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의 수련과 불가능한 공동체
몸의 수련은 동물의 조련만큼이나 유목민에게서 유래한다. 그것은 사막에, 마법사에, 미친 과학자에, 따라서 예술가에게 어울리는 것이다. 발터 벤야민이 지적했듯이 장인의 ‘수련’과 기계공의 기능적 ‘훈련’은 대립된다. 더 나아가 수련은 장인의 그것을 넘어서기도 한다. 따라서 그것은 일종의 무기-되기 같은 무사의 수련이면서도, 명상과 같은 불꽃-되기의 수련이기도 하다.
이러한 몸-만들기의 과정은 몸의 물질성 혹은 판에 박힌 반복성(습관)의 신경에 상당한 자극을 가해 그 무엇도 될 수 있는 잠재적 몸-만들기의 과정이기도 하다. 그러니 박 작가가 되고자 하는 몸의 수련은 그가 소통하고자 하는 침팬지, 사자와 공명하는 게 아닐까?
그렇기 때문에 그가 보고자 하는 침팬지, 사자의 몸은 그저 우리에 갇혀 일상화되고 지루해진 몸이 아니라 거기에 잠재적으로 배어있는 포효하는 몸, 도약하는 몸, 할퀴기의 날렵한 몸, 따라서 열대우림의 몸........의 에너지 자체가 아닐까? 그것이 무리의 양태들로서 동물의 매혹들, 즉 단순히 가족적인 가축들의 친숙하고 귀엽고 알려진 몸짓이 아니라 수련된 몸이 발산하는 잠재력 자체가 아닐까?
요셉보이스가 마법사로서 이러한 불가능한 몸들, 동물들의 공동체를 만들어 보이고자 했다면 박승원 작가의 경우는 그 ‘몸짓’ 자체의 역동성을 포착하고자 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들은 하나의 공동체이다. 거기에 어떤 기(氣), 어떤 도(道)가 끊임없이 변주하면서 자신의 역능들을 펼치고 상호 관통하고 있다. 빛의 공동체만큼이나 파동의 공동체만큼이나 생명의 공동체, 그 흐름들이 거기에 참여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몸은 그 모든 빛, 파동, 생명의 흐름들에서 한시적으로 결집된 주름들이다. 하지만 주름은 펼쳐지거나 운동하지 않으면 현현하지 않는다. 그가 몸으로 어떤 비 규칙적인 박자들, 음들을 만들어내려는 노력들은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다. 몸, 몸인 욕망, 몸인 정신, 몸인 에너지는 할 수 있는 한 끝까지 자신의 길을 가고자 고집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몸짓의 가시화를 넘어서 시도되는 청각화, 소리-되기의 장면들은 하나의 반복할 수 없는 ‘축제’처럼 고유의 시공간을 창조한다.
아직 그의 예술 언어는 거칠다. 거칠기 때문에 그의 예술언어를 정의내리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그는 계속 갈 것이고, 그의 몸들이 주파하는 시공에 가시화된 무엇들이 존재하는 한, 우리는 그의 작업을 ‘행위 중에 있는 예술(art in action)’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로젠버그가 주장한 액션 페인팅(action painting)의 본질적 의미와도 통하리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작품들이 고정되고 견고하기 때문에 오래가며 교환 가능한 예술대상(object)이길 포기하는 순간, 그것들은 그 자신 하나의 흐름(flux)이 되길 욕망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것은 후기 자본주의의 비물질화되어가는 상품사회에서, 예술이 할 수 있는 창조적 응답의 방식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