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학적 ‘이미지’는, 그 누구도 모르는 것일지라도 사실이 아닌 것은 아니기 때문에, 객관성을 의심받지 않아요. 그런데 이런 ‘이미지’들을 독해할 수 있는 권력은 따로 있어서, ‘나’의
데이터를 ‘내가’ 읽을 수 없어요.”
(참으로 새삼스럽지만) 기계의 객관성이라는 ‘신화’는 알고리즘과 AI의 광풍 속에서
여전히, 혹은 나날이 위세를 떨치고 있다. 작금의 첨단 정보 기술은
그 편리함과 정확도로 말미암아 군사 활동이나 사고 보험 처리를 넘어 공교육, 콘텐츠 제작, 그리고 일상의 놀이에서도 빠질 수 없는 ‘필수 요소’로 스스로의 위상을 높이고 있어서, 편리함과 정확도가 객관성을 반드시 보증하지는
않지만 (대리보충의 방식으로) 그러한 ‘신화’를 덧붙이고 강화하는 데에는 큰 효과를 발휘하는 것이다.
당신이 최근의 미디어 연구에 조금이라도 발을 담가봤다면 이 ‘신화’의 양상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고 있을 테다.
기술이 사심 없이 중립적이긴커녕 권력과 공조 관계에 놓여 있고 또 활동한다는 반대급부의 인식 역시 세간에
(위세까지는 아니지만) 퍼지고 있지 않던가? 흑인을 범죄자로
치부하거나 아예 인간으로 분간하지 못하는 광학 기술, 군사 기술과 맞닿아 있는 컴퓨터그래픽의 발전, 마이크로소프트나 구글 같은 글로벌 IT 대기업들의 정보 독점. 게다가 당대의 보편적인 AI 기술이 ‘아직’ 완전하지 못해 사람 손을 거쳐야 구체화된 무언가를 출력한다는 건 또 어떤가?
오해를 피하고자 서둘러 덧붙이건대, 나는 ‘기계는 생각할 수 없다’는 식의 고리타분한 논리를 반복할 생각이 없다. 『AI 지도책』의 저자 케이트 크로퍼드의 말대로 작금의 AI가 “권력의 등기부”라면, (크로퍼드의 의도와는 별개로) 기술이 온갖 ‘사회적’ 담론의 결과일 뿐만 아니라 그런 담론을 적극적으로 생산하기도 하기 때문에 그러할 테다.
기술이 자연과 마찬가지로 독자적인 역량을 지닌 객체라는 포스트 휴머니즘적 사유는 (사람의 개입
없이 스스로를 개선하는 AI 모델인) 오토GPT가
출시된 ‘오래된 미래’ 속에서 갈수록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그러니 ‘기계는 생각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함정일 수밖에 없다. 표현의 성립에 대한 그간의 관습들을 무너뜨리고
또 재정립함으로써, 기술은 인간의 것을 참조하고 그와 상호작용하면서도 인간과는 전혀 다른 선 위를 달리고
있다. 이렇게 ‘인간적’인 것을
적극적으로 탈구축하고 있는 당대의 첨단 정보 기술 속에서 우리는 거꾸로 생각의 개념 자체를 보다 정치하게 재고해야 하는 게 아닐까? 차재민의 작업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우리의 주의를 끈다.
앞서 발췌한 인터뷰에서 “권력”이라고 말은 했으나, 차재민은 그 위계를 전복해야 할 대상으로 여기지는 않는다. 미술비평이라는 일이 (아직까지는?) 세상에
있듯이, 해석의 권력은 필연적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권력이 무언가를
차별하고 억압하며 지속되고 있다면, 필시 우리가 지닌 어떤 속성과 권력 사이에 맞닿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리라. 약간 앞질러 말하자면, 차재민의 영상 작업은 바로 그 맞닿는 부분을 사유의
대상으로 삼으려는 적극적인 시도들이다.
어색함
〈미궁과 크로마키〉(2013)를 처음 봤을
때가 떠오른다. 공개 당시 이 작업은 (손노동으로 대표된) 비가시적이고 소외된 육체노동을 영상으로써 보존하려는 ‘사회적’ 시도로 많이 받아들여졌으나, 정작 나를 건드린 것은 작업 전체에 감도는 미묘한
어색함이었다. 다만 케이블 기사의 작업 과정을 집요하게 따라가는 (스테디캠을
쓴 게 분명한) 유려한 카메라 무빙은 그것이 부자연스럽기 때문이 아니라 반대로 지나치게 자연스럽기 때문에
어색함을 자아내고 있었다. 아웃포커스된 배경은 종종 온라인 게임의 배경 화면 같고, 후반부에서 하염없이 케이블을 푸는 케이블 기사의 손노동은 그 거침없는 손짓 때문에 한편으로는 기사의 놀이처럼, 한편으로는 온라인 게임의 한 장면처럼 느껴지기도 한 것이다.
중간에 다소 뜬금없이 등장하는 크로마키 씬은 그런 느낌을 훨씬 배가해서, 노출된 크로마키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케이블 기사의 손짓은 작품에 쓰인 영상 전체의 추상성과 가상성을 의심의 형태로써
강화한다. ‘혹시 이것도 CG로 만든 장면 아니야?’라는 의심. 저 장면이 ‘실제로’ 촬영된 것이리란 것 정도는 분명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느낌의 층위에서 발생한
어색함은 쉽사리 기각되지 않는 것이다. 여기서 차재민은 두 가지 문제계를 함께 무대에 올리고 있다. 숙련된 육체노동의 이중화, 그리고 그런 노동의 과정을 기록하는 촬영 기술의
이중화. 우리의 주체성은 이 문제계들을 뚜렷이 분리하여 판단을 내릴 수 있을까?
〈1보다 크거나 작거나〉(2018)에는 또 다른 류의 어색함이 감돈다. 우리는 아역 배우가 되기 위해
연기 수업을 받는 한 무리의 어린이들을 따라가게 되는데, 당연하게도 어린이들은 수업에 적응하는 데에 적잖은
어려움을 겪는다. “슬픈 연기가 뭐야?”라는 교사의 반복된 물음, 단순한 명령(“눈을 감아보자”)조차도
아직 습득하지 못한 어린이들. 이들은 (작중 나오는 말에 따르자면) “흉내 내기”로서 표현의 기술만이 아니라 표현의 상태까지 처음부터 배우는 중일
것이다. 즉 여기서의 어색함이란 언어를 아직 갖지 못한 이들이 언어를 새로 배우는 과정에서 받는 느낌이며, 또한 그런 과정을 보는 ‘어른’인 우리가
받는 느낌이다.
수업에 참여한 여러 어린이 중 준범이에게 많은 분량을 할애한 건 아마 이 때문이
아닐까? 〈1보다 크거나 작거나〉 안에서 준범이는 우리의 눈에 밟힐
정도로 뚜렷하게 수업에 대해, 그리고 그 수업을 기록하고 있는 카메라에 대해 어색함을 겪는다. 그런 준범이에게 교사가 언제 눈물이 나는지를 물어보며 “마음이 슬프면 얼굴은
슬픈 표정이 된다"라고 말하고 “나는 슬프다”를 반복시킬 때, 그리고 준범이가 결국 “슬퍼요”라고 말을 꺼낼 때 이 수업은 말 그대로 ‘감정교육’으로서
기능하는 중이다. 준범이는 이 세계에서 어떤 상태를 슬픔이라고 부르는지 익히는 동시에 슬픔이 어떤 상태인지를
경험하는 것이다. 같은 말이지만 언어를 배우는 것은 어떤 상태를 붙잡을 적절한 표현을 찾으려는 일인 동시에
어떤 상태를 새로이 창출하려는 일이기도 하다.
요컨대 〈1보다 크거나 작거나〉는 특정한
감정 표현은 물론 감정 역시도 처음부터 주어지는 게 아니라 학습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대상임을 수행적으로 증명하려는 작품이다. 한데 지금까지 서술한 바에서 그친다면 이 작품은 발달심리학을 위한 연구 자료 수준의 영상과 다를 바 없지 않을까? 물론 그럴 것이다. 예술가로서 차재민은 적잖이 기민해서, 단순하지만 효과적인 장치를 설정해 그런 함정을 한참 넘어선다.
어떤 장치? 후반부의 카메라 테스트 내내 노출된 카메라 모니터 화면을 떠올려 보라. 슬픔을
배우는 어린이들의 부산스러운 몸짓이 이런저런 기호들로 가득 찬 모니터 화면 속에서 펼쳐지면서 〈1보다 크거나
작거나〉에는 또 다른 맥락이 겹친다. 어린이들에게 인식 혹은 경험이 그 자체로 투명하게 주어지지 않듯이, 우리가 이 작품에서 보고 있는 사건들 역시 우리에게 그저 주어지지 않은 것이다. 촬영, 편집, 색 보정, 그리고 상영 절차… 수많은 매개의 과정. (이 점에서 차재민의 영상 작업은 무언가를 시청각적으로
기록하거나 제작하는 기술적 재현의 수단을 탐구 대상으로 삼는 도큐먼트의 성질을 갖는다)
차재민이 당대의 기술과 벌이는 대결은 이렇게 눈앞의 시각적 이미지를 의심하게끔
만드는 방식으로 시작된다. 그래, 불신이 아닌 의심이다. 이렇게 쓴 것은 우리가 차재민의 영상 작업을 보던 도중 작품 내적 논리에 의해 내용에서 완전히 튕겨 나가지는 않기
때문이다. 〈미궁과 크로마키〉에서 어색함이 쉽사리 기각되지 않듯이, 온전히
수긍하지도 온전히 거부하지도 않는 유예의 상태에 우리는 머문다.
인간이 기계를 주관적으로 조작함으로써 얻은
표현 역시 (엄연한 실체로 제시되며 우리와 상관한다는 점에서) 나름의
존재론적 객관성을 가진다는 걸 차재민은 분명히 알고 있다. 그렇다면 그에게 문제다운 문제란, 당대의 기술을 통해 제작 및 제시된 표현이 우리에게 곧장 자연스럽고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곤 한다는 사실이리라. 이 사실은 어째서 문제가 되는가? 이를 설명하려면 먼저 시각적 이미지를 의심하게끔
만드는 것과 다른 방식을 취하는 그의 작업을 논해야 할 것 같다. 오늘날의 기술은 오직 시각적 이미지로써만
표현을 하지는 않으니.
감각들 사이의 간격
당신이 차재민의 작업을 주의 깊게 따라왔다면 〈네임리스 신드롬〉(2022)의 첫 장면에서부터 미소를 지었을지도 모르겠다. 내레이션 녹음 준비에
한창인 배우, 그리고 그와 별개로 흘러나오는 배우의 내레이션. 즉 보이는
것과 들리는 것 사이의 시차. 차재민은 이 두 가지를 서로에 대한 설명이나 은유나 비교로써 묶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시차일 뿐이다. 〈이것은 질문이 아니라 풍선이다〉(2010)에서 〈네임리스 신드롬〉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작업은 이렇게 시각적 이미지와 보이스오버 사이의 간격을 미묘하게
벌린 채 이야기를 진행하는 전략을 공유하고 있다. 그의 궤적의 한 축이라 해도 좋을 만큼 차재민은 이러한
전략에 천착하는 것이다.
가령 〈사운드 가든〉(2019)과 〈의자
위를 걸으며〉(2020)의 아슬아슬한 매듭을 곱씹어 보자. 전자에서
드문드문 흘러나오는 여성 심리 상담사들의 나긋나긋한 보이스 오버는 훈련목을 키우고 이송하는 과정을 구체적으로 이해하는 데에 어떤 도움도 주지 않으며, 후자에서 청소의 ‘꿀팁’을 읊는 가쁜
호흡의 보이스 오버는 정작 (그들에게서 멀찍이 떨어진 채로 찍은) 청소
노동자들이 스타디움을 청소하는 광경에 대해 미묘하게 미끄러지거나 엇나간다.
여기서 보이는 것과 들리는 것은
서로를 보증하는 관계에 놓여 있지 않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두 가지가 서로 완전히 별개로써만 배치된
것은 또 아니라서, 〈의자 위를 걸으며〉의 경우 ‘꿀팁’을 듣고 있는 관객들은 청소 노동자들의 몸짓에서 ‘꿀팁’의 예시를 절로 찾게 된다. 반복건대, 온전히
수긍하지도 온전히 거부하지도 않는 유예의 상태에 우리는 머문다.
차재민의 의중을 파악하기 위해 조금만 더 과거로 돌아가 보자. 소급해 돌아보면 〈독학자〉(2014)는 이러한 전략이 예외적인 형식 속에서
구사된 작품으로, 여기서는 보이스 오버와 보이스 오버 사이에 간격이 벌어진다. 재야
법의학자 허영춘이 법의학 공부에 투신하게 된 계기를 풀어놓는 내레이션과 그의 연구 노트 부분 부분을 함께 제시하는 영상에 그 자체로 특별할 것은
없다.
하나 작품이 한 차례 재생된 직후 다시 한 번 재생되면서 내레이션을 읊는 목소리가 허영춘이 아닌 다른
젊은 남성의 것으로 바뀔 때, 〈독학자〉는 단순하면서도 통렬한 방식으로 표현과 경험 사이의 관계를 문제시하는
작품이 된다. 아들의 의뭉스러운 죽음을 직접 파헤치고자 했다는 허영춘에게 연대하기 위해선 최대한 그의 입장에
스스로를 동일시해 봐야 하지 않을까? 젊은 남성의 낭독은 아마 이런 질문에 따른 사후적인 몸짓일 테다. 말하자면 경험에 대한 이해의 수단으로서 반복. 차재민은 그것을 (역시나) 수행적으로 소화해 본다.
당연하지만 이 반복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정확히
같은 영상을 배경으로 삼아 정확히 같은 글을 읊고 있음에도, 우리가 이 작품에서 두드러지게 경험하는 것은
두 목소리 사이의 이런저런 차이들이지 않던가? 허영춘의 투박하고 어색한 낭독, 그리고
젊은 남성의 앳되고 부드러운 낭독. 동일한 표현이 꼭 동일한 인식이나 경험의 지표가 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여기서 재확인한다.
하지만 차재민은 이 실패를 몹시 환영할 터인데, 왜냐하면
연대란 경험의 차이를 인정할 때야 비로소 가능하기 때문이다. 동일시에의 추구는 종종 폐쇄적이거나 자만적인
결론으로 향하기 십상이다. 반대로 서로 다른 인식과 경험을 내재한 이들을 그럼에도 ‘우리’로 부르려는 일, 우리는 바로 이를
연대라 부른다. 그런 의미에서 〈독학자〉는 연대의 가능성이 싹트는 실패의 순간을
‘들으려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차재민이 노리는 게 무엇인지 이젠 당신께서도 짐작하고 있으리라. 보이는 것과 들리는 것으로 대표되는 감각 내용—곧 정보가 아닌, 정보들 사이의 간격 자체에 대한 향유를 그는 관객에게 요구한다. 무엇을 위해? 당대의 기술과 대결하기 위해. 보다 정확히, “기계와
다른 객체들에 아웃 소싱된” 시각 경험을 영유하는 현대의 시(청)각 주체로서 우리의 능력을 재고하기 위해. 오해를 피하고자 서둘러 덧붙이건대, 차재민은 기술을 경멸하지 않는다.
그는 기술적 재현의 결과로서 표현이 허상에
불과하다거나 폭력적이라고만 생각지 않는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표현은 모두 분명한 실체이되 항상 자연스럽고
자명하지는 않은 것이다. 딥페이크 기술이나 가짜 뉴스 같은 대안적 사실이 나날이
‘사실적’으로 발전하거나 ‘사실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당대에 우리는 이런 ‘사실’을
피부로 느끼고 있지 않은가? 표현도, 그것을 소화하는 감각도 몹시 고집스럽게
선택적이다. 차재민의 작업은 바로 이 지점에서 모종의 실험으로서 작동하고 있다.
형이상학적 실험
잠깐, 실험이라니? 〈엘리의 눈〉(2020)의 5부를 예시로
들자면, 갑작스레 아무런 자막 없이 새까매진 화면을 바탕으로 안구로 보이는 것들이 나타났다 사라지길 한동안
반복한다. 이때 (앞서 개들의 눈이 이런저런 형태로 제시되는 걸 보았던) 관객은 자신이 자막의 도움 없이도 각각의 안구가 누구의 것인지 파악할 수 있는가를 따져보게 된다.
마찬가지로 〈네임리스 신드롬〉에서 말과 신체의 분리를 통해, 무심해 보이는
신체를 통해, 유리창과 수영장처럼 말과 신체를 일그러트리는 매개를 통해, 즉
영화 장치의 활동이 간격으로서 ‘불편하게’ 노출되는 순간을 통해 관객은 “불가사의한 불편함”에 대한 자신의 보는 능력의 한계를 압축적으로 경험하게 된다. 차재민은 관객의 시각이 주어진 이미지 그 자체로써 대상의 상태(state)를
판단할 수 있는지 실험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엘리의 눈〉에서 안구들의 주인을 파악하지 못하고 〈네임리스 신드롬〉에서 (내레이션에서 묘사되는 전문가나 기계와 같이) “불가사의한 불편함”을 보지 못하듯, 실험은 매번 실패한다. 감각에
따른 판단이 실패할 수밖에 없는 조건을 매번 끌어들인다는 점에서 이 모든 작업을 ‘불가능한 딥러닝’이라 불러도 좋지 않을까? 하지만 〈독학자〉의 경우와 같이 차재민은 이 모든
실패를 조금의 슬픔 없이 환영할 텐데, 왜냐하면 실패한 것은 시각이지 생각하고 판단하는 ‘나’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의 실험은
항상 현대의 시(청)각 주체로서 우리의 불가능성이라는 결과를 내놓지만, 바로 그럼으로써 주어진 정보들을 신중히 다루고 가로지를 판단(력)을 메타적으로 촉구하고 추구한다.
판단(력)에
선행해야 하는 것은 무엇보다 의심이다. 지금 보이는 것은 우리에게 어떻게 주어진 것인가? 지금 보이는 것은 지금 들리는 것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있는가? 하나의 감각은 ‘반드시’ 하나의
경험으로 이어지는가? 차재민은 집요하고 끈질기게 의심하며, 또한 그
의심이 관객에게 전염될 수 있는 실험을 꼼꼼히 설계한다. 다만 이때의 의심이란 모종의 유예로서, 표현과 감각을 기각하는 대신 끈질기게 붙잡고 대면하며 다그치는 태도임을 잊지 말자.
마르쿠스
가브리엘의 말처럼, “우리는 생각하기, 곧 생각을 가지기를 통상적인
의미의 감각들과 절대로 맞세우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우리의
감각 양태들은 우리가 생각을 붙잡는 방식들이다.” 예술가로서 차재민의 궤적은 이 의심이 미적 방법론으로서
구체화되고 정교화되는 과정이었다 해도 좋을 테다.
만약 차재민의 이런 의심의 방법론이 어떤 계보를 갖고 있는지 따진다면, 한편으로는 사이버네틱스의 미학적 실천의 계보가, 한편으로는 몽타주에 대한 영화적
자의식의 계보가, 한편으로는 (시네마 베리테라기 보다는) 인류학적 관찰로서 다큐멘터리즘의 계보가 발견되겠으나, 이런 계보들을 차재민이라는
이름 아래 묶는 매듭은 무엇보다 형이상학적 사유의 계보일 것이다.
(감각을 진리를 위한 인식의 재료로 재정의한) 데카르트에서 (감각의 한계를 인식의 가능성에의 조건으로 재정의한) 칸트로 이어지는, 감성학의 짝패로서 형이상학. 그런
의미에서 다음의 말은 차재민의 작업 옆에 붙여 놓아도 어색함이 없을 것 같다. “현대 미술에서 우리는 하나의
현상을 관찰한다고 일반화해 볼 수 있는데, 이 현상이란 예술이 자신의 매체와 그 매체에 부과된 한계에 저항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예술은 우리의 감각을 증강해 새로운 현실이 드러나도록 할 수 있다.”
AI의 시대에는 예술가를 비롯한 ‘콘텐츠 제작자’들이 설 자리가 기하급수적으로 줄어들 것이라고 많은 사람이 ‘쉽게’ 말한다. 그리고 이 말을 ‘쉽게’ 믿는 회사들이 일러스트레이터나 디자이너를 줄줄이 해고하며 그 시대를 앞당기려 애쓰고 있기도 하다. 하나 AI가 생산한 ‘콘텐츠’들이 인터넷을 순식간에 가득 채우면서 AI가 AI를
참조하기 시작한 요즈음에, 독자나 관객을 비롯한 ‘수용자’의 위상 역시 위협을 받기는 마찬가지 아닌가?
이는 물론 “우리가 기계를 훈련시켰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 하지만
우리는 동의를 한 적이 없다.” 차재민에게는 이야말로 진정 우려할 만한 일일 것이다. 그렇기에 그는 자신의 실험이 항상 실패하기를 바란다. 실패를 경험하고, 그 경험이 실패임을 인정하고, 실패 너머의 새로운 연대와 판단을 추구할 용기를
북돋기 위해. 만약 자신이 실험에 성공했다 여기는 이가 있다면, 그보다
공포스러운 일은 얼마 없으리라. 차재민의 작업이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