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오늘날에도 소원을 비는 용도로 사용되는 오브제 몇 가지를 쉽게 떠올릴 수 있다. 또는
봉헌물과 같은 기능을 하는 오브제를 필요로 하는 어떤 행위들을 떠올릴 수 있다. 예를 들어 가톨릭 신도들이
봉헌하는 초, 불교 신도들이 사찰에 올리는 쌀과 같은 오브제의 기원은 봉헌물일 것이다. 특히 질병이나 사고에서 신자들을 보호한다고 알려진 성인의 이름을 딴 이탈리아의 가톨릭 성당 내의 예배당 입구에는
오늘날에도 전 세계에서 몰려든 신도들이 소원을 새기거나 옛 봉헌물에 새겼던 문구를 새긴 금속판이나 간단한 오브제들이 넘쳐나듯 쌓인다. 지난날에는 교회 등의 성소(聖所)에서
후광(aura)을 발견했지만 오늘날 우리가 후광을 발견하는 장소는 스크린 속이나 무대 속이다. 아니면 대단한 예술가들의 작품을 전시하는 미술관도 그 장소에 합류할 수 있다.
그 장소 안에 서 있는 스타들이야말로 아우라의 담지체다. 아무리 가까이 다가가도(스타들은 무대 위에서나 사이버 공간에서 팬들에게 스스로 다가오기도 한다.) 멀리
있음, 거리를 현현할 때에야 아우라를 지닌 스타로 남는 이들. 살아있는
스타에게 쏟아지던 선물은 세상을 떠난 스타에게도 형식이 바뀌어 계속된다. 스타였던 이들이 잠든 묘석
근방에는 메시지와 꽃다발, 팬들이 자신의 신체 가까이 간직 했던 작은 오브제들이 끊임없이 쌓인다. 이 오브제들은 스타의 신성함을 간직하고 스타의 효력을 믿는 팬들의 소망과 욕망을 담고 있는 현대의 봉헌물이다.
다시 옛 봉헌물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도처에 산재해 있던 봉헌물들은
보통 고귀함과 거리가 먼 원시적이고 통속적인 오브제들이었고 신체와 관련된 오브제가 많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통속적이고
생체적인 봉헌물의 전통은 기독교 문화가 유럽의 정신문화를 장악하기 전, 이교도 무리 속에서 이미 시작되었다. 그런데 고대 그리스, 에트루리아,
로마 시대의 봉헌물이나 오늘날 키프로스, 바비에르, 이탈리아, 이베리아 반도 등의 기독교 성지에서 발견되는 봉헌물들이 거의 같은 크기와 재료, 제조 기술, 형태화 방식을 가지고 있다. 미술사학자들이 거의 주목하지 않았던 봉헌물 오브제의 특징에 주목했던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Georges Didi-Huberman)은 이 오브제들이 “미적인 유치함, 진부하고
천편일률적인 성격을 지닌 탓에 모든 ‘위대한’ 양식의 역사에서 동떨어진 자리를 배정”받았다고 지적했다. 봉헌물
오브제의 생체적 천박함은 아카데미와 규범적 비평이 낳은 예술의 미적 모델을 위협한다는 것이다. 신도들은
평범한 오브제 중 아무거나 봉헌했던 것이 아니다. 신도들은 극단적인 사건이나 어떤 증상에 저촉되었던
오브제를 주로 봉헌했다. 불행한 경험이나 기적과 관련된 오브제와 같은 것들이 선택되었다. 다리를 다쳤던 이가 다리 부상에서 치유되었다면 그는 부상 당했을 때 사용했던 목발이나 지팡이같은 오브제를 봉헌물로
바쳤을 것이다. 목발 이외에도 상해를 입은 신체에 사용되었던 원시적인 보철물들은 곧장 봉헌의 오브제가
되었다. 부상당한 이를 들어 올렸던 들것, 앉은뱅이가 앉아있었던
판자 조각 같은 것도 목격할 수 있다. 망자가 입었던 옷도 봉헌된다.
화살처럼 누군가의 신체에 직접 상해를 입혔던 도구들도 봉헌물이 되었다. 신체가 경험하는
시련의 흔적, 후유증으로서의 오브제는 봉헌의 오브제로 구성될 수 있다.
혹은 스타와의 각별한 추억을 담고 있다고 생각하는 물건을 스타에게 선물하는 팬들처럼 봉헌하는 이들은 자신에게 각별한 물건을 신에게
바쳤다. 중세 시대 신도들은 이러한 정신적 논리에 따라 빵이나 살아있는 짐승, 귀중품, 심지어 아이들을 교회에 바쳤다.
봉헌물 이미지에 각별한 관심을 표하는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은 바르부르크의 주장뿐 아니라 ‘밀랍’ 초상의 역사에 대한 세기말
비엔나 미술사가 슐로서(Julius von Schlosser, 1866~1938)의 저작이 지닌 중요성을
강조한다.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은 밀랍을 조형 재료로 사용했던 조각가 메다르도 로소(Medardo Rosso, 1858~1928)의 작품에 큰 관심을 표하기도 했다.) 슐로서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 무의식을 호명하고 필름 위에 현실을 전사하는 사진의 기술과 성과가 실재의
재현과 모방이 지녔던 가치를 재고하도록 하였던 시대의 미술사가다. (『밀랍 초상의 역사』는 1911년 출간되었다.) 한편으로 슐로서는 미술관에 보존되지 않는
밀랍 조형물들의 역사에 관심을 가졌고, 다른 한편으로 밀랍으로 만든 봉헌물에 관심을 가졌다. 역사가들에 따르면 중세 시대 봉헌 물의 압도적 다수가 밀랍 조형물이었다고 한다. 슐로서는 대리석, 석재, 목재, 상아 조각 등을 소장하고 기술하는 미술관과 미술사가 다루지 않는 밀랍 조형물의 역사를 탐구한 셈이고, 예술 작품으로 분류되는 밀랍 초상 이외의 다양한 밀랍 초상의 역사 역시 탐구한 셈이다. 밀랍을 사용한 해부학 모형, 봉헌물, 성유물 등이 슐로서의 연구 대상이 되었다. 밀랍이라는 재료는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는가? 밀랍 초상은 살아있는 이나 죽은 이의 본을 떠서 만들기에, 모델이 되는 원래의 인물과 조형물 사이에는 직접적인 접촉의 관계가 있다. 접촉을
강제하므로 아날로그 필름처럼 실재의 직접적인 흔적을 지닌 밀랍 조형물의 면모는 증거나 유물로서의 봉헌물의 성격을 강화한다. 그뿐 아니라 밀랍은 탁월한 형태 가소성의 재료다. 밀랍은 이미지
제조와 모방에 알맞은 재료인 셈이다. 한쪽 다리를 절던 환자가 완치되어 신에게 감사하는 봉헌물을 바치는
경우를 상상해보자. 그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신체를 도왔던 목발을 봉헌한다. 목발 대신 밀랍 다리를 봉헌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완치를 소원하는
동안 밀랍 다리는 기대를 담은 봉헌물일 것이다. 완치가 되었을 때, 즉
소원 충족의 시간이 도래했을 때 밀랍 다리는 감사의 봉헌물일 것이다. 기대의 시간과 충족의 시간 동안
환자는 계속 자신의 목발을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밀랍은 불행과 기도에 조형적으로 맞춰진다. 밀랍은 증상과 욕망이 변할 때 변할
수 있다. 다리를 절던 이가 완치된다. 이번에는 독한 폐렴에
걸린다. 이 경우 그는 밀랍 다리를 녹여 얻은 재료로 봉헌할 두 개의 멋진 폐를 만들지도 모른다. 이는 그의 온전한 자유일 것이다. (…) 가소성을 지니고 있는 모든 재료처럼 밀랍은 봉헌물이 마법적으로 역진화하고, 치유하며, 변용할 징후의 모든 불안정성에 완벽하게 동참한다. (…) 밀랍은 복수의 기능을 가지고 있고 재생산이 가능하며 변형에 능한데 이러한 밀랍의 특징은 밀랍이 재현하면서도
다른 한편 쫓아버려야 할 징후의 특징과 동일하다. (…) 밀랍은
말하자면 살을 획득하도록 한다.” -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 『엑스 보토』
그런데 슐로서는 밀랍 조형물이야말로 과학적 관찰에 따라 비례를 존중하는 사실적인 초상의 등장에 기여했다고 주장했다. 자율적인 초상화의 등장 과정을 다룰 때 바사리(Giorgio Vasari)는 밀랍 초상의 중요성을 간과했고 예술사를 왜곡했다는 것이다. 슐로서는 바사리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사실적인 밀랍 인물 초상화의 부상을 묘사하지만, 인물 초상화의 역사적 전개방향을 정립하려는 의도 탓에 놓치고 있는 지점도 존재한다.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은 슐로서가 밀랍 봉헌물을 다루면서 밀랍으로 만든 인물상들의 중요성을 과장하고 있다고 보았다. 1630년대를 예로 들면 밀랍 인물 봉헌물의 중요성은 상대화되어야 마땅하다.
당시 피렌체 지방에는 6백여 개의 밀랍 인물 봉헌물이 존재했던 것에 반해 해부학적 봉헌물, 즉 신체 장기의 일부를 본뜬 봉헌물은 2만 2천여 개에 육박했다고 한다. 슐로서가 제대로 분석하지 않았던 2만 2천여 개의 인체 봉헌물, 예를
들어 외따로 제작된 귀, 턱, 신체 기관들, 심장, 실물 크기의 고환들도 봉헌자의 초상화만큼이나 봉헌자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지 않았을까? 디디 위베르만은 신체 부분들을 조잡하게 모방하여 신에게 바친 이 봉헌물들, 거의 불쾌함을 불러일으키는 봉헌물들이 봉헌자와 맺고 있는 관계에 대한 흥미로운 질문과 가설을 이어간다. 간단히 말해 이 부분 신체의 봉헌물 역시 봉헌하는 자를 재현한다. 외양에
대한 사실적인 묘사를 동원하여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이 자의 증상과 기도, 살을 가지고 있는 봉헌자의
경험의 순간을 재현한다. 봉헌자가 “밀랍으로 본을 떠내고자 하는 것은 그가 지금 고통받고 있다는 것이고, 지금 다른 모습으로 탈바꿈하고자 하며, 평온을 되찾고자 하고, 치유되고자, 개종하고자 한다는 점”이라고 할 수 있다. 아마도 비대하게 부풀어 오른 신체의 일부처럼 봉헌자가 겪고 있는 불행의 특징들도 봉헌자 얼굴의 특징만큼이나
한 주체를 개체로 표현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또 다시 회의에 빠진다. 밀랍으로 만든 빵, 덩어리라 할 정교하지 않은 오브제와 섬세하게
조각해 낸 밀랍 얼굴이 어떻게 같은 가치, 같은 (예술적) 중요성을 띨 수 있단 말인가? 밀랍 조형물은 원래 모델과의 접촉의
산물이므로 퍼스(Charles Sanders Peirce)적 의미에서 지표적이고, 가소성을 지닌 재료이므로 닮음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밀랍
이외에도 얇은 금속판이나 종이 등을 사용하여 만든 봉헌물도 흔하였다. 금속판이나 종이도 밀랍처럼 가소성을
지닌 재료다.) 그리고 무정형에 가까운 밀랍 덩어리 봉헌물들이 봉헌자의 특징을 재현하고 있다는 믿음에서
닮음에 대한 당시의 사유방식을 추론할 수 있다.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은 중세 시대 지중해 연안 국가에서는
질병에 걸린 아이를 구하고자 할 때 아이를 저울에 달던 습관이 있었다고 상기시킨다. 저울의 한쪽 접시에는
아이를 올려두고 다른 쪽에는 아이의 무게만큼 밀랍을 쌓았다는 것이다. 이때 아이의 무게와 밀랍의 무게는
닮음의 근거가 된다. 저울 위에 아이를 올려 기도를 하던 관습이 아니라도 재료의 물리적 속성에 근거하여
봉헌자들의 “생체적 무게, 과잉, 짓누르는 현전”을 드러내는
봉헌물을 선택한 사례는 무수히 많다. 여기에는 가장 물리적인 속성이 가장 생체적이고 징후적인 것을 표현
하는 역설이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