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불구하고 〈몽유병자〉는 차재민의 작품 세계의 궤적을 파악하는 데에 있어
필수적인 작품이다. 도시 개발의 내밀하고 개인적인 여파를 주변 환경을 통해 탐색한 이 작품을 시작으로, 그의 작품 세계는 일상생활의 신체적, 심리적, 감정적인
측면에서 스며드는 자본주의적 하부구조의 다양한 면면들로 확장되어 왔다. 그의 작품이 관찰하고 비판하고자 하는
경제적 동력이 지난 10여 년 간 더욱 더 가속화되어온 것을 보더라도 이런 진행 양상은 자연스러운 듯 하다.
비록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와 코로나 19 팬데믹 등과 같은 사건으로 인해
세계 각국의 정부가 무너져가는 시장경제를 지원하기 위해 자본을 투입함에 따라 신자유주의를 정의하는 탈규제의 논리는 일시적으로 주춤했지만, 세계 곳곳에서 부동산과 생필품의 가격이 치솟고 있는 지금 시점을 고려했을 때 수십 년간의 정책으로 인해 야기된 극단적이고
불균형적인 부의 분배는 더욱 더 악화된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문맥을 고려해 보았을 때, 〈몽유병자〉는 한 작가의 초기작에서 보여지는 미숙함보다는, 차후에도 본인 주변에서
감지할 수 있는 사회경제적 하부구조에 대한 관찰을 바탕으로 작업을 발전시켜 나갈 것이라는 작가적 입장을 보여주는 통찰력이 묻어나는 작품이다. 〈몽유병자〉가 청계천 복원을 위한 쇼핑센터 건립이라는 특정한 사건을 통해 자본주의 사회의 작동법을 탐구했다면, 이어진 작품들에서 작가는 후기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면서 실제로 겪은 현실에서 비롯된 개념들을 조직해 내었기 때문이다.
이에 본고는 지금까지의 차재민의 작업에서 나타난 이러한 개념의 갈래들을 풀어내어 그녀의 작업이 동시대 한국의 일상에서
작동하고 있는 자본주의적 하부구조에 대해 어떻게 발언해 왔는지를 이해하고자 한다. 질병, 노동, 저항이라는 개념으로 수렴하는 이 주제들은 차재민이 본인만의 방식으로
신자유주의를 진단해내는 개념적인 장치로 기능하며, 작품의 배경이 되는 서울의 구체적인 맥락을 넘어서도 그의
작업이 의미를 가질 수 있는 연관성을 제공한다.
물론 차재민의 작업이 현재에도 활발하게 지속되고 있다는 사실을
고려했을 때, 본고에서 중심적으로 다루고 있는 주제들을 그의 작품 세계를 단정 짓는 개념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다소 제한적일 수 있다. 그러나 지난 십여 년 간 형성되어 온 차재민의 예술적 기반의 배경이 되는 이 주제들은
후기자본주의에 대한 비판 의식을 바탕으로 한 이전 세대의 작가들의 계보를 바탕으로 차재민이 어떻게 자신만의 예술적 언어를 만들어 왔는지 설명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한다.
유명(有名), 혹은 무명의 질병들
코로나19 팬데믹을 계기로, 질병과 후기자본주의의 밀접한 관계는 이전보다 훨씬 분명하게 드러나게 되었다. 아직
그 원인은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박쥐에서 발견되는 코로나바이러스가 변이를 일으켜 초래된 것으로 여겨지는
이 팬데믹은 다국적 기업에 의해 이뤄지는 삼림 파괴와 중국에 여전히 만연한 불법적이고 지속 불가능한 야생동물 거래의 한 결과로서 이론화되고 있고, 이러한 요인들은 모두 탈규제, 세계화된 시장경제의 논리에 의해 가동되고 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특히 팬데믹 이후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들 사이에 이미 존재하던 뚜렷한 구분은
더욱 더 심화되었는데, 부와 권력을 가진 자들이 타인과의 접촉을 피하려 인적이 드문 별장에 칩거할 때 가난한
사람들은 코로나19에 감염되기 취약한 조건에서 계속해서 일해야만 했다. 동시에
미국의 주요 기업들이 개발한 효과 좋은 백신들은 만들어지는 대로 특허화되고 그 분배가 통제되어 전 세계에 대한 미국의 헤게모니를 분명히 하는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하지만 질병과 자본주의 사이에 존재하는 다양한 층위의 관계들은 코로나19 팬데믹을 계기로 새롭게 주목되기는 했지만 오랜 시간 동안 존재해왔던 것이다. 1980년대 HIV/AIDS가 대규모로 발병하기 시작했을 때 정부의 대응은 팬데믹의 많은 현상을 예견했다. 민영화된 미국의 의료 제도 내에서 정부 차원에서 내릴 수 있는 조치는 제한적이었고, 그마저도
레이건 정부에서는 뒤늦게 이루어졌으며, 이후 제약회사에 의해 개발된 항레트로바이러스 약제는 감염인들이 손쉽게
접근하기에는 지나치게 비쌌다.
성소수자 공동체, 마약 사용자, 라틴계와 흑인 공동체와 같이 소위 주류 미국사회로부터 벗어나 있는 자들에게 주로 퍼진
HIV/AIDS는 자본주의의 인력을 구성하고 있는 신체들에게는 큰 관심거리가 아니었을 것이다. 이와
같이 복잡하게 펼쳐지는 질병과 후기자본주의의 구조적 관계는 한병철이 『피로사회』에서 전개했던, 번아웃,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ADHD), 경계성 인격장애와 같은 심리적 증상들이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경제적 상부구조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논지를 상기시킨다.
그는 “21세기 초반의 병리적 풍경”을 보여주는 질병들은
“낯선 것에 대한 면역학적 부정이 아니라 긍정성의 과잉”에서 비롯된,
“감염”이 아닌 “경색증”이라고
주장하였다. 곧 한병철에게 지금 이 시대를 특징짓는 긍정성의 주문은 곧 언제나 생산적인 상태를 유지해야 하는
강박적인 요구로 인해 개개인의 사람들이 스스로에게 “불가능한 것은 없다”고
되뇌이게 몰아붙이는 지점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긍정성이라는 다소 폭력적인 심리적 상태는 무언가를 “빼앗”지도 “배제”하지도 않지만, 삶을 “포화”시키고 “소모”할 뿐이다.
이러한 문맥에서, 차재민의 〈네임리스 신드롬〉(2022)은 그녀의 주변에 스며들기 시작한 어떤 설명할 수 없는 질병에 대한 관찰뿐만 아니라, 이러한 현상들을 만들어 낸 사회에 대한 암묵적인 비평으로 읽어낼 수 있다. 제목에서
보여지듯, 이 영상은 의학적으로 설명될 수 없는 증상들을 겪는 여성들에 집중하는데, 이러한 주제 의식은 여성 화자가 차분하지만 망설이는 듯한 어조로 읽어 나가는 영상의 첫 문장(“O의 증상은 진단 받기 어렵고 희귀한 병이었다.”)에서부터 드러난다.
이후 화자는 O와 그녀의 의사에 관한 화자의 개인적인 경험을 시작으로 카를로
긴츠부르그(Carlo Ginzburg)가 짚어낸 조반니 모렐리(Giovanni
Morelli),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 코난 도일(Cornan Doyle) 사이의 관계, 수전 손택(Susan
Sontag)의 질병 담론에서 의도적으로 제거된 “주체”, 섬유근육통의
병리학, 지문이라는 관념을 통해 드러나는 벵골 지식의 식민주의적 전유 등의 풍부한 주제들을 엮어 나간다. 화자의 보이스오버를 바탕으로 각기 다른 상황에 있는 여성 환자들의 영상이 보여지는데, 한
환자의 벗은 몸은 전자기기의 피사체가 되고 힘없이 축 늘어진 또 다른 환자는 치료사에 안겨 야트막한 수영장에서 물리치료를 받는다.
이러한 병치를 통해 차재민은 알 수 없는 질병에 의해 생긴 해리의 감각에 집중한다. 개별
환자의 몸에서 느낄 수 있는 무기력함은 그들 스스로의 신체를 낯설게 하는 불가해한 증상들과 연결되어 있는데, 이러한
신체로부터의 분리는 복잡한 인간의 신체를 초음파 이미지나 플라스틱 모형과 같은 비인간화된 인공물로 단순화시켜버리는 다양한 기술적 장치를 통해 실현되고
영상을 관통하는 하나의 형식적 모티프로 보여진다.
하지만 신체가 해리되는 현상을 바탕으로 차재민이 작품 내에
겹겹이 쌓아 올린 연관된 개념들은 작가의 작업 세계를 지탱하고 있는 사회 비판적 의식을 통해 이해했을 때 좀 더 넓은 시의성을 갖게 된다. 질병과 후기자본주의의 복잡한 관계를 통해 독해했을 때, 〈네임리스 신드롬〉에서
보여지는 병리학적 현상들은 카를 마르크스(Karl Marx)가 주창했던 인간 소외의 개념을 떠올리게 한다.
마르크스는 노동자가 멈추지 않는 자본주의의 공장에서 자신의 생산품과 노동의 행위로부터 소외되며 가치 생산을 위한
개체로 대상화된다고 설명한 바 있다. 그의 주장대로 인간 소외의 과정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주체의 경험에서
지배적인 역할을 한다면, 〈네임리스 신드롬〉은 환자의 몸을 통제하는 이름 붙일 수 없는 역병이 이러한 소외의
현상의 한 형태일 뿐이라는 점을 암시한다. 작품은 곧 작가 주변의 여성들의 서사를 통해,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 나가는 개인들이 수많은 이름 없는 증후군의 형태로 나타나는 소외의 과정을 겪어내고 있다는 점을
가시화하는 것이다.
〈네임리스 신드롬〉에 대한 이와 같은 해석은 다양한 층위로 나타나는 소외의 개념과
후기자본주의의 하부구조에 관한 차재민의 광범위하고도 꾸준한 관심과 합쳐지면서 설득력을 얻는다. 특히, 이러한 연결점은 〈찌그러지거나 펼쳐진〉(2020)과 같이 소외의 개념을 유사한
방식으로 다루고 있는 작업들을 고찰하는 데 설득력 있는 연결고리를 마련해 준다.
벽과 종이에 그린 드로잉의
두 가지 형태로 존재하는 이 연작은 인지장애와 치매 여부를 추적하기 위해 비공식적으로 사용되는 “시계 그리기
검사” 결과물들을 손으로 따라 그린 작품으로 구성되어 있다. 인지력에
한계가 있는 환자들은 완벽한 원형의 시계를 쉽게 그릴 수 없다고 알려져 있고, 이를 방증하듯 차재민의 작업을
구성하는 검사 결과물들은 시계의 형태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머뭇거림이 느껴지는,
구불구불하고 뒤틀린 선들로 이뤄진 이 드로잉들에서, 시계 방향으로 숫자를 배열하려는 힘겨운 노력이
느껴지는 흔적들을 제외하고는 환자들이 표현하려 한 물체가 무엇인지 알아채기는 쉽지 않다.
그중 한 드로잉은 1부터 4까지의 숫자를 제대로 나열한 후 숫자 5를
쓰는 것이 알아보기 어려운 낙서가 되어버리는 시도를 보여주며, 몇몇 환자들에게는 숫자를 차례대로 위치시키는
간단한 행위조차 어렵다는 점을 보여준다. 곧 이 드로잉들은 합리성, 기억, 의지 등과 같은 가장 기본적인 능력들이 제한되어 주체성의 한계에 다다른 인간 정신의 다양한 상태들에 대한 시각적
예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왜곡된 드로잉을 만들어낸 인지적 상태가 마르크스가 주장한 소외 현상과
비록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지는 않을지라도, 이 두 상태는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특질들이 사라진 상태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동일 선상에서 해석할 수 있다. 개별 드로잉들이 시간을 재는 시계라는 장치를 묘사하고 있다는
점 또한 〈찌그러지거나 펼쳐진〉을 후기 자본주의에 의해 만들어진 소외의 다양한 형태에 대한 탐구라고 보는 데 논리적 무게를 더한다.
대량 생산을 위해 설계된 공장의 운영 시간이 이윤, 효율성, 운영 비용 등의 계산을 바탕으로 이루어졌기에, 자본주의의 부상과 시간의 구획화는
밀접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곧 이 드로잉들은 제대로 작동하는 시계를 그려낼 수 없는 인지 상실을 겪고
있는 환자들에게, 이윤을 극대화하는 시간의 분화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은 개념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자본주의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이윤을 창출할 수 없는 이 환자들은 (그들의 드로잉과 마찬가지로) 주체로서의 효용이 없는 실패작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이는 〈네임리스 신드롬〉의 화자가 을씨년스럽게 이야기했던, 자본주의 사회에서
질병은 “태업과 파업을 불러오고”, “무직 상태와 가난을 초래”한다는 진단을 상기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