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이, 〈숨 오케스트라 Act 1-2〉, 2024, 《무제: 말의 결》 전시 전경(제주갤러리, 2024) © 요이

“야생의 장소에서 귀를 기울이면 우리 것이 아닌 언어로 이루어지는 대화의 관객이 된다.” (로빈 윌 키머러, 『향모를 땋으며』80쪽)

흰 옷을 입은 어린 소녀들이 깊고 푸른 바다로 이어지는 검은 바위에 동그랗게 모여 앉아 의식적으로 숨을 쉰다. 스읍—하는 소리와 함께 몸 속 깊이 숨을 들이마신 후 숨을 참는다. 잠깐 동안의 정적 후 음파—하는 소리를 내며 숨을 내쉰다.  하아—, 후우—, 휘이—, 파아— 하는 소리와 함께 가슴을 부풀리고, 눈을 감고, 입을 오므리거나 다문다. 숨을 참을 때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아 고요하지만, 몸 안에 들어온 숨을 영원히 담아둘 수는 없기에 그 다음 차례의 내쉬기를 준비한다. 저마다 다른 리듬으로 숨을 들이마시고 내뱉는다. 눈을 감고 있지만 옆 친구들의 숨소리를 들으며 서로의 존재를 느낀다.

상대의 숨쉬는 소리는 기호가 되어 ‘나 여기에 있어’, ‘나 살아 있어’, ‘나 괜찮아’ 라고 번역된다. 동시에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지는 않지만 함께 숨을 쉬어야 안전하다. 그래서 소녀들은 바다로 이어진 길을 함께 걸어 들어가고 나온다. 소녀들이 숨쉬기를 나누는 바위는 제주 해녀들이 물질을 하는 바다와 겹쳐진다. 바다가 된 공간에서 해녀들이 헤엄치며 숨을 참는다. 바닷물과 해조류의 일렁거림이 해녀들의 몸짓과 닮았다. 밀물과 썰물이 바다와 땅의 경계를 이리 저리 옮겨 놓듯이, 해녀들의 헤엄과 숨은 물 안과 밖의 경계를 흐트러뜨린다. 해녀의 몸은 물의 몸이 된다. 해녀들의 헤엄 소리와 소녀들의 숨소리가 합쳐진다. 그들의 몸짓은 소리를 내며 접촉하고 소통한다. 소녀들의 숨쉬기는 해녀들처럼 물의 세계에 진입하기 위함이다. 해녀들의 지금과 소녀들의 나중이 숨쉬기로 연결된다.

포유류 동물인 인간이 숨을 쉴 수 있는 공간은 공기로 가득 찬 세계이다. 이 세계에서 우리는 의식하지 않아도 숨을 쉴 수 있기에 잠을 잘 때도, 정신을 잃었을 때도 호흡한다. 그런데 이 소녀들은 왜 바위 위에서 숨쉬기를 연습하고 있을까? 이들은 새로운 세계, 물의 세계에서 숨쉬며 존재하는 법을 배우는 중이다. 아가미가 없는 인간은 물로 가득 찬 세계에서는 숨을 쉴 수 없지만, 해녀들은 물과 땅의 경계를 오가며 숨을 쉰다. 그들은 인간중심주의적 근대 사회가 숭배하는 과학 기술에 의존하지 않고도 물 속 생물들과 호흡을 맞출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의 숨쉬기는 또한 삶과 죽음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떠다닌다. 그래서 온몸으로 배우고 터득하지 않으면 안 된다. 소녀들은 해녀들의 숨쉬기를 배우고 있다.   


요이, 〈숨 오케스트라 Act 4〉, 2025, 《터치필리》 퍼포먼스 전경(대안공간 루프, 2025) © 요이

이 작품은 제목에서도 알려주듯이, 요이 작가의 이전 작품인 〈숨 오케스트라, Act 1〉의 후속작이다. 〈Act 1〉에서는 작가의 표현대로 헤엄치기의 ‘언러닝’을 수행하고자 했는데, 물의 공간에서 존재하는 법을 새롭게 감각하려는 것이었다. 헤엄치기의 ‘언러닝’은 숨쉬기의 ‘언러닝’을 이끌었고, 〈숨 오케스트라, Act 2〉를 낳았다. 헤엄치는 몸짓은 물 안팎으로 숨을 통하고 참는 몸짓을 바탕으로 하여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두작품의 밑바탕에는 경계에 대한 질문이 있다. 서로 다른 세계에 속한 몸들은 어떻게 그 경계를 넘어서 소통할 수 있을까? 그런데 우리는 다른 세계의 몸들과 소통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가?

해녀의 세계는 비인간 존재들의 세계처럼 윤리적으로 다루어지지 않아도 된다고 여겨지는 것 같다. 공식적으로는 보존해야 할 세계 무형문화유산으로서 해녀 문화를 추앙하면서도 해녀들의 삶의 기반이 되는 해양 생태계를 파괴하는 경제 개발을 최우선 순위에 두는 모순적인 우리 사회에서 해녀들의 헤엄과 숨, 그들의 삶의 방식은 존중되지 않는다. 인류의 산업 활동이 가져온 기후변화 때문에 지구는 이미 제6대 생물 대멸종 시대에 들어섰지만, 경제적 손실을 일으킨다며 멸종위기종 동식물을 박멸하는 정책을 펼치는 것과 같다. 작가는 이 작품들에서 해녀의 모습을 거의 담지 않았는데, 전근대적 존재로 박제되거나 관광상품으로 대상화되어 유통되는 해녀의 이미지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대신에 작가는 해녀의 몸짓을 물의 언어로서 배우고 기록하는 다른 몸들을, 자신과 소녀들의 몸의 움직임을 작품에 담았다.

해외에서 십여 년을 지내다 코로나19 팬데믹 시기에 우연히 제주도의 한 작은 마을에 정주하게 된 작가는 해녀 삼촌들에게서 바다에서 헤엄치고 숨쉬는 법을 배우게 된다. 육지, 특히 도시에서만 살아온 작가가 배웠거나 배우지 못했던 수영법과는 전혀 다른 방식이었다. 해녀 삼촌들은 딸이라서 정규 교육의 기회를 박탈당하고 물질을 하여 돈을 벌도록 강요당했기에 표준화된 수영을 배우지 못했다. 그들은 각자 자신만의 헤엄, 잠수, 숨쉬기 방법을 터득했거나 선배 해녀들의 방법을 전수받았다. 해녀의 몸이 다양한 만큼 그들의 잠수법도 다양하지만, 공식적으로 기록된 적은 없다. 서구화된 성인 남성의 몸에 맞춰진 공식화된 수영법이 아니기 때문이다.

작가는 같은 시공간에 존재하지만 전혀 다른 세계에서 살아가는 것 같은 자신과 해녀 삼촌들 사이의 간극을 깨닫는다. 영어와 서울말의 세계와 제주말의 세계, 국가가 인정하는 정규 교육을 받은 자의 세계와 자연에서 스스로 지식을 터득한 자의 세계, 땅 위에서만 숨쉬며 소통하는 존재들의 세계와 이를 물 안과밖을 넘나들며 행하는 존재들의 세계. 평생 물질을 하며 바다에서 지낸 세월만큼 그들은 물의 몸을 가지고 있기에 물의 숨, 물의 언어를 할줄 알았다. 작가는 해녀들의 숨쉬기와 숨소리는 단순한 생리 현상이 아니라 “세대를 거쳐 전해지는 삶의 리듬을 담은 언어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한다.

해녀들과 함께 살면서 작가는 그들이 바다에서 몸의 모든 감각으로 들이마시고 내쉬는 숨을 해석하고 싶어졌다. 그렇게 하려면 두 세계를 나누는 경계를 넘어서야 한다. 해녀 삼촌들에게서 물질을 배우는 작가는 현대 도시의 무의식적 숨쉬기 방법에서 빠져나와 물의 세계와 땅의 세계를 연결하며 새롭게 숨쉬는 방법을 탐구한다. 그리고 그것을 어린 소녀들과 자신의 몸 안에 기록한다.


요이, 〈숨 오케스트라 Act 5〉, 2025, 퍼포먼스 전경(서울 한강 터널, 2025) © 요이

문화인류학자 에두와르도 콘은 모든 생물들의 몸짓, 소리, 신체의 모습을 기호로 간주하고, 이를 그 생물들의 언어로 본다. 콘은 어떤 소리와 의미가 임의적으로 연결되면서 언어를 이루는, 즉 상징을 주로 사용하는 인간의 언어뿐 아니라 표상하려는 사물과 유사한 소리나 동작을 나타내는 기호로 된 ‘아이콘적’ 표상 양식과 표상하려는 사물과 관련성 있는 기호로 이루어진 ‘인덱스적’ 표상 양식도 언어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모든 생물은 서로의 몸짓, 소리, 신체의 모습에 서로 반응하면서 진화해 왔는데, 이는 단지 생물학적 반응이 아니라 서로의기호를 해석하며 사고해 온 과정의 결과인 것이다.

콘은 이 과정이 생명을 구성한다고 본다. 그는 “생명은 기호적이며 기호작용은 살아있기 때문에 생명과 사고 모두를 ‘살아있는 사고’로 다루”어야 한다고 본다(에두와르도 콘, 『숲은 생각한다』139쪽). 해녀들의 숨은 물 안팎을 넘나드는 몸짓을 표상하는 아이콘적 기호이며, 몸의 감각을 통해 표현하고 느끼고 해석하는 언어이다. 인간의 언어와 달리 숨쉬기는 생물종을 넘어선 소통을 가능하게 한다. 지구에서 살아가는 대부분의 생물은 숨을 쉬기에 번역하지 않아도 서로 소통이 가능한 언어를 통해 생각을 나눈다. 옆에서 숨쉬는 짝의 숨소리에 안심하듯이, 숨은 정동을 불러 일으키면서 서로의 존재를 이해하게 한다.

그렇다면 숨쉬기는 관계에 관한 것이다. 〈숨 오케스트라 Act 1〉의 헤엄치기가 몸과 바다가 얽히면서 맺어가는 관계를 보여줬다면, 〈Act 2〉의 숨쉬기는 함께 숨쉬는 물 안팎의 존재들과의 관계로 그 범위를 확장한다. 숨은 인간을 포함한 수많은 지구 존재들의 몸을 들어갔다 나왔다 하면서 같은 물질로 서로 다른 몸들을 이룬다. 페미니스트 영문학자 스테이시 앨러이모는 이를 ‘횡단신체성’이라고 이론화했다. 코로 숨을 들이마시면 공기 중의 산소가 폐를 거쳐 몸에 흡수된다. 숨을 내쉬면 몸 속에서 생성된 이산화탄소가 빠져나간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호흡하는 동안 우리 몸을 빠져나간 이산화탄소는 나무와 이끼와 식물성 플랑크톤과 우뭇가사리의 숨을 따라 그들의 몸 속으로 들어가고, 그들이 내뱉은 산소는 우리와 같은 동물의 몸 속으로 들어온다. 우리는 숲과 바다의 다른 생물들과 숨으로 연결되어 있다. 우리의 몸에 생기를 불어넣는 숨은 그들의 몸에도 생기를 불어넣으며, 우리의 몸들을 같은 물질로 이루며 사고하게 한다.

우리도 물의 세계에서 숨쉬었던 적이 있다. 하지만 어머니 뱃속의 양수를 떠나 공기의 세계로 진입하는 순간 우리는 물 속에서 숨쉬던 방법을 잊어야 했고, 물 밖 세계의 숨쉬기를 배워야 했다. 그 순간 다른 이의 도움 어린 손길이 필요한 아기도 있지만 거의 스스로 이전 숨쉬는 방법의 ‘언러닝’과 새로운 숨쉬기의 ‘러닝’을 이루어 낸다. 그렇다고 물 속에서 숨쉬는 법을 영원히 잊어버린 것은 아니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아기들은 물을 편안해하고 가르쳐주지 않아도 수영을 곧잘 한다. 작가는 원래 인간의 폐는 고래과 포유류 동물처럼 크고 잘 발달해 있었는데 물에서 나오면서 퇴화했다고 말하고, 잠수를 오래 한 해녀의 장기가 일반인보다 3배씩 더 커지기도 하면서 폐의 기능을 회복하기도 한다고 알려 준다.

어린 소녀들의 숨쉬기를 담은 작품을 보면서 관객들도 숨을 들이마시고 참고 내쉬어 본다. 해녀들의 숨은 소녀들에게, 소녀들의 숨은 관객들에게 전이된다. 물이라는 몸을 만난 해녀들, 소녀들, 관객들은 물과 접촉하고, 교류하고, 소통하면서 물의 언어를 배운다. 숨을 배운다. 고래의 생각을 이해한다. 이들은 함께 스읍—하면서 숨을 들이마신 후 멈춘다. 음파—하는 소리를 내며 숨을 내쉰다.  하아—, 후우—, 휘이—, 파아— 하며 숨을 쉰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