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에 시침과 초침이 멋대로인 시계가 있다. 3자 옆에 시와 40분이 적혀 있거나, 숫자가 원 안에서 반듯한 간격을 지키지 못하고 제자리를 이탈한다. 관객은 끊긴 선으로 그려진 시간을 독해한다. 망가진 시계는 막힘없이 흐르는 시침과 분침에 질문을 던지며 읽는 이를 이탈한 시간의 경로에 초대한다.

차재민의 〈찌그러지거나 펼쳐진〉 시리즈는 진단하기가 어려웠던 어머니의 증상의 리서치에서 출발한 작업으로, 손으로 번역에 번역을 거듭한 작품이다. 작가는 요양원에서 검사의 일환으로 어머니가 그린 시계를 이해하고자 하던 중 다른 사례를 인터넷에서 발견하였다. 이후 이상의 징후인 시계를 도안 삼아 흰 도화지에 먹지 드로잉으로 그리고, 다시 벽화로 옮겼다. 틀렸던 시계가 모방의 대상이 되어 검사지 위와는 다른 물질로 변신했다.


차재민, 〈찌그러지거나 펼쳐진〉, 2020, 흰 도화지에 먹지 드로잉, 22.8 x 30.5 cm © 차재민

〈찌그러지거나 펼쳐진〉에서 익명의 검사 결과를 빌었듯이 작가는 타인의 흔적을 작품 세계의 중심에 위치시켜 왔다. 그는 대상을 앞질러 주제와 이미지를 사용하기보다는 대상과 사건을 둘러싼 복수의 관계에 주목한다. 촬영 훨씬 이전부터 토양이 되는 수많은 대화, 조사, 목격, 증언을 경유하여 이미지의 순서, 배치와 조합을 결정한다. 이 과정에서 리서치는 작품의 제작 이전 단계나 단순 재료에 머무르지 않고, 타인과 관계 맺는 과정에 관여한다.

그는 리서치를 도구 삼아 협업의 감각으로 다양한 거리에서 타자의 목소리를 듣고 읽는다. 그 결과, 작가의 작품 세계에서 리서치는 협업 수준의 지위를 확보하며 탐구하고자 하는 생태계를 안내하는 지형도가 된다. 수많은 목소리와 이야기를 모아 구조를 형성하는 이 방식은 기존 담론이 아티스틱 리서치(Artistic Research)를 설명해 온 것과 달리 작가에게 리서치가 작업의 사전 단계로 축소되지 않음을 암시한다. 그에게 리서치는 리허설이다.
 
주로 2000년대 이후 유럽 기관과 제도에서 널리 유행한 용어인 아티스틱 리서치는 명성에도 불구하고 시각 자료와 스캔본, 발췌본 등이 담긴 유리 상자나 전시 끝에 설치된 책장 아카이브를 주로 지칭해 왔다. 자료들은 작품의 뒷이야기와 배경처럼 소환되어 적극적인 몇 관객이 부가적으로 향유하는 대상으로 여겨졌다. 이 오해는 리서치를 실천이 아닌 최종 결과물의 하위 단계로 귀속시키고, 예술가와 대안적 지식 생산자의 역할을 여전히 분리한다.
 
그러나 예술가에게 리서치는 이해를 위해 덧붙이는 주석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작품을 구성하는 형식이자 협업의 도구이기도 하다. 리서치는 조사 과정에서의 경계, 접촉과 만남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이는 배움의 형태, 주체와 대상을 총망라한 무수한 상호작용의 접점을 가시화한다. 작품 제작 이전과 전시 철거 이후에도 이어지는 여행이다.

본 글은 기존에 작가의 리서치를 작업의 일부로만 축소하거나 이분화하여 설명해 온 경향과 달리, 차재민이 협업을 리서치의 방식으로 택하고, 협업의 형식과 구조가 어떻게 예술적 언어를 획득하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차재민의 예술적 언어는 미적 가치와 윤리적 가치를 배타적인 것으로 두지 않고 접합한다. 이를 시간성과 물질성 두 축을 중심으로 고찰할 것이다. 시간성 측면에서는 느린 속도로 관심을 기울이는 방법을, 물질성 측면에서는 증거를 복잡한 연관관계를 축소하지 않는 방식으로 활용하는 양상을 살필 것이다.
 

천천히 시간 늘이기
 
느린 시계는 쉽게 버려진다. 속도를 결정하는 자율성을 허락하지 않는 사회는 주류의 속도를 벗어난 이들을 기다리지 않고 주변부로 미뤄내어 시간을 통제한다. 차재민은 작업의 리서치와 협업 과정에서 시간성을 염두에 둔다. 느리게 걸을 때 우연히 마주치는 풍경에서 만난 누군가와 각본 없는 대화를 하게 되는 것처럼, 그는 이 우연을 다른 요소로 연결하고 나아가는 매듭처럼 작품에 사용한다.

타인과 마주쳐 느려지는 시간을 존중하는 것이다. 예를 들며, 그는 증언과 고백을 어떻게 형식화할 것인가 물으면서 윤리적 가치를 미적 가치와 연결한다. 질문을 하는 과정에서 본인을 유일한 저자로 두기보다는 우연에 구조를 형성하는 결정권을 내어 준다. 이 우연이 “자율 구조”를 형성하고 이것이 윤리를 구축하는 “자력”으로 작용한다.
 
〈1보다 크거나 작거나〉(2018)는 리허설의 리허설을 작품의 주요 시간으로 다룬다. 작품은 아이들이 카메라 앞에서 배우로 연기하는 것보다 긴 시간을 담아낸다. 아이들이 빈 공간으로 진입하고, 연습 전 대화를 나누고, 느껴야 하는 마음과 얼굴의 표현이 어긋나기까지, 시간은 연습과 연기 사이에 존재하며 특정한 내러티브로 축약되지 않는다. 카메라를 어색해하는 응시는 드라마나 영화에서 매끈하게 대사를 수행하는 아역 배우의 모습이 아닌 다른 순간으로 관심을 기울이게 만든다.

침묵을 동행한 지시와 수행이 미묘하게 어긋나는 순간이다. 선생님은 아이들이 슬픈 감정을 표현할 수 있도록 예시를 들며 반복적인 교육을 시도하지만 대사 대신 침묵이 이어진다. 연기를 거절하는 미묘한 순간은 제작 과정에도 기대어 있다. 작가는 우연히 아이들에게 연기를 가르치는 선생님으로부터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본능적으로 거절하는 아역 배우들의 이야기를 듣고 최종 촬영과는 별도로 워크숍이자 리허설을 진행하였다.


차재민, 〈1보다 크거나 작거나〉, 2018, 단채널 비디오, 28분 © 차재민

리허설은 작가와 촬영 스태프에게 수업하는 과정과 아이들을 관찰하는 기회를 마련해 주었다. 본 촬영의 경우에도 최대한 본래 수업과 같은 방식으로 진행하기를 요청하였고, 대본 없이 촬영하였다. 특정 장면을 완벽하게 재현하기 위한 리허설이 아닌, 우연성을 이해하기 위한 리허설을 거듭 진행하였고 이는 거절의 제스처가 드러날 수 있는 무대가 되었다. 선생님과 아이들의 대화에서 비롯된 이 구조는 작품에서 주요하게 드러나는 거절의 순간을 응집하는 토대가 되어 각본 밖의 시간을 소환한 것이다.
 
관찰로 느려진 속도로 쉽게 발견되지 못하던 것을 알아차리는 방식은 다른 작품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사운드 가든〉(2019)은 한국의 여성 심리 상담사들의 인터뷰를 사운드로, 도시의 가로수로 심어지기 위해서 이동하는 훈련목을 이미지로 보여준다. 이때 인터뷰는 한국 여성 심리상담가의 경험을 고증하기보다는 다른 시간에서 파생한 이미지와 충돌한다. 상담사들은 상담센터의 구조와 조직 내의 관계, 자신의 역할과 가치관 등 목격자이자 증언자로서의 경험담을 공유한다.

한편 음성은 다른 터전으로 이주하는 훈련목 이미지를 가로지른다. 지난 상담을 회고하는 시간과, 오랜 시간 길러진 나무가 이동하는 밤과 낮의 시간이 겹친다. 포개짐이 상담사와 나무의 시간-지도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면서도 서로의 위치를 다시 자리매김한다.


차재민, 〈사운드 가든〉, 2019, 단채널 비디오, 30분 © 차재민

인터뷰와 연계된 영상 작품으로는 〈미궁과 크로마키〉(2013)도 있다. 케이블 비정규직 노동조합원의 인터뷰를 실은 책인 「노는 땅 위에서 파업 중」(2013)과 〈미궁과 크로마키〉는 서로를 확장하는 양방향의 관계성을 보여주는 사례다.

작가는 2013년 8월 노동착취에 맞선 500명의 하도급 케이블 노동자 중 15명의 조합원을 만나 C&M 인터넷 설치 기사의 고용 구조가 개인의 삶에 미치는 영향을 기록하였고, 이것이 「노는 땅 위에서 파업 중」의 출간으로 이어졌다. 한편 〈미궁과 크로마키〉는 인터뷰 내용을 직접적으로 담아내지 않고 대신 움직이는 손을 보여준다. 케이블을 자르고 연결하는 이 반복적인 손의 노동은 서비스 수혜자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던 손이다. 전봇대의 높이와 수평을 이루거나, 도시 미궁에서 케이블 타래를 푸는 노동자를 좇는 카메라와 크로마키 화면의 활용은 쉽게 휘발되는 노동의 감각에 관심을 기울이게 한다.
 
〈미궁과 크로마키〉는 작품에서 노동자의 비극적인 서사나 얼굴에 초점을 맞추는 대신, 노동을 구성하는 요소인 전봇대, 도시의 골목길, 근무 중 받는 전화, 고장 난 텔레비전 화면 등으로 대체하였다. 그들이 매일 사용하는 손의 움직임과 이에 맞닿아 있는 사물에 주목한다. 이 과정에서 관객은 노동이 노동자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닌 보다 복잡한 상호작용 속에 있음을 이해하게 된다.

이런 알아차림을 공유하는 것은 예술만의 언어다. 정치적 구호와는 다른 속도일 수 있지만 작가는 이를 인지하며 접근한다. 작가의 말처럼 미술 혹은 예술이 할 수 있는 역할과 사회를 바꿀 수 있는 가능성은 “매우 느리고 희미하고 캄캄한 어둠 속에서 이루어지는 제스처”에 가깝다. 그러나 이 느린 과정이 주변을 바꾸는 가능성을 모아 준다.
 
과학철학과 페미니즘을 교차하는 연구자인 이자벨 스탕저(Isabelle Stengers)는 느린 속도를 저항의 신호로 읽었다. 그에 따르면 관심을 기울인다는 것은 느려지기를 선택한다는 것이다. 느림의 속도는 다른 위급한 사안들 가운데에서도 무엇에 주목하고, 무엇을 위험 요소라고 정의하는지 질문하도록 도우며, 공간에 틈새를 만든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관심을 기울일 수 있는 여유가 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이를 실천하는 기술이다. 작가는 자신만의 속도로 걷는 이들과 동행하며 관객을 그 속도에 초청한다.
 

우연히 발견된 증거
 
느린 속도는 우연히 마주친 물질을 주인공으로 초청하기도 한다. 작가는 시간을 길게 늘어트리던 와중에 발견한 물질로 단순한 인과관계의 서술을 거부하고 사건을 복잡하게 펼친다. 작가의 리서치는 물질을 주목하고 중요 협업자로 삼는다는 점에서 단순한 자료 조사와는 차별화된다. 개인의 직접적인 경험과 생생한 증언을 좇는 전통적인 다큐멘터리와 달리 증거가 자리를 차지하면 미시적인 것들의 폭넓은 상호관계가 드러난다. 물질은 실마리나 징후가 되고 증언의 주변부에 있던 여러 잔해를 불러온다. 이는 특정한 물질을 통해서 역사와 정치를 목격하는 태도로 엉킨 실을 수면 위로 당겨 망 전체를 드러내는 행위와 같다. 저변을 확대하여 본질의 절대적 권위를 해체하는 것이다.
 
〈히스테릭스〉(2014)에서 작가는 혈흔을 이용하는 과학 수사법인 블랙라이트를 히스테릭해지는 과정을 가시화하는 물질로 가지고 온다. 작품의 도입부에 눕혀져 있는 한 사람의 몸은 왜 그가 창백한지, 바닥에 누워 있는지 의문을 품게 하면서 트랙 위를 도는 카메라의 시선을 따라가게 만든다. 비극의 인과관계에 대한 궁금증이 커지지만, 특정한 조명의 불규칙적인 깜빡임에서만 드러나는 이 물질은 원하는 대답을 들려주지 않는다. 조명이 꺼진 뒤에는 흔적이 사라지고 백지가 남는다. 덧대어지는 하이네의 시는 더 나아가 “돌면서 파고드는 질문들”마저도 “하얗게 사라지게” 한다. 사건 후 잔상을 가시적으로 만드는 물질만이 그 자리에 남아 질문은 해소되지 않고 증폭한다.
 
〈히스테릭스〉가 블랙라이트로 목격과 실종의 근거를 다룬다면 〈엘리의 눈〉(2020)에서 작가는 보기의 기술을 탐문한다. 엑스레이, 벽 투시, AI 상담 기술은 무언가를 보는 기술이라는 공통점을 지닌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끔 만들겠다는 욕망과 이미지의 물신화가 기술 개발의 이면에 있다. 작가는 보는 행위를 고찰한 에세이로 기술이 생산한 이미지의 본 사용법과 목적을 교란한다. 정밀 검사에 관한 문구 위에는 엑스레이 이미지를, MIT의 컴퓨터 과학 및 인공 지능 연구소의 벽 투시 연구에 관한 문장에는 움직임을 추적하는 신호 이미지를, 심리 치료를 목적으로 개발된 프로그램의 아바타 엘리가 관객을 마주 ‘보는’ 이미지를 제시한다. 이는 보기 위해 생산된 증거를 낯설게 하고 보기의 윤리성에 관한 믿음을 흩뜨린다.
 
기술이 생성한 신체 이미지에 대한 조사는 진단명이 없는 질병을 앓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네임리스 신드롬〉(2022)에서도 이어진다. 작품은 신체와 병명을 진단하고 정의하는 근대화된 포렌식(forensic)을 빗겨나가고, 오히려 주변부를 드러나게 하는 포렌식을 활용하여 진단과 당사자의 경험 사이의 큰 구멍을 발견한다. 포렌식을 하듯이 사건으로부터 떠밀려 내려오거나 파생한 물질로 사건과 대상 사이의 수수께끼를 모색한다.

가령, 〈네임리스 신드롬〉의 전체 챕터 중 두 번째 장의 ‘삼총사: 모렐리, 프로이트, 코난 도일’에서 작가는 역사가 카를로 긴즈부르그(Carlo Ginzburg)의 「징후들: 실마리 뿌리 찾기」를 인용한다. 엑스레이로 유방을 촬영하고 이미징(imaging)한 화면과 19세기 미술사가인 조반니 모렐리, 「셜록 홈즈」의 저자 코난 도일과 정신분석학 창시자인 프로이트의 공통점을 직조한다. 그들은 모두 의학 배경을 지니고 있으며 지엽적이고 세부적이라고 여겨지는 부분들로 전체 그림, 실마리, 징후를 읽어냈다.
 
작품은 이 인용과 유방 검사의 이미지로 질병을 규명하는 대신 의학적 시스템이 몸을 읽는 방식을 징후로서 포착한다. 몸의 안과 밖을 세밀하게 검사하는 의학적 이미징은 이름 없는 현상을 호명하고자 하는 행위다. 규명하지 못하는 질병을 여러 기술과 장치로 해석하는 과정에서 그 이미지와 당사자 사이에 괴리가 발생한다. 작가는 이 간극을 조사의 공간으로 삼고, 방대한 리서치로 여러 저자를 초대한다.

질병에 대한 폭넓은 리서치를 통해 발췌한 문장들은 부수적인 각주가 아니라 이미지와 내레이션 사이 공백의 길이를 결정하는 작품의 “등뼈”다. 이 문장을 다시 인터뷰 참여 당사자의 목소리로 읽게 하면서 이들의 처치를 의사의 말을 듣는 사람에서 이야기를 들려주는 입장으로 전환한다. 읽기와 듣기를 통해 화자의 입장이 복수화되는 과정에서 관객은 구경꾼이 아닌 목격자가 된다.
 
구경꾼이 거리를 두어 사건에 개입하지 않고 방관한다면, 목격자는 주어진 증거를 어떻게 추적하고, 이해하고, 또 활용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 속에서 정치적, 의학적, 문화적 측면의 좌표를 다중화할 수 있다. 작가는 이 두 태도의 차이를 인식하며 시간을 매개로 하는 영상 언어의 특성을 활용한다. 초기작 〈독학자〉(2014)와 〈이것은 질문이 아니라 풍선이다〉(2010)는 자료 연구를 통해 정치적 사건 당사자의 입을 빌어 관객을 구경꾼으로부터 목격자로 변이시킨다.

〈독학자〉는 허영춘 선생이 군에서 사망한 허원근 일병의 의문사를 밝히기 위해 직접 수집하고 작성한 법의학 자료와 손 글씨를 보여주고, 사건 증거에 대한 내레이션을 관객에게 들려준다. 〈이것은 질문이 아니라 풍선이다〉는 1989년에 방북했던 임수경의 내레이션을 날아가는 풍선과 무전기를 경유하여 송출한다. 답변을 기대하지 않는 송출과 풍선의 유영은 여러 시간대를 혼종시킨다.
 
사건 발생 시점으로부터 한참 뒤에 역사를 발견한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이것이 우리랑 무슨 관련이 있는가? 작가는 해결책과 방안 대신 파편과 현재 사이에 존재하는 불투명한 닻을 끌어올려 정박했던 이야기를 지금 우리의 생태계 안에서 유랑하게끔 한다.

 
불투명성의 권리
 
다시 윤곽이 흐려져 시간이 불분명한 시계로 돌아가자. 이전에도 작가는 영상 작업과 함께 ‘연구’라고 지칭하는 여러 드로잉 시리즈를 제작하였다. 이 드로잉 시리즈들은 스토리보드와도 구별되는 작품 제작 과정 중의 작품이다.

〈사운드 가든 드로잉〉(2017) 시리즈, 〈보초 서는 사람〉(2018)과 함께 전시되었던 〈밖에서 본 침대를 위한 연구〉(2017) 시리즈, 〈미궁과 크로마키〉를 위한 연구, 〈영상 작업 〈히스테릭스〉를 위한 드로잉〉(2014) 등 종이에 구아슈로 작업한 드로잉에 그려진 형상과 색은 다른 작품에서 정확하게 재현되거나 옮겨지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리서치 과정 중 드러나는 대화의 잔해와 흔적을 미적 형태로 확장하는 틈이다. 과정의 과정을 포개어 탐구하고자 하는 주제에 불투명성을 배가하는 행위는 느린 속도로 주변부의 것을 중앙에 두는 협업 방식과도 닮아 있다.


차재민, 〈사운드 가든 드로잉 1〉, 2017, 종이에 구아슈, 39 x 27 cm © 차재민

에두아르도 글리상(Edouard Glissant)은 불투명성의 권리를 주장하며 설명되지 않는 것을 설명하려는 것은 연대와 거리가 멀다고 말한다. 완전히 투명해지기를 요구하는 것은 시스템의 그리드 안으로 존재를 축소하고 정의하려는 압박이다. 불투명성을 존중하는 것이 정치적인 복잡성을 기리는 행위인 것이다.12 느린 속도로 발견되는 것들은 단순한 결론에 회귀하는 것을 막는다.

거미줄 전체가 외부와 연결된 부분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가만히 서서 바라보아야 하는 것처럼 느려진 호흡은 명시적 진실에 관한 환상의 차양을 걷고 목소리가 소거된 것을 우리 감각의 부근에 둔다. 작품에 따라 매번 다른 속도로 그 주변 사물을 알아차리고 환대해 온 차재민은 찌그러진 시계를 지우기를 거부한다. 그의 작품은 불투명함과 함께 살아가자고 말한다.

그의 협업 방식은 이를 위한 끊임없는 리허설이다. 하나의 절대적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모든 것으로부터 독립적인 윤리나 미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작가가 끊어진 선을 울퉁불퉁하고 딱딱한 벽 위로 미세하게 새겨 누군가의 시간을 지울 수 없는 것으로 만드는 행위를 통해 찌그러진 시계는 틀린 시계가 아닌 읽어야 할 시계가 되고, 벽 위에 그은 선들은 우리의 수평선이 된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