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모든 사람이 각자 상자 하나씩을 가지고 있고, 그
속에는 우리가 ‘딱정벌레’라고 부르는 것이 들어있다고 가정해 보자. 아무도 다른 사람의 상자 속을 들여다볼 수 없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오직
자기의 딱정벌레를 봄으로써만 딱정벌레가 무엇인지 안다고 말한다.” 각자 자기의 딱정벌레만을 볼 수 있을 뿐
다른 사람의 상자 속에 무엇이 있는지 알지 못하면서, ‘딱정벌레’라는
이름을 ‘말할 수’ 있을까? ‘이름’은 그에 상응하는 외부 세계의 대상을 가리킴으로써 의미를 지닌다.
대상에 이름을
붙이면서 우리는 “몸의 경계를 넘어 외부의 공유할 수 있는 세계로 이동”할
수 있다. 그러나 육체적 고통은 외적인 대상이 아니다. ‘고통’은 그 의미를 확인할 수 있는 대상을 지시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다른 감정들과
달리 지향성(intentionality)도 없다. 예를 들어, 나는 x를 향한 사랑을, y에 대한 두려움을, z에 대한 양가감정을 갖는다. 그러나 “육체적
고통은 무언가에 대한 것이거나 무언가를 향한 것이 아니다.” 육체적 고통, 그것은
오직 나만 볼 수 있는, 닫힌 ‘내 상자 속의 딱정벌레’다.
타인은 내 상자 속의 딱정벌레를 보지 못하고,
그것이 거기에 있는지조차 알 수 없다. 나는 내 고통을 알지만, 타인은
그것을 단지 믿을 수 있을 뿐이다. 나의 확신은 타인에게는 의심의 대상이다. 그러기
때문에, 고통은 언어화되면 당사자의 견디기 어려운 괴로움을 부분적으로나마 제거할 수 있다. 최소한 그것은 ‘있는 것’으로 인정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통의 언어를 발명하는 일은, 고통받는
사람의 괴로움을 돌볼 “윤리적 중요성으로 가득한 기획”이 된다. (스캐리, 2019; 10)
어떻게 육체적 고통을 언어에 가 닿게 할 수 있을까? 고통을 언어화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통로가 필요하다. “고통이라는 가장 철저히
사적인 경험을 공적 담론의 영역으로 가져오는 통로” 중 “아마도 가장
명백해 보이는 통로는 의학”일 것이다. (스캐리, 2019; 11) 그러나 의사들은 환자의 말을 주의해서 듣지 않는 것 같다. 때로
그들은 환자의 호소를 의심한다. “의사들은 사실 환자의 목소리를 ‘신뢰할
수 없는 해설자’로 여긴다는 것, 즉 환자의 말 너머에 있는 육체적
사건 자체에 가 닿기 위해 가능한 한 재빨리 우회해야만 하는 무엇으로 여긴다는 것이다.” (스캐리, 2019;11)
그들에게는 신뢰할 수 없는 환자의 말을 우회해서 도달해야 하는 실체, 의학적
대상이 있기 때문이다. 의학은 ‘질병(disease)’을
다룬다. 의사는 질병을 진단하고 치료하고자 한다. 하지만 고통받는 몸에는 “생의학적 대상인 질병 이외에도 중요한 다른 무언가, 즉 환자의 병(illness)이 있다.” 고통스러운 증상에 대한 환자 자신의 해석, 그에 따르는 감정들, 그로 인해 바뀌는 생활 사건들, ‘병’은 질병과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분리된, 별개의
현상이다. 하지만 병은 질병으로 진단되어 명명되어야만 ‘의료적 대상’으로 실체화되어 다루어질 수 있다. 만일 어떤 고통이 질병으로 진단받지 못하고, 어떤 증상들이 이름 붙여질 수 없는 채 남겨진다면, 그 고통은 어떻게 다루어져야
할까?
2.
고통은 언어에 저항한다. 육체적 고통은
언어를 파괴하여 신음과 울부짖음으로 되돌린다. 고통을 돌보기 위해서는 전(前) 언어적 표현들로 부서진 조각들을 모아 기존의 언어를 넘어서는 ‘고통의 언어’가 창조되어야 한다. 그 자리에 차재민 작가의 〈네임리스 신드롬〉과 같은 작업이
있다. 작가는 이 작품을 “다섯 챕터로 구성된 내레이션과, 검사실의 거울, 유리, 물 등 어딘가에
상으로 맺히는 신체 이미지가 포개어지는 에세이 필름”이라고 소개한다.
〈네임리스
신드롬〉은 진단명으로 고통을 입증해야 하는 환자들의 어려움을 다룬다. 이 작품에 포함된 일부 텍스트들은 환자의
고통을 가중시키는 의료 체계 내의 불신을 폭로한다. 사실 ‘고통스러워하기’는 ‘확신하기’의 가장 생생한 예인 반면, ‘고통에 관해 듣기’는 ‘의심하기’의 가장 좋은 사례가 된다. 고통은 쉽게 의심받는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내비치는 의심은 이미 고통받고 있는 이가 느끼는 괴로움을 증폭한다.” (스캐리, 2019; 12) 더욱이 의료 체계 안에서 어떤 환자들은 더 쉽게 ‘진술(에 관한) 불의(testimonial injustice)’에 노출된다.
“왜 의사들은 여자의
말을 믿지 않는가?” 많은 연구가 “의료기관이 여성을 무능하다거나 꾀병을
부린다거나 히스테릭하다거나 정직하게 말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비난하며 그들의 진술을 묵살한다”는 것을 밝혀냈다. “게다가 흑인이거나 퀴어, 트랜스젠더이거나 장애를 가졌다는 이유로 여러모로
주변화되는 여성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극심한 불의를 겪는다.” (만, 2021;
132–133) 차재민 작가는 ‘진술에 관한 불의’를 가로질러
고통의 호소를 듣고 추적하면서 그것을 표현할 다른 언어를 창조하는 일에 주의를 기울인다.
그녀의 전작들, 비정규직 노동조합원인 케이블 설치 기사들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한 〈미궁과 크로마키〉, 〈노는
땅 위에서 파업 중〉이나 아들의 의문사에 얽힌 진실을 밝혀내고자 혼자서 법의학을 공부해온 허영춘 선생의 인터뷰를 담은 〈독학자〉에서도, 이와 같은 주제 의식은 일관되게 확인된다. 이 일관성 안에서 작가는 ‘진단명이 없는’, ‘진단명이 아직 알려지지 않은’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여성들의 몸을 단지 사적인 운명이 아닌 구조적 관계 안에 기입한다.
〈네임리스
신드롬〉은 그러나 고통의 직접적인 호소나 일방적인 의료 권력을 전면화하지 않는다. 오히려 영상은 섬세하고
조용하게 일련의 탐색 과정을 추적한다. 검사 공간 안에서 환자의 몸, 검사
도구들, 그리고 의료 인력은 고통의 이름을 찾기 위해 협력한다. 이들의
협업 과정이 거울, 유리창, 물에 비친 이미지들과 겹쳐 흐르는 동안, 목소리로 물질화된 텍스트는 이미지의 바깥, 혹은 이미지의 심연을 가리킨다.
차재민 작가는 이 작품에서 “평범한 이미지를 다시 보게 할 ‘언어’”, “이미지가 필요로 하는 텍스트를 찾는 것”이 중요한 작업이었다고 전한다. “〈네임리스 신드롬〉의 내레이션은 어떤 길에서
주운 나뭇가지를 모아서 쌓은 탑 같은 면”이 있다는 그녀의 말은, 이
텍스트들이 열심히 찾아지고 발견되고 조심스럽게 선별되어 조립된 조각들, 그래서 새로운 조형적 형태 안에 자리
잡은 재료들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 재료들을 가지고 작가는 “악기를
연주하는, 특히 드럼을 치는 것 같은 느낌”으로, 이미지와 목소리, 영상과 텍스트가 포개지고 갈라지는 일정한 리듬 공간을 만들어낸다. 각기 다른 방향을 가리키면서도 전체적인 리듬을 공유하는 방식으로, 이미지와
목소리는 관객들에게 그 각각이 드러내는 세부 사항에 주의를 기울이게 한다.
3.
고통은 언어에 저항한다. “고통이 언어에
저항한다는 점은 단지 부수적이거나 우연적 속성 중 하나가 아니라 고통의 본성이다.” (스캐리, 2019; 9) 부분적으로나마 괴로움을 줄일 수 있기 위해 고통에 이름을 붙여보려 하는 동안에도, 고통은 언어에 저항한다. 〈네임리스 신드롬〉은 이 사실을 날카롭게 의식한다. 환자는 질병이 아닌 고통을 말하고, 의사는 고통이 아닌 물리적 실재로서의 질병을
추적한다.
진단은 고통의 이유를 밝혀줄 것이다. 진단명으로 가시화된
육체적 고통은 의료 체계 안에서 ‘질병’으로 실체화될 것이지만, 다른 한편 그 고통의 고유한 현실은 환자의 삶과 시간으로부터 분리되어 박제화되고 일반화된 의료적 처치의 대상으로
범주화될 것이다. ‘이름 붙여진’ 고통은 더 이상 ‘고유한 나의 것’이 아니다. 그 이름은
나의 고통을 표시하기에 너무 협소하다. 환자는 그렇게 자신의 고유하고 내밀하며 직접적인 고통으로부터 소외된다.
작가 자신이 “비약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라고
이야기했던 다섯 번째 챕터 ‘지문(指紋,
Fingerprint)’은, 고통의 이름을 탐색하는 과정의 끝에서
“미미한 특징, 덜 가시적인 사실, 눈에 띄지 않는 형태로
남아있는”, 고통의 “비밀스러운 개별성”으로
다시 돌아온다. 비밀스러운 개별성으로 인해, 모든 고통은 이름 붙여질
수 없는 것, ‘네임리스 신드롬’이다. 고통의
고유성은 이름에 저항한다.
각각의 몸이 지닌 특별한 징후의 섬세한 차이를 포착하지 못하는 진단명은 고통의
개별적 고유성을 담지 못한다. ‘고통의 언어’를 창조하는 일, 언어화를 거부하는 고통을 세심하게 살피는 작업, 이 ‘윤리적 중요성으로 가득한 기획’은 고통받는 몸에 대한 예민한 관찰과 섬세한
듣기를 요청한다. 그러나 그 관찰과 듣기는 고통의 의미를 확인하고 이름을 붙이는 작업이 아니다.
그것은 물속에 떠 있거나 가라앉는 몸을 받치거나 놓거나 다시 잡기 위해 함께 움직이며 만들어가는 안무(按舞)처럼, 서로의 몸에 민감히 반응하는
것이다. 고통이 언어에 가 닿을 수 있을까? 늘 너무 부족한 언어, 그 이름없음을 가로지르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가? 〈네임리스 신드롬〉은 거기에
조용히 이름없음을 감내해야 하는 고통받는 몸이 있음을 보여준다. 그것은 고통과 언어를 매개하는 하나의 가능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