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소린, 〈마른 꽃을 처리하는 방법〉, 2021, 4K, 3채널 비디오, 8분 35초/3분 30초/3분 © 윤소린

나는 20대 초반, 20대 후반, 30대 초반에 “Romantic Love was invented to manipulate woman낭만적인 사랑은 여성을 조종하기 위해 발명되었다” 문구를 각각 다른 장소에서 보았다. 이 문구는 처음에는 이해가 잘 가지 않는 경구였지만 어느 순간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한 말이 되었고, 내가 30대에 들어서면서는 문장을 구성하는 단어들 사이에서 개인적 경험을 떠올리며 양가적인 감정을 느끼게 되었다.

전시 제목인 〈너를 떠나〉는 친밀했던 대상과의 의도적인 분리 혹은 불가피한 대상의 상실을 드러내지만, 전시에서는 이 ‘떠나는 대상’에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을 포함시켜 스스로를 ‘너’라고 지칭하는 성찰적인 관점을 중첩하였다. 나는 무엇을 떠나왔고 어떤 선택이 지금의 자신을 구성하는지 탐색하는 이 제목에서 ‘떠나’라는 표현은 결의에 차 보인다. 분리와 상실을 마주했을 때 그들이 다른 어느 곳을 향하여 나아갈 수 있는 동력으로 변환되길 바라는 마음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할 수 있는 상태

여기서 다른 어느 곳은 낭만적이고 초월적인 장소가 아니다. 그보다는 이곳을 비판적으로 분석하는 시선의 자리이다. 그 시선의 자리를 상상할 때 나는 선배 페미니스트들의 사유를 참조하곤 한다. 〈마른 꽃을 처리하는 방법〉에서 말라 비틀어진 꽃다발들이 미술 작업으로 다뤄질 수 있다는 확신은 주디스 버틀러가 프로이트의 이성애적 ‘우울과 상실’을 전유하며 퀴어성을 설명하는 강연에서 실마리를 얻었다. 이미 폐허처럼 보이는 장소를 다시 해석하여 재생시키는 시선은 마른 꽃다발을 보며 느꼈던 이유를 알 수 없는 무력감에 접근할 수 있는 힌트를 주었다.

말라버린 꽃들은 생생했던 감정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화석화된 현재를 드러내는 오브제로서 내게 의미있게 다가왔다. 그렇지만 이것을 더이상 같은 상태로는 간직할 수 없었기에, 폐기하여도 폐기되지 않게 하는 방법이 무엇일지 고민했다. 그리고 대상이 가질 수 있는 ‘끝난 상태’의 오브제를 회생시켜 출발 상태로 되돌리기 위한 방법으로 잉크를 떠올리게 되었다. 오브제를 잉크로 만드는 과정에서 모든 요소를 하나씩 들여다보고 낱낱이 분해하는데 긴 시간과 노력을 들였다.

사적이고 감정적인 경험을 객관적이고 비판적으로 바라보고자 하는 접근법이, 이 오브제에서 비롯된 ‘잉크’가 가지는 맥락의 출발점이다. 감상적이면서도 냉정하고, 무감각하면서도 아픈 “우울과 상실”의 상태는 상반되는 생각들 사이를 경유하고 싶도록 이끈다. 그리고 나는 이러한 심리 상태를 여성으로서 느끼는 무력감에 대해 분석하면서도 통찰할 수 있는 ‘가능성의 상태’라고 말하고 싶다. 

 
다시 쓰기

그래서 “낭만적인 사랑은 여성을 조종하기 위해 발명되었다”는 잉크로 처음 출력한 문구가 되었다. 이것은 미국 미술가 제니 홀저Jenny Holzer의 프로젝트 트루이즘Truisms에 포함된 경구 중 하나이다. 표면적으로 로맨스와 여성을 대척점에 두는 듯 보이는 이 문구는 찬성과 반대라는 이분법적인 판단을 유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각 단어의 의미를 곱씹을수록 찬성과 반대로 규정할 수 없는 양가적인 상태로 나를 이끈다.

그리고 이 단정적인 문구에 내포된 복잡한 심리를 전달하기 위해 나는 필사 대신 출력 과정이 조금 더 복잡한 실크스크린을 선택했다. 피부를 닮은 오브제 위에 스크린 표면의 미세한 틈 사이로 잉크 덩어리를 밀어내는 신체의 움직임은, 이로써 가시화되는 텍스트가 추상적이거나 초월적인 것을 넘어 체득한 이해를 동반하길 제안한다. 

〈재정의〉는 초국가적으로 참조되는 텍스트에 대하여 현실적인 시공간을 살아가는 개인의 반응을 모으려는 시도이다. 이때 제니 홀저의 텍스트는 미술사적으로 권위를 발휘하는 오마주의 대상이 아닌, 현재-한국-여성이라는 위치에서 재고되는 텍스트로 소환된다. 서구에 위치한 선배 페미니스트의 작업을 참조하여 반복 소환하는 행위는 서구에서 유래한 개념미술이나 페미니즘미술을 지금 이곳에서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 혹은 “나”의 상황은 전 세계 “여성의 경험”과 비교할 때 얼마나 보편적이고 어떻게 특수하며 얼마만큼 공유될 수 있는지를 묻는 어려운 질문들을 피해가기 어렵다.

그렇지만 나는 선배 페미니스트의 사유를 다시쓰는 사례에 대해 연구하면서, 작업으로 수행되는 ‘다시’ 쓰기가 구체적인 맥락 안에서 한국 여성의 이슈를 드러내는 유효한 방식이 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지금 한국 사회에는 '여성은 무엇인가?'에 대한 수많은 질문과 반응이 쏟아지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자기 자신을 페미니스트로 인식하는 여성은 지적이고 감정적인, 또는 냉정하고 비이성적인 역학들 사이에서 끊임없이 영향받으며 자신의 위치와 방향을 좌표로 그려나가게 된다.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는 여성의 경험들을 살피다보면 분노하거나 냉소하기 쉽다. 누군가는 감당하기 어려운 감정에 휩싸여 더욱 차가워지거나 절박해진다. 스스로를 현실에 대해 무감각하게 만드는 생존 방법을 모색하여 여성의 이슈에 공감하지 않으려는 사람도 있다.

페미니즘이 소비주의와 결탁하여 돈으로 환원되고 있다고 모함하기도 한다. 나는 페미니즘을 둘러싼 이러한 반응들로인해 현재 한국 사회에서 “페미니스트”가 분열을 일으키거나 이분법적인 판단을 조장한다는 의미의 용어로 오염되었다고 본다. 그래서 나는 이에 대응하여 ‘양가적인 심리 상태’를 통과하며 ‘페미니스트’라는 용어에 접근하고자 했다. 그리고 여러 감정이 병존하고 애증이 엇갈리는 움직임의 현장으로서 페미니스트의 이성애 연애 역학에 주목했다.


윤소린, 〈재정의〉, 2021, 꽃에서 추출한 잉크, 스타킹, 가변설치 © 윤소린

판타지적 연애 열망과 심리적 갈등의 부담

〈노출〉은 페미니즘을 지지하는 여성들의 사적인 갈등을 들어보고 싶어서 기획되었다. 현대의 ‘연애’는 젠더 분열과 이분법의 곤란을 마주하는 혼란의 장이다. 미디어에서는 연애 관찰 예능 프로그램 기획에 열광하지만 여전히 데이트 비용을 이해 충돌처럼 느끼는 문제는 해소되지 않았다. 나는 이와 같은 현상을 변화된 젠더 관계 안에서 발생하는 ‘연애’에 대한 판타지적 열망과 이로써 반추되는 연애 불가능성의 징후라고 느꼈고, 이것을 페미니스트의 연애로 들여다볼 때 비로소 답보 상태를 너머 분석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신을 페미니스트로 인식하는 헤테로 여성에게 작업에 참여해주기를 요청했고, 대화를 통해 남성을 사랑하는 것에 대한 내적갈등이나 통찰을 나누며 내밀한 역동을 감지하고 싶었다. 

참여자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목소리(또는 텍스트)로 전해주었는데, ‘자신’의 ‘사적인’ ‘경험’이 전시장에 놓여질 때 발생하는 편견, 오해, 사회적 낙인 등 ‘심리적인 부담감’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서의 부담감이란 개인적인 신상이 노출되는 부담이기도 하지만, 현재 여성이 한국 사회에서 마주하게 되는 문제에서 간단하게 벗어날 수 없다는 심리적 갈등의 부담도 포함되어 있다. 나는 작업을 통해 이 부담감 대한 질문을 오랫동안 지속하고 싶었고, 그래서 심리적 부담이 작동하는 조건을 작업에 포함시키고자 했다. 이를 위해 ‘노출하는 이미지’와 ‘노출하지 않는 이미지’를 병치하여 참여자가 드러낼 수 있을 만큼을 가시화했다. 

한편, 〈세이프 서치〉와 〈식별 불가 퍼포먼스〉는 사랑과 안전 혹은 연애와 능력을 병치하여 직감적이고 심리적인 반응에서부터 개인의 태도가 형성되기까지 여성의 일상에 구조적으로 내재한 질문들을 드러내고자 했다. 〈세이프 서치〉는 여성의 안전이란 ‘범죄로부터의 안전’만 염두한 문제가 아니고, 삶을 대하는 태도를 프레임 지을 수 있는 이슈임을 보여주고자 했다. 또한, 〈식별 불가 퍼포먼스〉에서는 한국 사회에서 ‘능력주의’를 둘러싼 신화와 그 속에 여전히 남아있는 구조적 성차별을 질문하기 위해, 한 여성의 뛰어남을 기술하는 다른 여성의 성찰을 통해 선망과 실망의 심리 상태를 질문해본다.


복잡한 면면과 떠나기의 주체성

이 전시는 헤테로 여성의 현실을 지탱하고 있는 긴장감, 혹은 모순적인 양가 감정을 조명하는 데 초점을 맞춰 평범하고 보편적인 심리에 내재한 미세한 균열을 드러내고자 했다. 어쩌면 떠나는 중이지만 여전히 붙잡혀있기도 한 긴장의 상태를 전면화하게 된 이유는 전시에 포함된 작업의 레퍼런스들이 개인의 삶이라는 현실에 놓이면 복잡한 층위를 생성하기 때문이었다. 처한 환경과 현실적인 조건 등을 고려할수록 그 복잡성과 입장을 단순 명료하게 정제할 수 없음을 실제로 경험하고 내린 판단이었다. 얽혀있어 단일하게 통합할 수 없는 면면은 전시장에서 작업의 물질적인 형식에 담겨 텍스트를 초과하는 ‘뒤얽힌 촉지적 정보’로 전달된다.

이렇게 경구와 선언, 팽창과 수축, 떠남과 찾아감의 움직임을 통과하며 여성이라는 조건으로 가시화되는 갈등의 촘촘한 면면을 전달하고자 했고, 미술의 가능성에 기대어 말끔할 수 없는 감각을 전달하고자 했다. 그렇지만 이러한 나의 선택은 여전히 해소되지 않는 질문을 남긴다: 어떻게 해야 우리는 균열로 뒤덮혀있지만 여전히 그 자리에 박혀있는 ‘고고학적 잔재’를 지나 비로소 ‘다른 국면의 실루엣’을 상상할 수 있을까. 대안적 시선의 자리는 어떻게 해야 손에 닿아 더듬어질 수 있을까. 전시를 마친 지금 나의 관심은 떠남을 실천하는 방법론에 있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