고 이를 견인해야만 하는 이이기도 하다.

〈Summer House〉(2021)와 〈Urban Utopia〉(2021)에서 장 프루베(Jean Prouve)-필립 리조티(Philippe Rizzottis)-패트릭 로리(Patrick Lowry)로부터 이어 받은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의도적 실패로 점화하는 이가 김예슬이다. 그렇다면 세카이계의 서사와도 멀지 않구나.

그러나 특유의 무력이나 망상, 회피와 과잉과 같은 아슬아슬한 소아적 곡예 아닌, 《철갑신참 프레거》의 발단인 소년병의 처지에 더욱 이입된다. 야전병의 실루엣에서 소년병의 모습을 읽는다. 다소 울퉁불퉁, 얼기설기해도 글쎄, 천의무봉(天衣無縫)을 기대하십니까. 이 사자성어가 적절한지 찾아보니 세 번째 뜻에 ‘세상사에 물들지 아니한 어린이와 같은 순진함을 이르는 말’이 기재되어 있다. 다시 어린이라니! 역시 무맥락적이지만 뭔가 김예슬에 대한 글의 마무리에 적당한 듯하다.


* 본 글은 2023 서울시립미술관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 17기 비평워크숍의 일환으로 작성되었습니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