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전시장에서 볼 수 있는 작업들은 도시의 모습을 파편적으로 상기시킨다. 동상과 그의 일부분, 광고판, 에그 스택와
같이 재료를 봤을 때, 그리고 〈더블 데커〉(2018), 〈동상〉(2016), 〈진열장〉(2019)처럼 작품명을 통해 도시공간의 요소를 떠올릴
수 있다. 이처럼 직접적 혹은 간접적으로 도시를 시각화할 수도 있지만 이번 전시에서 특기할 만한 부분은 바로
패치워크, 즉 ‘묶음’으로 등장하는
점이다.
하나의 형태에 여러 가지 기능과 장식들이 부여되면서 생산되는 도시의 모습은 추가하기/더하기로 여러 요소들을 결합시킨 형태로 나타난다. 기존의 물건을 다루어 변용시키는
작가의 태도는 창작보다 좀 더 기계적인 패턴으로 보여진다. 예컨대 〈에그 스택,
테라초, 무거운 돌〉(2019)은 세 조형물로 구성되는데
재료를 다루는 기법 뿐만 아니라 각기 다른 지시대상을 가진 세 조형물이 묶여져 있다.
도시에서 적용되는 조형법을
전시장으로 가지고 온 점에서 작가는 창작자이지만 여기서 창작의 흔적은 비-기능화한 대상을 통해 작품에 드러난다. 〈공공의 손모음〉 제작과정을 담은 영상의 캐스팅 장면이나 스캐너를 콘크리트로 만든 〈스캐너〉(2019)는 단순한 의미의 복제보다, 복제되어 나오는 물건들이 각기 다른 대상을
만나 다른 기능으로 쓰이는 정크스페이스의 특징을 짚어준다. 일반적인 스캐너가 이미지를 복제하여 여러 형식으로
내보내듯 스캐닝된 스캐너는 콘크리트의 형식으로 저장된다. 그리고 동상에서 (실질적으로) 따온 손(의 모티프)은 복제를 통해 여러
기능으로 분화되어 다시 대중을 향한다.
이번 전시는 그 대상에서 기능을 배제시킴으로써 조형법을 더 강조한다. 복제와 본뜨기, 그리고 묶어보기는 쿨하스가 텍스트 정크스페이스에서 말하는 Restore, rearrange, reassemble, revamp, renovate, revise, recover,
redesign, return의 방법을 제작과정에 적용시킬 뿐만 아니라 그것 자체로 세운다. 전시장에서
어떤 물건은 좌대로, 또 어떤 물건은 결합되어 등장하면서, 대상과 바탕(여기서는 지지체)의 관계는 〈에그 스택, 테라초, 무거운 돌〉에서 작품 자체가 패치워크이며 통합과 분리, 그리고 기능의 분화가
작용한다.
이는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이 복제를 통해 도처에 분산된 사실에서 더 나아가, 기능성과 쓸모를 복제와 분리(기능의 분리, 대상과
바탕의 분리)에 찾아 생산되는 도시의 모습을 포착한다. 이런 측면에서
봤을 때 전시제목 《다목적 헨리》에 암시되는 대상의 다목적성은 목적이 많다는 단순한 이야기에 머무르지 않는다. 즉
여기서는 대상과 지지체가 ‘어떤 목적에든’ 기능적으로 다뤄진다는 점이
더 강조된다. “우리가 소중히 하고 신봉하는 것은 창작이 아니라 조작(manipulation)이다.”라는 말은 창작이 아닌 복제와 복사를 통해서 대상의 위상을 좌대의 기능이나 감상용이라는 여러 기능으로 내보낸다.
더 나아가, 우리는 앞서 인용한 쿨하스의
말을 통해 창작주체에 대한 이야기로 전개할 수 있다. 이번 전시 제목과 작업을 경유해서 도시의 모습을 익명으로
증식된 디자인 혹은 창작의 결여로 (메타적으로) 파악 가능하게 한다. 그렇기 때문에 전시 제목인 ‘다목적 헨리’는
다음과 같이 해석할 수 있다. 헨리 무어가 아니라 헨리 무어 ‘풍’의 조각이 도처에 등장하는데 거기에는 작가의 이름도 없이 제작되거나 유사하게 제작된다.
그런데
핵심은 이와 같이 누가 만들었는지도 모르는 조각상이 여러 곳에 있다는 의미보다, 무어의 작업이 리믹스되고
변주되면서 점점 ‘무어’라는 창작자 자체가 익명성으로 전락하는 것을
더 짚어준다. 어디서 본 것 같은 동상처럼, 어디서 본 것 같은 입간판처럼, 그리고 어디서 본 것 같은 진열방식처럼, ‘어디서 본 것 같음’은 조형방법과 더불어 창작의 주체, 그러니까 원작자를 익명으로 남기는 오늘날
도시공간에서 벌어진 모습을 말해준다.
덧붙이기와 더하기로 증식되어 생산되는 도시풍경에 익명성을 포착하고 기능성을 배제하면서, 작가는 기법에 창작자의 흔적을 보인다. 그러기에 그의 작업이 애상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도시를 찍은 사진처럼 인간이 부재하는 공간을 다뤄서가 아니다. 오히려
그곳에서 생산되는 대상자체에 이미 인간부재, 달리 말해 창작자의 익명성이 배태되어 있기 때문이다. 더하고 증식되고 누적되는 방법, 즉 더하기에 더하기를 하는 조형법은 기능의
제거, 말하자면 ‘빼기’를 통해
자율적인 창작물로 세워놓는다.
정크스페이스는 형태가 기능을 따르지 않고 “기능을
찾는다”라고 쿨하스가 언급했다면, 작가는 도시공간에서 다목적으로 부여되는
기능을 제거하여 작품에 조형법을 강조한다. 더하고 더하고 빼는, 그러니까
덧붙이고 복제하고 재생산하는 방법을 통해 전시장에서 도시공간을 재-해석하며, 그
방법 자체를 작품으로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