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재민 작업의 역사는, 적어도 지금 이 시점에서는, 〈몽유병자〉(2009)에서 시작한다. 한 작가의 연대기를 시작하는 작품으로서 〈몽유병자〉는 약간은 투박하고 단순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세 명의 행인이 요하나 슈피리의 아동문학 『알프스 소녀 하이디』의 문장들을 읽는 것을 한 채널에서, 한 젊은 남성이 서울의 으리으리한 신축 쇼핑센터를 관통하며 탭댄스를 추는 영상을 또 다른 채널에서 병치하는 이 영상은 몽유병을 겪는 소설의 주인공과 쇼핑센터가 건설됨에 따라 추방된 상인 사이에 꽤나 직접적인 상관관계를 그려낸다.

소설의 주인공 하이디는 이모와 함께 프랑크푸르트로 이사해야 했지만 스위스 알프스에 있는 고향을 계속 그리워하는 한 어린 소녀이다. 그러나 행인이 낭독하는 소설의 발췌본에서 하이디는 “말 그대로 A, B, C부터,” 제대로 된 사람이 되려면 “하나부터 열까지 일일이 가르쳐줘야 하는” 어떤 “심심한” 곳에서 온 “귀신”으로 비하된다. 이 시골 소녀에 교차되는 ‘촌스러운’ 순박함은 이 쇼핑센터가 지어질 땅에서 장사를 하고 있던 상인들에게 던져지는 경멸적인 시선에 감도는 정조와 크게 다르지 않은데, ‘가든파이브’라는 이름을 가진 이 쇼핑센터는 몇십 년간 방치돼 온 청계천을 복원하기 위해 제안된 서울시 개발 사업의 일부였다.

이미 그곳에 삶의 터전을 꾸리고 살아온 상인들에게는 신축 쇼핑센터의 일부를 매입할 수 있는 우선권이 주어졌지만, 도시 재개발에 관한 수많은 익숙한 서사에서와 같이 매수청구권의 가격은 대부분의 임차인들이 감당할 수 없는 액수였고, 보금자리에서 강제 퇴거된 상인들이 그들이 예전에 살던 곳으로 돌아가는 것은 꿈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텅 빈 상가에서 펼쳐지는 탭댄스가 활기차고 생동감 넘치는 춤이 아니라 가슴 아픈 몸짓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이러한 공간적 문맥에서 읽어낼 수 있는 상인들의 더 좋은 삶에 대한 갈망이 무정한 도시 생활의 실상을 마주하고는 시골로 돌아가기를 원하는 하이디의 염원과 맞닿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처럼 작품은 풍부한 시적인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서사들에 그 시작점을 두고 있지만, 작가가 두 채널의 이야기를 병치하는 방식은 때때로 당연하게 보여지기도 한다. 이 작업은 또 소위 ‘한강의 기적’을 통해 대도시로 진화한 서울에 대한 비판적 태도를 펼쳐낸 기성 세대 작가들의 작업과 이 도시가 갖고 있는 맥락의 특성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며, 이미지와 텍스트라는 연약한 도구를 통해 어찌 보면 괴물 같은 서울의 논리에 개입하려는 차재민의 진정성 있는 동기는 어쩌면 순진하게까지 느껴진다.


차재민, 〈몽유병자〉, 2009, 단채널 비디오, 5분 © 차재민

그럼에도 불구하고 〈몽유병자〉는 차재민의 작품 세계의 궤적을 파악하는 데에 있어 필수적인 작품이다. 도시 개발의 내밀하고 개인적인 여파를 주변 환경을 통해 탐색한 이 작품을 시작으로, 그의 작품 세계는 일상생활의 신체적, 심리적, 감정적인 측면에서 스며드는 자본주의적 하부구조의 다양한 면면들로 확장되어 왔다. 그의 작품이 관찰하고 비판하고자 하는 경제적 동력이 지난 10여 년 간 더욱 더 가속화되어온 것을 보더라도 이런 진행 양상은 자연스러운 듯 하다.

비록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와 코로나 19 팬데믹 등과 같은 사건으로 인해 세계 각국의 정부가 무너져가는 시장경제를 지원하기 위해 자본을 투입함에 따라 신자유주의를 정의하는 탈규제의 논리는 일시적으로 주춤했지만, 세계 곳곳에서 부동산과 생필품의 가격이 치솟고 있는 지금 시점을 고려했을 때 수십 년간의 정책으로 인해 야기된 극단적이고 불균형적인 부의 분배는 더욱 더 악화된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문맥을 고려해 보았을 때, 〈몽유병자〉는 한 작가의 초기작에서 보여지는 미숙함보다는, 차후에도 본인 주변에서 감지할 수 있는 사회경제적 하부구조에 대한 관찰을 바탕으로 작업을 발전시켜 나갈 것이라는 작가적 입장을 보여주는 통찰력이 묻어나는 작품이다. 〈몽유병자〉가 청계천 복원을 위한 쇼핑센터 건립이라는 특정한 사건을 통해 자본주의 사회의 작동법을 탐구했다면, 이어진 작품들에서 작가는 후기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면서 실제로 겪은 현실에서 비롯된 개념들을 조직해 내었기 때문이다.

이에 본고는 지금까지의 차재민의 작업에서 나타난 이러한 개념의 갈래들을 풀어내어 그녀의 작업이 동시대 한국의 일상에서 작동하고 있는 자본주의적 하부구조에 대해 어떻게 발언해 왔는지를 이해하고자 한다. 질병, 노동, 저항이라는 개념으로 수렴하는 이 주제들은 차재민이 본인만의 방식으로 신자유주의를 진단해내는 개념적인 장치로 기능하며, 작품의 배경이 되는 서울의 구체적인 맥락을 넘어서도 그의 작업이 의미를 가질 수 있는 연관성을 제공한다.

물론 차재민의 작업이 현재에도 활발하게 지속되고 있다는 사실을 고려했을 때, 본고에서 중심적으로 다루고 있는 주제들을 그의 작품 세계를 단정 짓는 개념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다소 제한적일 수 있다. 그러나 지난 십여 년 간 형성되어 온 차재민의 예술적 기반의 배경이 되는 이 주제들은 후기자본주의에 대한 비판 의식을 바탕으로 한 이전 세대의 작가들의 계보를 바탕으로 차재민이 어떻게 자신만의 예술적 언어를 만들어 왔는지 설명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한다.
 

유명(有名), 혹은 무명의 질병들
 
코로나19 팬데믹을 계기로, 질병과 후기자본주의의 밀접한 관계는 이전보다 훨씬 분명하게 드러나게 되었다. 아직 그 원인은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박쥐에서 발견되는 코로나바이러스가 변이를 일으켜 초래된 것으로 여겨지는 이 팬데믹은 다국적 기업에 의해 이뤄지는 삼림 파괴와 중국에 여전히 만연한 불법적이고 지속 불가능한 야생동물 거래의 한 결과로서 이론화되고 있고, 이러한 요인들은 모두 탈규제, 세계화된 시장경제의 논리에 의해 가동되고 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특히 팬데믹 이후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들 사이에 이미 존재하던 뚜렷한 구분은 더욱 더 심화되었는데, 부와 권력을 가진 자들이 타인과의 접촉을 피하려 인적이 드문 별장에 칩거할 때 가난한 사람들은 코로나19에 감염되기 취약한 조건에서 계속해서 일해야만 했다. 동시에 미국의 주요 기업들이 개발한 효과 좋은 백신들은 만들어지는 대로 특허화되고 그 분배가 통제되어 전 세계에 대한 미국의 헤게모니를 분명히 하는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하지만 질병과 자본주의 사이에 존재하는 다양한 층위의 관계들은 코로나19 팬데믹을 계기로 새롭게 주목되기는 했지만 오랜 시간 동안 존재해왔던 것이다. 1980년대 HIV/AIDS가 대규모로 발병하기 시작했을 때 정부의 대응은 팬데믹의 많은 현상을 예견했다. 민영화된 미국의 의료 제도 내에서 정부 차원에서 내릴 수 있는 조치는 제한적이었고, 그마저도 레이건 정부에서는 뒤늦게 이루어졌으며, 이후 제약회사에 의해 개발된 항레트로바이러스 약제는 감염인들이 손쉽게 접근하기에는 지나치게 비쌌다.

성소수자 공동체, 마약 사용자, 라틴계와 흑인 공동체와 같이 소위 주류 미국사회로부터 벗어나 있는 자들에게 주로 퍼진 HIV/AIDS는 자본주의의 인력을 구성하고 있는 신체들에게는 큰 관심거리가 아니었을 것이다. 이와 같이 복잡하게 펼쳐지는 질병과 후기자본주의의 구조적 관계는 한병철이 『피로사회』에서 전개했던, 번아웃,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ADHD), 경계성 인격장애와 같은 심리적 증상들이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경제적 상부구조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논지를 상기시킨다.

그는 “21세기 초반의 병리적 풍경”을 보여주는 질병들은 “낯선 것에 대한 면역학적 부정이 아니라 긍정성의 과잉”에서 비롯된, “감염”이 아닌 “경색증”이라고 주장하였다. 곧 한병철에게 지금 이 시대를 특징짓는 긍정성의 주문은 곧 언제나 생산적인 상태를 유지해야 하는 강박적인 요구로 인해 개개인의 사람들이 스스로에게 “불가능한 것은 없다”고 되뇌이게 몰아붙이는 지점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긍정성이라는 다소 폭력적인 심리적 상태는 무언가를 “빼앗”지도 “배제”하지도 않지만, 삶을 “포화”시키고 “소모”할 뿐이다.
 
이러한 문맥에서, 차재민의 〈네임리스 신드롬〉(2022)은 그녀의 주변에 스며들기 시작한 어떤 설명할 수 없는 질병에 대한 관찰뿐만 아니라, 이러한 현상들을 만들어 낸 사회에 대한 암묵적인 비평으로 읽어낼 수 있다. 제목에서 보여지듯, 이 영상은 의학적으로 설명될 수 없는 증상들을 겪는 여성들에 집중하는데, 이러한 주제 의식은 여성 화자가 차분하지만 망설이는 듯한 어조로 읽어 나가는 영상의 첫 문장(“O의 증상은 진단 받기 어렵고 희귀한 병이었다.”)에서부터 드러난다.

이후 화자는 O와 그녀의 의사에 관한 화자의 개인적인 경험을 시작으로 카를로 긴츠부르그(Carlo Ginzburg)가 짚어낸 조반니 모렐리(Giovanni Morelli),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 코난 도일(Cornan Doyle) 사이의 관계, 수전 손택(Susan Sontag)의 질병 담론에서 의도적으로 제거된 “주체”, 섬유근육통의 병리학, 지문이라는 관념을 통해 드러나는 벵골 지식의 식민주의적 전유 등의 풍부한 주제들을 엮어 나간다. 화자의 보이스오버를 바탕으로 각기 다른 상황에 있는 여성 환자들의 영상이 보여지는데, 한 환자의 벗은 몸은 전자기기의 피사체가 되고 힘없이 축 늘어진 또 다른 환자는 치료사에 안겨 야트막한 수영장에서 물리치료를 받는다.

이러한 병치를 통해 차재민은 알 수 없는 질병에 의해 생긴 해리의 감각에 집중한다. 개별 환자의 몸에서 느낄 수 있는 무기력함은 그들 스스로의 신체를 낯설게 하는 불가해한 증상들과 연결되어 있는데, 이러한 신체로부터의 분리는 복잡한 인간의 신체를 초음파 이미지나 플라스틱 모형과 같은 비인간화된 인공물로 단순화시켜버리는 다양한 기술적 장치를 통해 실현되고 영상을 관통하는 하나의 형식적 모티프로 보여진다.

하지만 신체가 해리되는 현상을 바탕으로 차재민이 작품 내에 겹겹이 쌓아 올린 연관된 개념들은 작가의 작업 세계를 지탱하고 있는 사회 비판적 의식을 통해 이해했을 때 좀 더 넓은 시의성을 갖게 된다. 질병과 후기자본주의의 복잡한 관계를 통해 독해했을 때, 〈네임리스 신드롬〉에서 보여지는 병리학적 현상들은 카를 마르크스(Karl Marx)가 주창했던 인간 소외의 개념을 떠올리게 한다.

마르크스는 노동자가 멈추지 않는 자본주의의 공장에서 자신의 생산품과 노동의 행위로부터 소외되며 가치 생산을 위한 개체로 대상화된다고 설명한 바 있다. 그의 주장대로 인간 소외의 과정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주체의 경험에서 지배적인 역할을 한다면, 〈네임리스 신드롬〉은 환자의 몸을 통제하는 이름 붙일 수 없는 역병이 이러한 소외의 현상의 한 형태일 뿐이라는 점을 암시한다. 작품은 곧 작가 주변의 여성들의 서사를 통해,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 나가는 개인들이 수많은 이름 없는 증후군의 형태로 나타나는 소외의 과정을 겪어내고 있다는 점을 가시화하는 것이다.
 
〈네임리스 신드롬〉에 대한 이와 같은 해석은 다양한 층위로 나타나는 소외의 개념과 후기자본주의의 하부구조에 관한 차재민의 광범위하고도 꾸준한 관심과 합쳐지면서 설득력을 얻는다. 특히, 이러한 연결점은 〈찌그러지거나 펼쳐진〉(2020)과 같이 소외의 개념을 유사한 방식으로 다루고 있는 작업들을 고찰하는 데 설득력 있는 연결고리를 마련해 준다.

벽과 종이에 그린 드로잉의 두 가지 형태로 존재하는 이 연작은 인지장애와 치매 여부를 추적하기 위해 비공식적으로 사용되는 “시계 그리기 검사” 결과물들을 손으로 따라 그린 작품으로 구성되어 있다. 인지력에 한계가 있는 환자들은 완벽한 원형의 시계를 쉽게 그릴 수 없다고 알려져 있고, 이를 방증하듯 차재민의 작업을 구성하는 검사 결과물들은 시계의 형태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머뭇거림이 느껴지는, 구불구불하고 뒤틀린 선들로 이뤄진 이 드로잉들에서, 시계 방향으로 숫자를 배열하려는 힘겨운 노력이 느껴지는 흔적들을 제외하고는 환자들이 표현하려 한 물체가 무엇인지 알아채기는 쉽지 않다.

그중 한 드로잉은 1부터 4까지의 숫자를 제대로 나열한 후 숫자 5를 쓰는 것이 알아보기 어려운 낙서가 되어버리는 시도를 보여주며, 몇몇 환자들에게는 숫자를 차례대로 위치시키는 간단한 행위조차 어렵다는 점을 보여준다. 곧 이 드로잉들은 합리성, 기억, 의지 등과 같은 가장 기본적인 능력들이 제한되어 주체성의 한계에 다다른 인간 정신의 다양한 상태들에 대한 시각적 예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왜곡된 드로잉을 만들어낸 인지적 상태가 마르크스가 주장한 소외 현상과 비록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지는 않을지라도, 이 두 상태는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특질들이 사라진 상태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동일 선상에서 해석할 수 있다. 개별 드로잉들이 시간을 재는 시계라는 장치를 묘사하고 있다는 점 또한 〈찌그러지거나 펼쳐진〉을 후기 자본주의에 의해 만들어진 소외의 다양한 형태에 대한 탐구라고 보는 데 논리적 무게를 더한다.

대량 생산을 위해 설계된 공장의 운영 시간이 이윤, 효율성, 운영 비용 등의 계산을 바탕으로 이루어졌기에, 자본주의의 부상과 시간의 구획화는 밀접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곧 이 드로잉들은 제대로 작동하는 시계를 그려낼 수 없는 인지 상실을 겪고 있는 환자들에게, 이윤을 극대화하는 시간의 분화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은 개념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자본주의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이윤을 창출할 수 없는 이 환자들은 (그들의 드로잉과 마찬가지로) 주체로서의 효용이 없는 실패작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이는 〈네임리스 신드롬〉의 화자가 을씨년스럽게 이야기했던, 자본주의 사회에서 질병은 “태업과 파업을 불러오고”, “무직 상태와 가난을 초래”한다는 진단을 상기시킨다.


차재민, 〈찌그러지거나 펼쳐진〉, 2020, 흰 도화지에 먹지 드로잉, 22.8 x 30.5 cm © 차재민

보이지 않는 노동
 
자본주의의 병리에 대한 차재민의 탐구가 시간성의 개념과 접점을 가진다는 것은 작가의 작품들에서 다양한 개념들이 서로 얽혀 있는 방식을 잘 보여준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찌그러지거나 펼쳐진〉에서 둥근 시계를 그리려 하는 환자의 시도로부터 드러나는 생산성의 논리를 통해 소환되는 시간이라는 개념은 작가의 작품 세계에 있어 노동이라는 또 다른 중심적인 축을 드러낸다. 특히 작가는 일과 여가의 분리가 사라지는 현상이나 임시 계약 경제가 영속화되는 방식, 불안정한 생활 환경으로 수렴되는 ‘포스트 포디즘’의 생산 체제가 불러온 노동의 전환에 집중한다.

물론 21세기의 도래 이후 가속화된 현상으로서 이러한 노동의 변화는 예술적, 철학적 탐구의 대상으로 폭넓게 다뤄져 온 주제이다. 조나단 벨러(Jonathan Beller)의 책 『영화적 생산양식: 관심경제와 스펙터클의 사회 (The Cinematic Mode of Production: Attention Economy and the Society of Spectacle)』는 스마트폰과 태블릿 컴퓨터들이 발명되기도 훨씬 전인 2006년에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지각의 과정을 자본으로 치환하는 ‘관심경제’의 발전을 예견했다. 같은 해, 하룬 파로키는 〈110년간의 공장을 나서는 노동자들(Workers Leaving the Factory in Eleven Decades)〉(2006)을 선보였다.

영화사를 아우르는 다양한 레퍼런스로부터 공장을 떠나는 노동자들의 모습을 담은 영상들을 편집해 엮어 12개의 모니터로 상영한 이 작품은 뤼미에르 형제의 초기 영화에서 탐구된 노동과 영화의 구성적인 관계를 재고하는 동시에, 이제는 점차 사라지고 있는 일과 여가를 엄격히 구분하는 노동의 형태를 주목했다. 그리고 이러한 선례는 차재민에게 한국 사회라는 문맥에서 발생하는 후기자본주의 현상에 관해 고찰할 수 있는 개념적인 틀을 제공한다.

작가는 1980년대 후반에 한국에서 태어난, 경제 성장이 둔화되던 2000년대 중후반에 성인기에 접어든 이른바 ‘88만원 세대’의 일부이다. 비정규직을 전전하며 최저임금에 따라 대략 월 88만 원가량의 수입으로 살아간다는 뜻에서 이처럼 이름 붙여진 이 세대는 한국의 노동 인구가 마주해야 했던 불안정성과 위태로움을 직접 목격했다. 그들의 십대 시절은 1997년 IMF 외환위기로 인한 대량 해고와 전국적인 긴축 정책에 영향을 받았고, 그들이 성인이 될 즈음 한국 경제는 2008년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인해 큰 타격을 겪었다.

이처럼 차재민과 동년배 작가들에게 자본주의의 근본적인 불확실성은 (신체적, 정신적 희생의 대가로 그들의 삶을 지탱하는 노동의 문제를 차치하더라도) 마르크스주의 이론의 영역에 국한되지 않는, 살아나가야 하는 실재의 현실이다. 곧 한국 사회에서의 노동의 조건을 다루고 있는 차재민의 작품들은 일상의 환경에서 추적할 수 있는 신자유주의의 복잡한 현 상태를 이해하고자 하는 시도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수많은 쓰레기를 남긴 대규모 행사 후, 텅 빈 경기장의 좌석들을 확인하고 청소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담은 단채널 영상 〈의자 위를 걸으며〉(2020)는 이러한 양상을 보여주는 작품의 한 예시이다. 몇천 명을 가뿐히 수용할 스타디움을 구성하고 있는 플라스틱 좌석과 철제 비계에 반해 형광 상의를 입고 있는 작업자들은 너무나 작고 미미해 보이는데, 이는 일용직 노동자로서 지배계급의 눈에 보이지 않게 존재하도록 강요되는 그들의 현실을 반영하는 듯하다.

이어지는 내레이션에서 화자는 “엘리베이터나 지하철 입구에서 막힘.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하는데, 차단되는 대상이 무엇인지 불분명하고, 차재민의 다른 작품들과 다르게 보이스오버가 중국어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이 첫 문장은 의외의 서문이다. 이어지는 장면에서 이 내레이션이 쓰레기를 줍는 환경미화원들을 향한 일련의 지시라는 점이 드러나는데, 화자가 중국어로 이야기하는 것 또한 한국에서 일하는 많은 일용직 노동자들이 한국에 정착한 조선족이라는 점에서 기인한 듯하다 (“일본과 중국에 대해서 부정적. 웬만하면 언급하지 마세요.”, “일이 많으면 늦게 끝남. 초과 근무 수당은 기대하지 말 것. 의무라고 생각함.”).

이 문장들은 곧 환경미화 노동자로서의 직무를 잘 수행하고 (“바쁜 데부터 청소한다. 아침 일찍부터 사람들이 나오는 장소부터 청소한다.”), 한국에서 외국인으로 살아남으며 (“한국에 대해 뭐든지 알 거라고 아무도 기대하지 않음”), 폭력적일 수 있는 환경에서도 본인 스스로를 돌볼 수 있는 (“너무 열심히 일하지 말자. 매사에 스트레스 받을 필요 없다. 받는 만큼만 일하자.”) 방법을 제시하는 조언들로 이어진다.

하지만 당혹스럽게도, 노동자들로 하여금 서로 간의 연대감을 형성할 수 있게 하는 이러한 조언들 또한 신자유주의 체제에서의 생존을 위한 필수 조건인 낙관의 태도를 독자들의 마음에 심어주는 자기계발서의 톤으로 점철되어 있다 (“가난한 사람은 선택하지만 부자들은 절대 선택 않는 6가지,” 또는 “매일 같이 꾸준히 해 주는 게 포인트.”). “긍정성의 과잉”이 신자유주의적 의식을 특징짓는다는 한병철의 진단을 상기해 보았을 때, 이 진술들은 자본주의의 변방에 위치하고 있는 노동자들 또한 대안적인 공존의 모델을 상상하기보다는 현재의 금융적 현실에 대처하는 식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되새기게 한다.

곧 차재민은 후기자본주의라는 구조 안에서 자기 자신을 돌보는 것은, 사회가 주는 압박을 거부하며 너무 “열심히” 일하지 않는 것만으로는 성취될 수 없음을 암시한다. 이는 월급이나 일당을 얼마나 받는가에 관계없이, “통장 쪼개기”와 “가계부를 쓰는” 것이 도움이 되는, 피할 수도, 빠져나갈 수도 없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의자 위를 걸으며〉가 암시하듯, 후기자본주의 사회의 냉혹한 세계는 개별 주체를 생산의 대리인으로 환원시키는 복잡한 하부구조를 바탕으로 형성되었다. 특히 현 시대의 하부구조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인식 과정에서부터 자본을 축적할 수 있는 가능성을 기저에 두고 작동하고 있는데, 이러한 진단은 파올로 비르노(Paolo Virno)나 마우리치오 라자라토(Maurizio Lazzarato) 같은 자율주의 마르크스주의 철학자들이 논의한 ‘비물질노동(immaterial labor)’ 개념을 통해 간명하게 설명된다.

1996년에 출판된 동명의 글에서 라자라토는 비물질노동을 “상품의 정보와 문화에 관련된 내용을 생산하는 노동”이라고 정의하며, 이러한 노동의 가능성을 “사이버네틱스와 컴퓨터의 통제” 등을 포괄하는 기술이나 “문화적이고 예술적인 기준들, 취향들, 소비의 규범들을 정의하고 재정의하는” 것과 같이 “보통 ‘일’이라고 인정되지 않는 일련의 활동들”에서 추적한다.
 
특히 차재민의 작업에 있어 중요한 부분은 “정동적인(affective)” 양식으로 발생하는 비물질노동인데, 마이클 하트(Michael Hardt)가 이론화한 이 개념은 과거 여성주의 운동에서 고찰된 가족 노동이나 돌봄 노동과 같은 예시뿐만 아니라, 타인으로 하여금 감정적인 경험을 생산하거나 수정하도록 하게 만드는 모든 형태의 노동을 고찰할 수 있는 확장된 틀로서 “사회적 네트워크, 공동체의 형태들, 생체권력”을 생산하는 노동을 일컫는다.

차재민의 작품 세계에서, 이 개념은 ‘돌봄’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두 가지 상반된 형태의 노동을 병치하는 〈보초 서는 사람〉에서 가장 직접적으로 환기된다. 작품은 (아마도 그의 어머니로 추정되는) 병상에 누워 있는 한 여성 환자를 돌보며 야간 경비원으로 일하는 한 젊은 남성의 일상에 주목하며, 그가 호신 훈련을 받고, 한밤중에 빈 건물을 순찰하고, 간병인과 통화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특히 작품은 주인공의 통화를 여과 없이 보여주면서, 아픈 사람을 돌보는 데에 있어 필요한 정동적 돌봄 노동이 실은 간병인의 교대 여부나 환자의 물리치료 일정을 정하는 것과 같은 일련의 행정적인 결정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는 이 남성이 보초를 서는 행위에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는 관점이다. 수많은 감시카메라 영상을 띄워 놓은 통제실에서 졸고 있는 주인공이 건물을 순찰하며 보초를 서는 방식은 체계화되고 기계화된 노동을 보는 듯하며, 이는 영상 초반에서 기계 경비는 처음에는 자본이 많이 소요되지만 장기적으로는 경제적으로 유리한 방안일 것이라고 말하는 강의자의 발언과 묘하게 중첩된다.

어디에선가부터 갑자기 떨어지는 전선들이나 요란한 소리를 내며 무너지는 의자 더미들과 같이 건물에서 일어나는 예상치 못한 여러 사건들을 보여주며, 작품은 돌봄의 행위가 행정적인 노동으로 전환되었을 때, 제한적일 수밖에 없는 노동자 개인의 시야로 인해 뜻밖의 어려움이 수반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런 암시를 통해, 작품은 간병의 행위를 (본인과 분리된) 하나의 업무로 간주하는 간병인에게 돌봄을 받고 있는 주인공의 어머니의 상태에 대한 궁금증을 유발한다.

그러나 돌봄 노동에 있어 인간의 정동을 어느 정도까지 제거하는 것이 바람직한가에 대한 질문은 영상 후반에 이르러서도 대답되지 않은 채로 남겨진다. 환자에게 감정을 이입하는 것은 날을 거듭할수록 나빠지는 환자의 상태를 고스란히 지켜봐야만 하는 노동자에게 심리적인 괴로움을 안겨줄 것이고, 간병의 행위를 아무런 감정 없이 수행하는 것은 환자를 취약하게 만들 것이다. 이는 곧 모든 형태의 정동적 노동에서 찾아볼 수 있기에 하나의 영상을 통해 해결책을 모색할 수 없는 난제로 남아 있을 뿐이다.


차재민, 〈의자 위를 걸으며〉, 2020, 단채널 비디오, 10분 © 차재민

저항의 수행
 
이처럼 차재민의 작품 세계의 핵심을 구성하는, 일상에서 추적할 수 있는 후기자본주의의 작동법에 대한 관찰들은 〈제자리 비행〉(2023)과 같은 작품을 읽어내는 데에 있어 제한적인데, 이는 작가의 다른 작품과는 달리 〈제자리 비행〉이 사회경제적 문제의식에 대한 직접적인 논평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두컴컴한 헌책방을 배경으로, 좌우로 연결된 세 채널로 나뉜 영상은 텅 빈 가게의 구석구석과 통로들 사이를 걸어다니며 책을 쌓아 탑을 만드는, 얼핏 무의미해 보이는 업무에 몰두하고 있는 어린 소년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이어지는 시퀀스에서 소년은 마이크 앞에 앉아 사이렌과 비행기 소리를 흉내내고, 각 채널의 카메라는 이 동일한 행위를 세 가지의 시점에서 촬영한다. 하지만 (어쩌면 위협적으로 느껴지기도 하는) 소년의 콧노래가 박수 소리, 비명과 같은 불규칙적인 소리로 변화하면서, 작품은 무정부적인 상태를 가시화하는 듯한 혼란스러운 퍼포먼스들을 보여주기 시작한다. 한 채널에서는 눈을 감은 채, 서점의 복도 한가운데에 가만히 서 있는 모습으로 등장하는 여성 인물이 책이 가득 쌓인 철제 카트를 밀며 좁은 통로를 급히 뛰어다니고, 곧 이 여성은 마이크에 대고 책의 내용을 신경질적으로 웅얼거린다.

그 옆 채널은 동일한 행위에 매진하고 있는 또 다른 여성을 보여주는데, 두 채널의 소리가 중첩될 때 텅 빈 책장의 정적을 깨는 이 퍼포먼스의 광란적이고 무질서한 느낌은 더욱 강조된다. 이러한 감각들은 동일한 인물의 이미지가 여러 채널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등장하며 증폭되며, 이때 인물들의 정적인 몸짓들은 특별한 서사적 구조를 갖고 있지 않은, 급작스럽고 폭발적인 동작들로 전환된다. 이렇게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는 영상은 얼핏 당혹스럽기도 하지만, 한때 통제됐던 그들의 몸의 움직임이 속도에 익숙해지고 재빨라지며 그들의 움직임이 내는 소리가 느리고도 조화로운 전자음으로 바뀌는 시점에서는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제공하기도 한다.

영상의 끝에 이르렀을 때, 인물들은 서점의 정돈된 정적을 깨는 행위를 통해 미지의 세계에 대한 기대감, 상상력, 심지어는 자유로움을 만끽할 수 있는 또 다른 존재의 방식을 획득한 것처럼 보인다. 차재민의 작업이 기반하는 사회경제적 맥락에서 볼 때, 이 인물들은 비록 일시적일지라도 그들을 제한하는 세상의 규칙을 깨부수려 시도하는 주체들에 대한 비유로 기능하는 듯하다. 곧 이 인물들은 본인들이 살아가고 있는 세계에 예상치 못한 균열을 만들어 내며, 복수의 목소리를 바탕으로 현재의 질서에 개입하는 군중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개인과 그 주변의 관계를 후기자본주의 사회에서 주체의 위치에 대한 은유로 독해하는 것은 차재민의 작품 세계에서 특정한 사회경제적 현상들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는 〈제자리 비행〉과 같은 작품들을 해석하는 데 필수적인 개념적 틀을 제공한다. 이러한 관점은 아역 배우들을 위한 워크숍 중에 일어나는 일련의 사건들을 담은 단채널 영상작업인 〈1보다 크거나 작거나〉(2018)를 이해하는 데 적용될 수도 있다.

영상은 거울로 뒤덮인 텅 빈 스튜디오를 걸어다니는 어린 소년을 비추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이 장면은 연기라는 주제를 드러내 놓고 언급하지는 않지만, 곧이어 스튜디오 안을 걸어다니는 행위는 대사를 큰 소리로 연습하는 것과 같이 어떤 인물을 연기하기 전에 몸을 푸는 일종의 준비 동작이라는 점을 제시한다. 연기란 무엇인지 의논하는 토의 장면을 거쳐, 작품은 각 배우들이 연기하는 대본에 따라 강사가 특정한 감정을 이끌어내는 스크린 테스트 장면으로 이어진다.

이 시퀀스의 첫 장면에서 강사는 배우들로 하여금 대본을 연기할 수 있는 올바른 상태에 도달할 수 있도록 조력자의 역할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워크숍이 지속되며 그녀가 자아내는 배우들의 감정적인 반응은 조종에 더 가깝다는 것이 드러난다. 워크숍에 참여하는 아역 배우 준범이 엄마에게 혼날 때 ‘조금 슬펐다’고 기억해 내자, 강사는 바로 그런 감정들이 그녀가 끌어내고자 하는 감정이라고 재차 확인한다 (“찾았다.”).

이후 강사는 준범이 그 감정을 이끌어 낼 수 있도록, 그의 신체가 내적 상태를 가장 직접적으로 표현해낼 수 있을 것이라고 (“마음이 슬프면 얼굴은 슬픈 표정이 된다”) 말하며 준범이 스스로에게 “슬프다”거나 “마음이 아프다”고 되뇌어보라 제안한다. 머뭇거리는 준범에게 “할 수 있다”는 격려를 심어준 강사는 곧 기분이 어떻냐고 묻는데, 준범은 마치 그의 지시가 즉각적인 영향을 주었다는 듯이 시무룩한 얼굴을 한 채로 가만히 있는다. 이 시점에서 작품은 개인의 감정 상태와 같은 매우 내밀하고 사적인 인간 삶의 한 측면이 특정한 교육 방식을 통해 조종될 수 있음을 드러내며, 교육기관, 종교단체, 가족 등의 형태로 자본주의적 주체를 생산하는 기제들을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라는 용어로 파악한 루이 알튀세르의 사유를 환기한다.8

하지만 차재민의 작품은 알튀세르의 이론에 등장하는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뿐만 아니라 ‘힘내세요’와 같은 흔하고 단순한 표현들 또한 개인의 삶에서 감정적이고 정동적인 차원을 형성할 수 있음을 상기시키며, 관람자로 하여금 대체 무엇이 이러한 하부구조의 통제에서 벗어나게 해주는지 되묻게 한다. 비록 영상 말미에 스튜디오에서 공놀이를 하고 있는 어린이들의 모습은 자유로워 보이지만, 이처럼 때 묻지 않은 즐거움의 순간은 후기자본주의의 통제로부터의 일시적인 해소라는 점을 상기시키기에 〈1보다 크거나 작거나〉의 잔상은 씁쓸하기만 하다.
 
이처럼 차재민의 예술 실천에 내재된 미학과 정치성은 궁극적으로 후기 자본주의의 조건들 속에서 예술의 역할이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제기한다. 한때 예술 생산을 후기자본주의의 체계의 외부, 혹은 대립점에 위치시키려 했던 제도비평(institutional critique)의 전략들이 그 효력을 다한 듯 보이는 이 시대에 차재민의 작업은 이미지가 할 수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을 촉발한다. 〈몽유병자〉의 예시에서 볼 수 있듯이, 이 질문은 차재민이 작업의 매우 초기부터 천착해온 문제이다.

이러한 주제 의식에 대해 작가는 본인이 문제를 제기하고자 하는 사회경제적 조건의 징후적인 현상들을 묘사하고 진단할 수 있는 이미지의 힘을 바탕으로 응답한다. 곧 그는 해상 노동자, 공장 노동자 같은 다양한 주체들을 사진, 영화, 글 등으로 기록한 알란 세쿨라(Allan Sekula)와 같이 이미지의 잠재성에 관해 유사한 관심을 갖고 작업한 시각 예술가들과, 전통적인 영화 형식의 파괴를 통해 이미지가 자본주의 시스템을 영속하는 하나의 도구로서 사용되는 것에 대한 대안을 제안하고자 했던 크리스 마르케(Chris Marker) 등의 영화 감독들의 계보를 계승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과 달리 차재민의 작업은 20세기 중반 미국과 유럽의 사회 운동의 중심에 있었던 저항의 시대정신을 바탕으로 하고 있지는 않다. 차재민의 작업은 가속화라는 논리가 전례 없는 경제적 성장뿐 아니라 견디기 어려운 노동 조건, 인본주의적 담론에 대한 경멸, 수많은 사람들의 자살을 불러온 한국이라는 나라에서의 고독한 시도이며, 이 나라의 현대사를 상당 부분 차지하고 있는 독재 정권의 여파 속에서 미술이라는 언어를 습득하며 본인의 주변 환경에 대한 의심을 바탕으로 작품 세계를 만들어 나간 한 젊은 작가의 개인사에서 비롯된 예술적 실천이다.

그리고 어찌 보면 순진하게 느껴지는 이러한 이상향에 대한 갈망과 역사적 맥락에 조응하는 비평 의식을 바탕으로 차재민의 작품 세계는 동시대 작가들의 작업들과 구분된다. 조르주 디디위베르만이 이야기했듯이, 이미지와 마주한다는 것이 “우리의 지식과 행동에 이를 어떻게 포함시킬 수 있는지 선택”하게 만드는 것이라면, 차재민의 작품 세계는 바로 그 선택을 불러온다는 점에서 의미를 만들어 낸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