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업을 천천히 진지하게 보기보다 휙 보고 넘기게 되는 것이다. 이후 작가는 인위적으로 물건을 자르고 붙여 변형하는 대신, 대상의 재료나 표면
처리, 제작 기법을 다르게 해 사물의 변화를 도출하는 쪽으로 나아간다. 풍경에서
사물로 넘어가는 이행의 궤적은 《하루 한 번》에 남아 있다. 여기서 정지현의 사물은 함께 전시된 김세은의
추상 회화를 닮기도 하고 그림을 그 안에 품기도 한다.
사물은 독립된 조각이자 회화를 투과하는 창문의 프레임으로
작동하거나, 그림을 가리는 가림막이자 그 자체 색면 회화가 된다. 환경에
반응해 함께 풍경을 이루며 공간을 드로잉하는 방식은 덜 인위적이지만 또 다른 방식의 공간 연출이기도 하다. 하지만
미리 계획된 설계에 따르던 과거와 달리 연출은 즉흥적이고 가변적인 스케치로 바뀌었다. 이와 동시에 그의 사물은
더 이상 무대 소품이기를 그치고 독자적인 조각으로 회화와 나란히 존재한다. 부피와 양감, 규모가 두드러지는 사물들은 이제 완연한 조각으로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기 시작한다.
정지현의 변화를 공인한 것은 아뜰리에 에르메스에서 열린 《다목적 헨리》(2019)다. 이 전시와 《가우지》(인천아트플랫폼, 2022)는 후반부 작업을 망라하는 기점이 되는 전시로, 작업의 초점이 잘
짜인 풍경 조성에서 조각 매체 실험으로 이행했음을 선포한다. 작업의 다수가 양감과 무게를 지닌 덩어리고, 폐기물의 활용은 현격히 줄었으며, 최소한의 개입으로 사물의 속성이 바뀐다.
이런 변화는 특히 3D 스캐닝이나 3D 프린팅
같은 자동화 기술을 조각에 접맥시켜 전통적인 조각을 재해석하는 《가우지》에서 뚜렷하다. 갈아내기, 나누기, 시점 바꾸기, 쌓기, 표면 떠내기, 재료 바꾸기, 출력하기
등, 마치 잽을 날리듯 가볍게 치고 빠지는 작가의 개입은 발랄하면서도 은근히 뼈가 있다. 한 예로, 마스코트 캐릭터의 다리를 뒤집어 놓은 〈부츠〉에 적용된 것은 갈아내기와
나누기다. 일반적인 조각 관행에서 감춰지는 속성이 여기서는 드러난다.
여러
겹 덧바른 회화 표면처럼 알록달록한 색이 비치는 〈부츠〉의 표면은 3D 프린팅 출력물의 원색을 감추기 위해
올린 FRP 외장과 퍼티를 갈아낸 결과다. 뒤집힌 다리는 조금씩 틀어서
쌓은 덩어리로 구성되는데, 실제로 나눠 제작하지만 완성되면 이음매를 감추는 조각의 위장은 얼기설기 쌓아 생긴
틈새 때문에 얼결에 폭로된다.
앞에서 보면 넓지만 옆에서 보면 납작한 〈스웹〉(2022)은
한쪽 면에서는 온전히 파악할 수 없는 조각의 속성을 꼬집고, 마이욜(A.
Maillol)의 〈강(La Rivière)〉(1943)의
스캔 데이터를 분할 출력한 〈멀리서 온 토르소〉(2022)는 표면과 내부의 불일치 문제를 건드린다. 이들은 각기 다른 지점에서 조각의 옆구리를 슬쩍 찌른다. 반항은 노골적이지
않지만, 흠칫 놀랄 만큼은 따끔하다.
조각이란 무엇인가를 나름 정공법으로 공략한 최근 동향은 설치에서 조각으로 거슬러
올라간 듯하다. 여러모로 차이야 확연하지만, 그럼에도 정지현 특유의
성향은 짙게 남아 있다. 작업복을 입은 작가의 몸을 뜬 우레탄폼 조각 〈마이욜 강〉(2019)은 근대조각의 걸작 〈강〉의 열화 버전이다. 엉성하게 팔을 든 조악한
조각상 뒤로 빛이 번쩍이며 연기가 품어져 나오는 것을 본 순간 터지는 웃음을 막기란 쉽지 않다.
감출 수
없는 B급 정서는 녹슨 통조림통으로 가짜 파도 소리를 내던 때와 다르지 않다. 부스러진
스티로폼으로 만든 세상 허접한 배(〈아무도 모르는 곳〉(2012)), 앞에서는
멀쩡하지만 뒤로는 신파의 끝장 같은 문장(“너는 내가 흘린 만큼의 눈물”)을
쓰고 있는 전동기(〈Night Walker〉), 시내 한복판에 잘 있는 동상을 급습해 훔친 손들이 자갈치처럼 쌓인 콘크리트 더미(〈공공의
손 모음〉(2018))는 조용한 딴지라는 점에서 일맥상통한다.
한편, 눈에 띄진 않지만 꾸준한 반복도 은연중 잔존한다. 방점이 행위에서 조형으로
이동했기에 명시적이지는 않지만, 성실한 반복을 통해 발생하는 차이는 근작에서도 여전히 중요하다. 그 자체가 《가우지》의 반복인 《행도그》(2023)에서 생산되는 차이는 꽤나
흥미롭다. 《가우지》에 출품된 〈멀리서 온 토르소〉는 《행도그》에서 세 번 되풀이된다. 한번은 똑같이, 다음은 부분으로, 그
다음은 색 변화로. 〈멀리서 온 토르소〉는 〈멀리서 온〉(2023)이
되고, 다시 〈멀리서〉(2022)가 된다.
지지대와 공존하던 껍질이 두 번째 반복에서 사라지고, 알맹이만 남은 스폰지가 세 번째 반복에서
황변된다. 복제가 되풀이되면서 차이가 벌어지고, 외형의 거리가 멀어지면서
제목도 원본에서 갈수록 이탈한다. 가면 갈수록 엉성해지며 조야해지는 ‘멀리
더 멀리’의 풍경은 자문자답을 반복하며 점점 더 대담하게 전통과 세계에 어깃장을 놓는 작업 세계의 행로에
묘하게 상응한다.
하지 않는 것보다 하는 편이 나아 보인다에서 출발한 정지현의 반복이 동일성이
아니라 차이를 발산하는 광경은 볼수록 놀랍다. 반복은 작업 내부에서, 작업과
작업 사이에서, 이 전시와 저 전시 사이에서 줄기차게 발생한다. 이렇게
출현한 차이는 용도도 뒤집고, 의미도 뒤집으며, 속성도 뒤집는다.
행위가 수행적으로 행위자를 구성한다는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의
통찰은 정지현에게 딱 맞는 금언이 아닐까. 그가 생산한 이 모든 사물은 되든 안 되든 지속한 만들기의 소산이고, 만드는 자로서 정지현의 자부심과 애정 또한 이 묵묵한 수행이 낳은 것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