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정기의 이번 개인전 《접촉주술》도 물을 다루는 일에서부터 출발한다. 미술관의
입구에 들어서면 물의 신인 용(龍)이 한껏 전시장을 받쳐
들고 있다. 아무도 실체를 본 적이 없기에 ‘상상의 영수(靈獸)’라고 일컫는 용이지만, 옛
건축물의 장식이나 복장, 하다못해 오늘날에는 누군가의 몸에 그려진 문신으로 수시로 보이는 구체적인 이미지로
익숙한 존재이다. 반쯤은 허구에서, 나머지 반쯤은 실생활
속에서 마주하는 용에게 치수(治水)를 구하는 선인들의 방법은
크게 두 방식이었다고 한다. 하나는 용에게 정성을 들여 비바람을 부르거나 잠재우는 것이고, 또 하나는 용을 도리어 괴롭히고 자극하여 움직이게 하는 것이다. 허무맹랑해
보여도 때때로 이런 기우제가 정말로 작용하였다니, 적어도 영험 하다고 옛사람들은 믿었다니, 사뭇 지금과는 다른 앎과 믿음의 체계이다. 백정기는 이 전시에서
기우제라는 의식을 오늘날로 소환하여, 3D 프린터로 제작한 용두(龍頭)와 건축용 비계를 세워 가상의 용소(龍沼)를 전시장에 구현한다. 과거를 답습하거나 전통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려는
의도가 아니다. 전시장을 실제적이면서도 주술적 장소로, 일종의
상징 공간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사실 물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많은 정보가 들어있다. 그의 ‘Is of’ 연작은 어느 특정 현장의 물에 담긴 자연적/환경적 성분을
염료로 전환하는 실험이다. 그 중 〈Is of: 서울〉은
서울의 대표적인 풍경을 프린트한 작업으로 적 양배추에서 추출한 시료로 직접 리트머스지를 만들고, 여기에
한강 물을 잉크로 사용했다. 익히 알려진 대로 리트머스는 산성과 염기성을 측정하는 지시약이다. 한 도시를 흐르는 강의 산/염기도는 이 물이 어디에서 흘러 들어왔는지, 비는 얼마나 내렸는지, 오염도는 어떠한지, 무엇이 강을 오염시키는지, 여기에는 얼마나 많은 인구와 산업체가
관여하는지 등 여러 환경 요인과 행위 주체에 대한 정보를 함유한다. “물은 기억한다(water memory)”는 구절로 요약되는 저장소로서의 물의 특성은 동종요법(homeopathy)에서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치료에 활용하고 있다. 많은 양에 노출될 때에는 암을 유발하는 원인이지만 적은 양은
치료에 사용되는 방사능처럼, 동종요법은 질병 원인과 같은 물질을 극소량 사용하여 신체의 자연치유력을
높이는 방법이다. 다량의 물에 희석된 독은 더는 독으로 작용하지 않고,
오히려 몸의 면역 기능을 촉진하는 약이 된다. 백정기의 는 이와 같은 동종요법을 적용한
작업이다. 유독한 물질을 희석하고 정제하여 약으로 만드는 과정을 영상과 설치 작품으로 보여주는데, 관찰력이 좋은 관객이라면 이 작업에 쓰인 원료 봉지에 ‘녹은 플라스틱’이라 적힌 화면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플라스틱을 사람이 먹어도
되나, 아니, 그전에 저 재료는 무슨 사연으로 또 어디에서
구했단 말인가 하는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게끔 하는 장면으로, 실은 이 작업은 작가가 실제 화재 사고의
현장에서 직접 채집해온 검은 재를 물에 풀어 그 성분을 정제하여 약을 만드는 시도이다. 물에 독을 씻어낸다고
할 수 있는 이 과정에서 ‘독’은 단지 물질적인 잔재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화마(火魔)가 불러온 아픔이나 슬픔, 공포, 원망, 회한과 같은 모진 마음의 독까지도 풀어내는 심리적 제의이다.
다시 이 글의 서두에서 던진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면, 씻어낸 더러움은 어디로
가는가? 그것은 여전히 물속에 있다. 다만 그것이 천 배, 만 배 희석되어 ‘더럽다’는
경계를 녹여내며 다른 곳에서, 다른 기능으로, 다른 모습으로
바뀌어 갔을 테다. 어느 지표면을 흐르며, 어딘가에 고이고, 누군가의 몸으로 흡수되며 말이다. 결국 우리는 같은 물을 조금씩
나누어 가진 존재들이다. 기억의 보관소인 동시에 물질/영혼의
전환소이자 공유소인 물을 백정기는 〈자연사박물관〉이라는 생물학적인 메타포로 담백하게 제시한다. 이 작업에서
그는 ‘자, 여기, 지구상의
포유류 샘플이 있는데 그 라벨에서 보다시피 저마다 다른 특징을 지닌다. 하지만 이 여러 종의 생명체는
물이라는 접점을 통하여 공시적일 뿐만 아니라 통시적으로도 연결되어 있다.’는 고찰을 거시적으로 보여준다. 물은 어디에나 있다, 다양한 크기와 형태의 유리병에 담겨 바로 당신의
눈앞에, 그리고 당신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대류 안에도, 심지어
당신의 살과 뼈 속에도. 결국 물의 기억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다만
어딘가에 저장될 뿐.
이번 전시에서 시종 일관된 관점을 제시해온 백정기가 피날레로 선택한 작품은 〈Is of:
가을〉이다. 이번에는 가을 명산에 알록달록 단풍이 든 잎사귀로부터 잉크를 추출하여, 그 산을 찍은 풍경 사진을 출력했다. 실제 가을 산의 풍경이 가공되어
사진 속 풍경으로 전이되는 이 작품은, 안타깝게도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 색이 바랜다. 아무리 자외선을 차단하고 아크릴수지에 담가 산소와의 접촉을 방지하더라도, 그
변화를 지연시킬 뿐 완전히 변색을 막지는 못한다. 하지만 사라진 색의 성분도 아마도 어딘가에 남겨져
있을 것이다. 한 인간이 감지할 수 없는 저 큰 시공간의 소용돌이 속 어느 곳에.
우리가 설명하지 못할 일이 세상에는 너무도 많기에 우리가 아는 것이 정말 ‘아는’ 것일까, 우리가 우연이라고 치부하는 일들이 진짜로 ‘우연’일까, 어느 큰
맥락에서는 모두 프로그래밍이 되어 있는 규칙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아닐까? 백정기는 내내 이와 같은
근원적 질문을 던지며 답을 구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건축적인 구조나 과학 기초 이론, 실증적이고 구체적인 실험이 기반하기도 하는데, 물론 세인의 눈에는
전시장에 놓인 파이프와 시험관, 기다란 호스와 시약 따위가 생소할 수는 있겠으나, 이는 그 스스로 답을 얻기 위해 선택한 방법론적 전략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또, 크게 본다면 과학이니 주술이니 예술이니 철학이니, 그런 차이가 다 무어란 말인가. 지구의 나이 46억 년 중 인류가 출현한 것은 길게 잡아도 고작 5백만 년, 그 중 한 사람의 생은 어림잡아 80년, 그야말로 티끌보다 작은 정도만을 차지하고 있다. 당연하게도 우리가
아는 것은 지극히 일부분일 터, 우리는 단지 우리가 만지고 스쳐 지나간 모든 것들로부터 맞닿아 접촉주술에
걸려 있는지도 모르겠다. 백정기의 작업이 우리의 시선을 오래도록 잡아두는 것은 그것이 상식으로 당연하게
여겨온 우리의 인식에 의문을 품게 하며, 어렴풋이 감지되는 근원적 에너지나 힘, 불가항력적 존재에 대하여 환기하기 때문이다. 물질로 이루어져 있으나
영혼에 이르는 물, 이곳에서 저곳으로 유연히 흐르는 물처럼 그의 작업 역시 이 사람에서 저 사람에게로
전달되며 예술이라는 이름의 주술을 걸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그의 주술에 기꺼이 현혹되어
보는 것은 어떨까. 이번 전시가 백정기가 취하는 마법의 언어와 행위로 우리를 ‘전염’시킬 수 있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