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hn Kwanghwee, Desk Concert, 2024, Single-channel video (color), sound (stereo), 24min 16sec. Installatio view of 《Breathing Breaks, Breaking Breaths》 (Artspace Boan, 2024) © Ahn Kwanghwee

그를 소개하고 다루는 글들 대부분이 입을 모으듯 ‘힙합 음악’을 빼고 안광휘의 작업을 향유하거나 논하기는 어렵다. 팟캐스트와 기획, 번역을 망라하는 활동을 병행하긴 했지만, 이러한 특성은 2017년 인스턴트 루프에서 진행한 《The Pathetic Rhymes》를 분수령 삼아 본격적으로 전경화된다.

사루비아다방에서 열린 개인전 《Noise Cancelling》(2019)과 금천예술공장에서 연 《The Pathetic Studio of the Pathetic Label》(2022) 등을 거쳐 2025년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에서 선보인 〈Untitled 13 Tracks—Nanji〉에 이르기까지 그에게 힙합 음악은 처음부터 ‘소재’이자 ‘매체’, 일종의 알파이자 오메가로 천명된다. 자신의 작업 궤적을 요약하는 글에서도 그는 “힙합이라는 장르의 물리적·정서적 감각을 통해 동시대의 매체 조건과 예술 생태계 안에서의 자신의 위치를 끊임없이 되묻고자 한다”라고 그 위상을 강조한다.¹ 

그의 작업이나 전시를 한 번이라도 접한 이들에게 이는 뉴스가 아니지만, 이러한 자명함은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 가령 힙합 음악을 그가 속한 특정 세대에 고유한 것, 또는 취향으로 취급하는 방식을 떠올려 보자. 이는 “자신이 해당 ‘취향의 공동체’에 속하는가 아닌가”라는 질문을 수반하는데, 이에 따라 접근법은 다시 둘로 나뉜다.

스스로를 그 ‘외부’에 놓는 이들이 작가의 개인사와 당대의 사회(매체)사, 또는 미술사적 지식을 병치시키는 식으로 그 외부성을 맥락화한다면, ‘내부자’와 스스로를 동일시하는 이들은 전자에게 불투명한 세부 지식들을 전시하려는 욕망에 휩싸이곤 한다.

이러한 구분은 그럴듯해 보이는 만큼 의심스럽다. 가령 “‘힙합 음악’의 자리에 록이나 트로트, 발라드나 클래식을 집어넣고 안광휘에 상응하는 작업을 하는 작가를 떠올릴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떠올려 보자. 이는 힙합(음악)의 특정성과 역사적 위상에 대한 의문으로 우리를 이끄는데, 이 지점에서 적절한 참조점이 되는 것이 《Culture: Hip Hop and Contemporary Art in the 21st Century》다.

2023년 미국 볼티모어 미술관(Baltimore Museum of Art)에서 시작한 이 전시는 힙합의 혁신이 어떻게 음악을 넘어 예술, 패션, 커뮤니티를 가로지르는 말 그대로의 ‘글로벌 문화’로 확장되었는지를 전면적으로 다뤘는데, 이후 세인트루이스 미술관(Saint Louis Art Museum), 프랑크푸르트의 쉬른 쿤스트할레(Schirn Kunsthalle)를 거쳐 2025년 4월 캐나다 토론토의 온타리오 미술관(Art Gallery of Ontario)에서 막을 내렸다.

무엇보다 이 전시는 ‘힙합 50주년’을 글로벌 순회전의 형식을 빌어 다루려 한 시도로, 1973년 8월 11일 뉴욕 브롱크스에서 ‘힙합의 아버지’로 기록될 DJ Kool Herc (클라이브 캠벨, Clive Campbell)과 그의 여동생 신디 캠벨(Cindy Campbell)이 주최한 역사적 파티에서 선보인 브레이크비트는 이후 자라날 래핑과 비트박스, 브레이크댄스와 그라피티 문화는 물론 ‘B-boy’와 ‘B-girl’ 형상의 씨앗이 된다.

이 전시에 이름을 올린 수십 명의 작가들 가운데에는 우리에게도 익숙한 이들이 적지 않은데, 가령 장-미셸 바스키아와 마크 브래드포드, 줄리 머레투와 아서 자파 같은 아티스트들은 물론, 루이 비통의 정식 디렉터로 발탁되어 센세이션을 일으킨 버질 아블로 같은 패션 디자이너가 포함되어 있다. 이는 가령 힙합의 그라피티 문화를 대안적 참조점으로 삼을 때, 그간의 미술(비평)사에서 이들이 독해되어 온 일반적인 방식이 어떻게 새롭게 재배열될 수 있는가라는 흥미로운 질문을 제기한다.

이는 음악과 그라피티, 블록파티를 아우르는 안광휘의 작업에 대한 논의에도 동일하게 제기될 수 있는데, 이 전시가 내세운 6개의 주제 역시 병치해 곱씹어볼 만하다. 포즈(Pose), 브랜드(Brand), 장식(Adornment), 트리뷰트(Tribute), 상승(Ascension), 언어(Language)라는 이 여섯 개의 벡터들은 좁은 의미의 시각성과 음악을 넘어, 힙합 음악이 전경화한 신체의 문제, 대안적 의미의 성공과 미적 기준, 정전(canon)과 언어를 환기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이른바 ‘힙합의 원조’나 ‘미국 본토의 기원’을 끊임없이 소환해 줄 세우는 질문과는 구별되어야 한다. 안광휘는 가령 타블로나 빈지노처럼 능숙한 영어와 한국어를 병행해 구사하는 래퍼가 아니며, 머쉬 베놈처럼 충청도 사투리의 억양과 어휘를 전경화하지도, 250이나 이박사처럼 테크노와 뽕짝을 국지적(vernacular) 맥락 속에서 번역하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자신의 뮤직 비디오에 제임스 터렐의 트레이드 마크와도 같은 파스텔 톤의 색채와 이미지를 허락 없이 써서 논란을 일으켰던 캐나다 출신의 래퍼 드레이크와도 거리가 멀다. 

이 지점에서 가장 징후적인 그의 작업은 〈Desk Concert〉 (2024)다. 자신의 방, 또는 작업실에서 약 25분간 진행된 이 콘서트에서 그는 일련의 트랙을 라이브 방송하듯 소개하며 들려주는데, 이 작업을 듣는 청중은 사실 없다. 그것은 녹화된 기록으로 미술 제도 안에서(만) 작동하며, 이젠 초등생들에게까지 일반화된 인스타와 유튜브 라이브의 형식도 회피한다.

그의 음악과 퍼포먼스는 다양한 형식으로 플랫폼에 엑스포트(export)되지만, 일반적이고 대중적인 의미의 음악적 제도에 침투하진 않는다. 이는 그가 다루는 비트들이 동시대적이라기보다 ‘올드 스쿨’에 가깝다거나, 래핑을 세공해 세련되게 가다듬는 데 별다른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것 같다는 지적과도 사이좋게 공존한다. (그가 이 콘서트에서 선보이는 ‘현란한’ 래핑은 AI를 빈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의 작업이 ‘대중적 호응을 얻는 데 실패했다’라는 말은 성립하지 않는다. 이는 그의 작업이 일관되게 견지하는 독특한 열패감과 자폐성을 압축적으로 드러내는데, ‘불쌍한’ 또는 ‘딱한’ 정도로 번역될 수 있을 ‘pathetic’을 작가는 자신의 자의식적 레이블이자 모토로 삼는다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는 작가에게 ‘힙합 음악’이 동시대 미술(계)에 대한 거대한 알레고리라는 독해로 우리를 조심스레 이끈다.

즉 어떤 근원적인 의미에서 (한국의) 동시대 미술이란 자신의 작업처럼 대중적이지도 않고 ‘pathetic’하며 자폐적인, 일종의 ‘탁상 콘서트’라는 선언. 이러한 독해가 지나친 과장으로 밝혀질지, 아니면 날카로운 디스랩인지는 그의 다음 작업을 통해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이번 전시의 출품작과 결과물이 음악일지라도 미술 작업을 힙합으로 치환했다거나, 힙합 장르를 전시의 장으로 유입시킨 흔적은 어디에도 없다. 힙합의 주요 요소로 거론되는 랩, 디제잉, 그라피티, 브레이크댄스를 모두 충족시키며 기존에 탐구하던 주제를 밀어 넣는다거나 개인적이지만 보편적으로 입력될 수 있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상품형 랩도 아니기 때문이다.

더욱이 지금 뜨겁게 회자되는 힙합(구체적으로는 랩) 문화의 산포와 유통에는 가담하지도 않는다. 단지 미술 활동에서 오는 좌절, 괴리를 극복하고 타협하는 작가의 작업 태도가 70년대 중반 미국 뉴욕 빈민 계층에서 탄생했던 힙합 실행 주체들의 정체성과 닮았다.”²


1 「2025 퍼블릭아트 뉴히어로」, 『퍼블릭아트』, 2025년 5월. 안광휘 2025 포트폴리오에서 재인용.
2 이지민, 「안광휘의 역설」, 안광휘 2025 포트폴리오에서 재인용.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