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정기 작가의 작업들은 실험실을 연상케 할 정도로 다양한 테크놀로지와 기계적 장치들이 눈길을 잡아 끈다. 하지만, 자세히 그 의미를 들여다보면 이들 장치들이 이른바 정상 과학과는 일견 거리가 있음을 알게 된다. 무언가 작동하고 있지만 그 작동이 (과학적) 진리의 발견을 위한 것도 아닐뿐더러 과학적 엄밀함과 타당성에만 의존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작가는 다만 그러한 과학적 실험과 프로세스를 활용하고 있을 뿐인데 오히려 이런 기술 장치들의 작동을 통해 기존의 과학적 이성들이 담아내지 못하는 새로운 의미들을 작동시키는 일종의 기생-테크놀로지(para-technology)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기존의 정상 기술에 기생하면서, 다른 의미작용을 통한 변이를 통해 이들 체계(의 합리성)를 문제시하는 테크놀로지 말이다. 아마도 그 바탕에는 서양의 이성 혹은 과학 중심주의에 대한 비판, 혹은 그 한계에 대한 인식들이 작동한다고 할 수는 있을 것 같다. 물질과 정신, 인간과 자연을 이분법적으로 구획, 분리시키는 사유의 흐름들 말이다. 작가는 이러한 이항대립(binary opposition)의 설정들을 문제시하고, 그 분리 이전의 통합된 원형의 상태를 지향한다. 곧 세상 만물이 서로 교류, 융합되어 있어 끊임없이 상호간에 영향을 끼치면서 돌고 도는, 혹은 주름 짓고 펼쳐지는 동양적인 사유체계에 대한 선호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서로 상대의 조건이 되고 그렇게 인연이 되어 서로에게 복잡, 미묘하게 영향을 끼치면서(연기론緣起論) 중층적으로 이어진다는(중중무진重重無盡) 불가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작가는 이를 드러내고 증명하기 위해 서구의 과학적인 방법론과 테크놀로지를 차용한다. 서구의 과학적 사유의 한계를 드러내고 비판하기 위해 다시 과학적인 방법론을 ‘전용(appropriation)’하고 있는 셈인데, 그런 면에서 일종의 의사(擬似, pseudo) 과학, 혹은 주술이나 연금술에 가깝다고 할 수 있고, 과학적 원리의 엄밀할 작동보다는 특정한 의미의 연결이나 발현에 더 관심을 두고 있다는 면에서 결국은 예술적 실험이나 행위에 다름 아니게 된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그의 작업에는 서양의 과학기술에는 좀처럼 볼 수 없는 개념인, 마음마저 움직이게 하는 독특한 지향성들이 작업의 요체를 이룬다. 이런 이유로 작가의 작업을 심동장치(心動藏置)라 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푸코나 아감벤의 논의처럼 이러한 장치들은 일종의 주체화를 구동케 하는 장치일 수도 있을 것 같다. 혹은 삶의 미시적이고 감성적인 영역, 혹은 개인의 내면화된 실천과 사유에 영향을 미치는 (미학적) 테크놀로지로도 기능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면모를 잘 드러내고 있는 작업이 이번 두산갤러리 개인전에서의 ‘기우제’이다. 전시장 한 벽면을 흙으로 바르고 흙과 함께 벽면을 접착시킨 물의 증발에 따라 생겨난 균열된 틈을 바셀린으로 메운 이 작업은 작가가 지향하고 있는 바를 함축적으로 드러낸다. 비가 오도록 소망하는 행위에 불과한 기우제는 인간의 어떤 행위나 물건들이 초자연적인 힘을 가진다는 (잘못된) 생각과 믿음으로, 그러한 힘을 이용해서 목적을 달성하려는 일종의 주술 행위이다. 비/반과학적인 행위일 수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지의 갈라진 틈을 메울 수 있도록 상징적 염원과 소망으로써, 대자연을 치유하고 순환케 하는 각별한 의미를 담아내는 행위인 것이다. 가뭄으로 세상이 타 들어가니 자연 앞에 무력한 한낱 인간으로서 그 비과학적인 효능효과와 상관없이 기우제라도 치르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이고(다시 말해 근거 없는 믿음이라도 가지고 싶은 심정이 생기는 것이고) 그러한 간절한 마음이 쌓여가야 세상의 어떤 변화들이 생기는 법일 테니 말이다. 작가 역시도 이러한 의미에 더해 자신의 작업 일반을 함축하기도 하는 (예술적) 대상의 갈라진 틈을 메우려 한다. 이때의 갈라진 틈은 실재 작업에서의 갈라진 물리적 틈일 수도 있겠지만 대지와 자연의 갈라진 틈, 더 나아가 물질과 정신, 인간과 자연의 이분법적인 간극으로 확장되기도 한다. 이러한 간극과 틈을 메우려는 행위는 그렇기에 분리되고 구획된 것들을 연결접속하고 봉합함으로써 대자연의 원리가 서로 순환하여 흐르도록 하는 근원적인 행위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대자연 속에서의 물의 역할처럼 말이다. 이런 이유로 작가의 작업에서 특히나 물을 소재로 한 작업이 많은데, 2008년도 ‘Pray for Rain: Mhamid’ 작업은 사막화가 진행되고 있는 모르코에서 작가 스스로 샤먼이 되어 한국의 전통 기우제의 요소를 접목시킨 퍼포먼스 동영상 작업이고, 2010년 'Sweet Rain‘ 작업은 전시공간에 사카린을 섞어 단맛이 나도록 하는, 이른바 단비 내리게 했던 관객 참여 형 설치미술 작업이다. 이때의 작업들도 실재의 ’비‘라는 물리적인 현상보다는 대지를 순환케 하는 상징적 촉매제로, 물의 특정한 의미를 발현시키는데 더 관심을 두었다. 작가는 이처럼 어떤 현상의 물리적인 작동 자체보다는 그 물리적 작동과 연동되어 발생하는 의미의 발생과 구현에 더 비중을 둔다. 의미의 구동장치로 테크놀로지를 ’활용‘하고 ’전용‘한 셈이다. 자동발생적인 의미의 구동만이 아닌 기존의 의미들에 대한 문제의식을 담아내기도 했는데, 2009년도 작품인 'Blue Pond'의 경우, ’깨끗한 연못은 파랗다‘라는 기존 관념을 빗대, 실재로 푸른 안료로 인공연못을 만들어 관행적인 인식과 실재의 현상 사이의 괴리감을 증폭시킨다. 이러한 의미의 작동과 파생에 대한 실험들은 다시 더 많은 의미들로 연결, 확장되면서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데 서로 이어지는 의미들의 순환으로 세상 만물의 어떤 이치마저 드러내려 하는 것만 같다. 

이번 전시에서 물 대신 바셀린을 사용한 것은 물(바소르, wassor)과 기름(오레온, oleon)이라는 서로 다른 것들을 융합시키는 바셀린의 어원상의 의미도 있겠지만 화상으로 인해 신체적 고통을 치유해야 했던 작가의 개인적인 경험과도 연결되는 식이다. 앞서 말한 의미들에 치유라는 의미가 더해지는 것이다. 2007년도의 ’Vaseline Armour‘ 연작들부터 사용한 바셀린은 작가가 생각하는 이러한 치유의 의미를 잘 드러낸다. 바셀린으로 장갑, 투구, 갑옷을 만들어 전신을 보호하는가 하면 건물의 갈라진 틈을 보수하려 했던 이 작업은 작가의 치유 개념이 개인적인 치유인 동시에 사회적인 치유로 확장되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사실 피부 보습제에 불과한 바셀린을 다양한 상처를 치유하는 만병통치약으로 사용했던 것은 ’플라시보 효과‘ 같은 (비)과학적인, 하지만 어떤 믿음 때문일 것이다. 주술일 수도 있겠다. 작가 역시 자신의 작업이 가진 이러한 주술적인 면모들을 외면하지 않는다. 이번 전시의 ’접촉주술: 새싹, 개나리, 진달래, 영산홍‘ 연작들과 ’접촉주술: 16개의 보‘ 작업은 작품 명 자체를 접촉(감염)주술(contagious magic)로 설정했으니 말이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서로 연결 융합되어 있으니, 서로 떨어진 후에라도 어떤 기운에 의해 서로 영향을 미치고 연결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작업들이다. 작업의 내용적 대상으로부터 재료를 추출하여 구성한 이들 작업은 실재 대상의 물리적 현존, 혹은 그 흔적들을 담고 있다는 면에서 존재론적인 인과관계마저 갖고 있는 독특한 작업들이다. 존재(의 일부)를 실재로 담고 있으니, 작품에서 마치 그러한 기운들이 현실적으로 느껴질 만도 할 법하기 때문이다. 유감주술(homeopathic magic)로 명명된 작업도 있는데, ’유감주술: 매화‘ 작업은 작가의 아버지와 함께 협업한 신작으로 예로부터 지조와 절개를 상징하는 매화를 전기가 통하는 전도성 먹을 통해 그리고 라디오 전파를 송출하게 안테나 역할을 하게 함으로써, 매화의 신묘한 기운을 도처에서 받을 수 있도록 한 작품이다. 중요한 것은 실재로 그러한 기운과 에너지를 받느냐의 여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기운을 확산시키려는 마음, 곧 공감(empathy)의 차원일 것이다. 믿음이나 소망 말이다. 유사한 것은 유사한 것을 발생시킨다는 유감(모방)주술은 사실 잘못된 미신들도 있고, 그 자체로 과학적 타당성과 유효성도 없는 것이겠지만 그 기저에 깔려 있는 간절한 마음이나 선용(善用)의 차원이 더 중요하지 않나 싶다. 기우제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비나 물을 바라는 마음을 습한 속성을 유지시키는 바셀린으로 대체하여 의미를 확장시키고 안테나처럼 널리 전파되는 매화그림으로 매화의 긍정적인 에너지를 널리 공감시키려는 그러한 마음, 혹은 시도 자체가 의미를 갖는 것이다. 이번 전시에서 다시 시도된 ’무제: 부화기와 촛불‘ 작업도 마찬가지이다. 촛불의 열로 전기 에너지 만들어 계란을 병아리로 부화시키는 가시적인 기계적 작동과 장치에 앞서, 간절한 염원을 상징하는 촛불로 밤의 불길한 기운을 몰아내고 새벽을 알리는 닭을 탄생케 하려는 그 (엉뚱하기만 한) 의도함이 의미를 갖는 것이다. 작가가 활용하는 과학이나 테크놀로지는 이처럼 마음을 경험하고, 가시화시킴으로써 이를 관객들과 공감케 하려는 그저, 한낱 장치일 뿐이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것처럼 마음을 움직이게 할 수도 있는 심동장치로도 기능하기에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그렇게 작가는 대립된 세상의 간극과 틈을 연결, 교류, 융합시키려는 엉뚱하지만 의미 있는 실험과 경험들을 통해 과학, 주술, 연금술과 비슷하지만 결국은 그 무엇도 아닌, 자신만의 의사(擬似, 意思)적인 공감의 미술을 펼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