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희정(b. 1987)은 소외되는 것과 주류가 되지 못한 것, 또는 한때 주류였다가 외면당하는 대상들에 관심을 두며 작업을 이어왔다.
 
작가는 영상을 주 매체로 다루며 성장과 발전이라는 가치가 중요시되는 신자유주의 체제 안에서 놓치고 있는 것들과 배제되는 영역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로써 궁극적으로 작가는 인간의 조건을 탐구하고 삶의 의미를 찾고자 한다.


최희정, 〈Rehearsal〉, 2022, 단채널 영상, 컬러, 스테레오, 9분 21초 © 최희정

최희정의 작업에서 다루어지는 것들은 주로 성장과 부, 권력 지상주의로 흘러가는 신자유주의 경제 속에서 배제되는 대상들로, 그러한 개인의 우울과 갈등, 불평등, 사회부조리는 점차 빠르게 ‘그림자’의 영역에 고립된다.
 
작가는 의미 있는 ‘주름’을 하나씩 새기고 기억하며 살아가기 버거운 세상에서 예술가와 관객이 이루는 접점을 찾아 예술로서 실천함으로써, 현대 사회에서 간과되는 인간 존재의 본질에 대해 탐구하고 질문한다.


최희정, 〈Mélange〉, 2017, 4채널 영상, 2분 54초 © 최희정

여기서 ‘주름’이란 개인의 역사에 따른 흔적, 그리고 상대의 역사, 나아가 공동체의 역사에 의한 흔적을 의미한다. 종이를 접었을 때 두 면이 만나 주름을 남기듯이 개인 또한 타인과 접함으로써 서로의 삶에 흔적을 남긴다.
 
작가는 이러한 주름이 깊어질수록 관계 또한 깊어진다고 보았다. 즉, 주름은 표면적인 것이 아닌 깊이감이 생기는 입체적인 무언가다. 가령, 〈The folds〉, 〈Galatea〉, 〈Hace viento〉, 〈Mélange〉 등의 작업에 등장하는 반복과 겹침, 데칼코마니처럼 서로 대응하는 이미지들은 그러한 ‘주름’의 구조를 형상화 한다.


최희정, 〈Galatea〉, 2018, 16mm 아날로그 B/W 필름, 5.1 서라운드 채널, 4분 49초 © 최희정

그 중, 2018년도 영상 작업인 〈Galatea〉는 상하 두 개로 분할된 화면에서 시작한다. 검은색과 흰색으로 나뉜 두 화면은 상하 반전되었다가 다시 좌우 분할로 나뉘고 또 반전되길 반복한다. 이후 화면에는 손이 등장해 흰색 종이를 천천히 접는 모습이 나오기 시작한다. 접힌 종이는 점차 기하학적 구조를 이루고, 곧 입체가 되고 쌓여 탑과 같은 조형물이 된다.
 
종이를 접던 손의 인물은 화면에 다시 등장해 그가 만든 탑 사이를 걸어 다니며 탑을 이루는 입체의 표면을 어루만진다. 이내 줌아웃된 화면 안에서 인물은 다양한 모양과 크기의 탑 가운데서 가장 높은 탑 하나를 계속해서 응시한다.


최희정, 〈Galatea〉, 2018, 16mm 아날로그 B/W 필름, 5.1 서라운드 채널, 4분 49초. 사진: 이주환. © 챔버

최희정은 이 작품이 “자신만의 조각 갈라테이아(Galatea)를 찾아가는 과정”과 같다고 설명한다. ‘갈라테이아’는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에 나오는 피그말리온이 만든 조각상의 이름이다. 피그말리온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여성의 모습을 조각으로 만들었고, 결국 완벽한 아름다움을 가진 그의 조각 ‘갈라테이아’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피그말리온은 사랑과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에게 이 조각상을 자신의 아내로 삼을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그의 정성에 감동한 아프로디테는 갈라테이아에게 생명을 불어넣어 인간으로 만들어 준다.


최희정, 〈Galatea〉, 2018, 16mm 아날로그 B/W 필름, 5.1 서라운드 채널, 4분 49초. 사진: 이주환. © 챔버

최희정은 이 이야기 속에서 이상적인 아름다움에의 추구라는 예술가의 태도에 주목하고, 자기 자신에 대입했다. 작가의 이상이 구현된 작품은 그 스스로 생명을 얻어 예술가로부터 독립된 무언가가 된다.
 
이한범 미술비평가는 “〈Galatea〉을 통해 최희정이 선언적으로 혹은 어떤 염원으로 보여주는 자기 자신의 이상적인 아름다움은 주름 잡힌 평면으로 구축된, 중심이 빈 구형의 입체물로 쌓아 올려진 기념비적 탑”이며, “주름은 하나의 ‘이상’이”라고 말한다. 


최희정, 〈구원의 번개〉, 2021, 4채널 영상, 컬러, 스테레오, 13분 16초 © 최희정

즉, 〈Galatea〉는 최희정이 구현하고자 한 이데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그의 ‘갈라테이아’는 곧 예술가로서 관객과 이루는 접점이자 삶의 실천 중 하나로 이어진다.
 
이러한 예술가적 태도는 4채널 영상 작업 〈구원의 번개〉(2021)에서도 반영되어 나타난다. 여기서 작가는 “체화된 작가의 수행성과 작업의 완성에 대한 기대를 이야기”한다. 네 명의 등장인물이 차례로 나와 넓은 공간을 걸어다니며 자기 팔목에 스스로 팔찌 묶기, 팔짱을 끼고 바닥에 앉아 일어서기, 반짝이는 종이를 공중에 뿌리기, 사다리 오르기를 각자 계속해서 시도하지만 결국 실패한다.


최희정, 〈구원의 번개〉, 2021, 4채널 영상, 컬러, 스테레오, 13분 16초 © 최희정

마치 영원히 바위를 굴리는 형벌을 받은 시지프스처럼 같은 행위를 반복하는 모습과 연출은 예술이란 것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장치가 된다. 〈구원의 번개〉 속 네 명의 인물은 각각 한 명 한 명의 작가를 상징하며, 이들의 무의미해 보이는 반복적이고 작위적인 행위들은 작업의 과정을 은유한다.
 
작가는 이를 통해 “당신이 보는 모든 것(예술 혹은 그 외의 모든 것)은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이야기”하고자 했다고 설명한다.


《사랑의 반대는 버림》 전시 전경(아트스페이스 보안2, 2023) © 최희정

아트 페어가 성황을 이루던 2022년 당시, 최희정의 머릿속은 “작가로서 무언가를 끝없이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선택 받지 못한다면 그것이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가”에 대한 고민과 함께 작업에 대한 주저함과 불안함이 뒤섞였다.
 
동시에, 작가 본인의 이상을 실현하는 것보다 시장에 선택되어야 하는 미술 시장의 논리 안에서의 회의감은 작가의 반려 식물에 대한 개인적 경험과 겹쳐지게 되었다.
 
최희정의 개인전 《사랑의 반대는 버림》(아트스페이스 보안2, 2023)은 온라인 중고 시장을 통해 경험한 반려 식물 거래를 바탕으로 취향은 사라진 채, 결국 재테크로 이야기되는 모든 것에 관해 이야기한다.


《사랑의 반대는 버림》 전시 전경(아트스페이스 보안2, 2023) © 최희정

전시는 자신의 취향에 따라 식물을 구매하고자 했던 작가가 “본인 취향대로 고르지 말고 이왕 키우는 거 돈 되는 것을 키워”라는 이웃 판매자의 조언을 들은 경험에서 출발했다. 그는 ‘반려 식물’이 어떠한 상황이든 책임을 지고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 뜻을 지닌 ‘반려’라는 단어가 붙음에도 불구하고, ‘돈’이 되지 않으면 소외되고 버림 받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주목했다.
 
똑같은 식물이더라도 인간이 어떻게 보는가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와 가치를 가지게 된다. 누군가에게는 소중한 식물이 누군가에겐 무의미한 것이 되는 것이다. 최희정은 “나는 그 사이에서 어떤 태도를 취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중심으로 전시를 준비했다.


최희정, 〈사랑의 반대는 버림〉, 2023, 3채널 영상 설치, 컬러, 스테레오 © 최희정

전시 제목과 동명의 작품인 3채널 영상 설치 작업 〈사랑의 반대는 버림〉(2023)은 식물이 버려지거나 돈으로 환산되어 가치가 매겨지는 상황들을 보여준다. 이 작업을 위해 작가는 식물을 나눔하는 20명의 사람들을 상대로 인터뷰를 진행하였고, 그 과정에서 코로나로 본업을 할 수 없어 생계를 위해 식물을 기르는 사람을 알게 되었다.
 
그 사람과의 대화를 통해 작가는 어떤 식물이 희귀식물로 규정되거나 가격이 정해지는 것은 소수의 도매업자에 의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 오늘날 이처럼 특정한 상품의 가치 혹은 유행이 권력과 자본을 가진 이들에 의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지는 상황은 어렵지 않게 목격할 수 있다.


《사랑의 반대는 버림》 전시 전경(아트스페이스 보안2, 2023) © 최희정

한편, 2채널 영상 작업인 〈분홍 꽃이 피는 매화〉(2023)는 죽을 뻔한 매화나무를 살리기 위해 가지를 쳐내고 한국식 분재로 만드는 과정을 담고 있다. 그리고 그 결과물을 〈사랑의 반대는 버림〉이 상영되는 스크린 뒷면에 놓고, 매화나무가 어렴풋이 보일 수 있도록 어떤 영상도 없이 하얀 스크린으로만 존재하는 순간을 20초 정도 배치했다.
 
작품 안팎을 채우는 조명은 식물의 성장을 돕는 특정한 파장의 색에 근거하는 동시에, 작가 마음의 빛을 상상하여 추가했다.
 
이러한 최희정의 작업들로 이루어진 전시 《사랑의 반대는 버림》는 반려 식물 거래에서 출발해 경제 논리로 도구화된 현시대를 반추하게 만든다.


《사랑의 반대는 버림》 전시 전경(아트스페이스 보안2, 2023) © 최희정

최희정은 이처럼 식물과 마찬가지로 ‘반려’라는 의미나 ‘돌봄’에 대해 관심을 가져왔다. 그는 “일시적이지 않고 짧지 않은 시간을 바탕으로 만들어지는 관계를 추구”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관심을 바탕으로, 그는 빠르게 성장할 것을 강요하는 현대 사회에서 희미해진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의 ‘주름’에 주목한다.


《오랜만에 내 그림자를 보았다》 전시 전경(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 2024) © 최희정

2024년 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에서 열린 개인전 《오랜만에 내 그림자를 보았다》를 통해 최희정은 오늘날 우리는 무엇을 얻고, 대신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질문하고자 했다.
 
전시 제목과 동명인 영상 작업 〈오랜만에 내 그림자를 보았다〉(2024)는 파운드 푸티지(found footage) 영상물과 아델베르트 폰 샤미소(Adelbert von Chamisso)의 소설 『그림자를 판 사나이』(1814)에서 발췌한 문장을 결합하여 영상의 흐름을 엮어 나간다.
 
판타지, 우화적 교훈, 사회 비판을 포괄하는 이 독일 낭만주의 소설은, 악마에게 그림자를 팔아 무한한 금화 주머니를 얻지만, 궁극적으로 파멸에 이르는 주인공 페터 슐레밀의 비극적 운명을 다룬다.


《오랜만에 내 그림자를 보았다》 전시 전경(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 2024) © 최희정

함부르크의 일상적 풍경과 슬라임 및 밀가루 반죽놀이 영상을 교차 편집한 작품은 신자유주의 시대 속 인간의 조건을 탐구한다. 이는 즉물적 감각과 개인적 기억, 특히 알츠하이머를 앓고 계신 할머니에 대한 기억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또한, 영상 중간중간에 삽입되는 데이터 레이블링 푸티지 영상은 인공지능이 인간의 다양한 경험을 지워버리는 현상을 부각하고, 비인간적인 자동화와 반복적 기억 회복 행위를 담은 장면들의 병치는 경제적 수익을 우선시하는 현대 사회에서 간과되는 인간 존재의 본질에 대한 성찰을 이끌어낸다.


최희정, 〈오랜만에 내 그림자를 보았다〉, 2024 © 최희정

이렇듯 최희정은 구체적인 현실의 단면을 끄집어내어 영상으로 재구성함으로써, 인간의 본질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던진다. 이러한 그의 작업은 현대 사회의 급변하는 흐름 속에서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며, 각자만의 진정한 삶의 의미를 사유할 수 있게 한다.

"내 작업은 그저 삶을 기록하고 편집해 보여주는 게 아니라 현재 우리가 공유할 수 있는 삶의 첨예한 이야기를 다룬다." (최희정, 리포에틱 인터뷰 중)


최희정 작가 © 퍼블릭아트

최희정은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서양화와 미술사학을 전공하고 동대학원에서 서양화로 석사 학위를 받았으며, 독일 국립 함부르크 미술대학교에서 영화를 수학했다. 최근 개인전으로는 《우리의 코러스》(고양 예술창작공간 해움, 고양, 2024), 《오랜만에 내 그림자를 보았다》(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 서울, 2024), 《사랑의 반대는 버림》(아트스페이스 보안2, 서울, 2023) 등이 있다.
 
또한 작가는 《ALT-네마프 2025》(KT&G 상상마당, 서울, 2025), 《EMAP x 프리즈 필름 서울 2024》(이화여자대학교, 서울, 2024), 《begehren》(Xpon-art gallery, 함부르크, 독일, 2024), 《Open References》(d/p, 서울, 2024), 《커튼콜》(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 양주, 2023), 《über:arbeiten》(Xpon-art gallery, 함부르크, 독일, 2021), 《FLATLANDS》(GAK Gallery, 브레멘, 독일, 2016) 등 다수의 단체전 및 스크리닝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최희정은 고양예술창작공간 해움,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 창작스튜디오의 입주작가로 선정된 바 있으며, 제25회 서울국제대안영상페스티벌에서 ‘대안영상예술상’ 및 2025 퍼블릭아트 ‘뉴히어로’ 대상을 수상했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