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두진, 〈거기〉, 2014, 캔버스에 아크릴릭, 유채, 182 x 227 cm © 안두진

한시대가 끝났다고 말하던 시기에도 화가의 작업은 계속 되었다. 바뀐 세상이었지만 운명이 새로움을 위해 살아가야 한다고 속삭이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 모두는 알고 있었다. 이미 순백의 화면 안에는 우리가 알고 있던 이미지들이 가득하였고 그곳에서 나올 것은 판에 박힌 것 뿐 이라는 것을. 그려야할 대상은 소진되어 그리기 방식으로 대체되었고 온갖 것을 그림에 붙여 보고 섞어보지만 결국 남는 것은 ‘이 그림은 무엇을 말 하는가’였다. 화가의 오랜 투쟁의 산물도 수용자 앞에선 결국 언어인 것이다.

다시 화면 앞으로 돌아가자. 결국 화면 안에는 이미 역사가 존재하고 주변의 잠재적인 이미지가 현재한다. 이것을 그려내는 방식들에도 역사가 있다. 익숙한 색깔, 세련된 톤, 감정의 격동을 일으키는 붓놀림 등 이것을 요소로서 분류하여 진열한다면 홈플러스 못지않을 것이다. 미술 세계의 올드맨들의 성과가 과거에는 역사라고 불렸다면 이제는 마트의 상호명이 되었다. 카트를 밀고 재료를 잘 고른다면 간단한 레시피에도 좋은 작품이라는 것이 나온다. 이제 미술작업은 요리가 되었고 욕구를 채운다는 점과 ‘맛있다-쉽다.’ 그리고 이것은 ‘좋은 것’이라는 욕망의 소비 관점에서 현재적으로 찰떡궁합이다. 천재가 종교와 권력에 헌신하며 예술을 생존시켰고 새로움이 예술을 독자적인 것으로 생존시켰다면 이제는 소비 중심의 예술로서 생존하고 있다. 아차! 이런 얘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순백의 화면이다. 누군가에게 순백의 화면은 이미지의 현전이고 또 누구에게는 완전히 현전할 수 없는 배후의 존재이며 회화의 내용에 대한 적대적 행위의 최후의 보루이다. 화가의 스케치가 시작 될 땐 이미 이 세 가지 중 적어도 둘은 기본 값으로 인정하는 셈이다. 이미 있었던 것에서 출발함으로 새로움은 양식의 문제가 되었다. 경계를 나누는 스케치의 문제, 고급 진 육질을 만들어 내는 물감의 층위, 감정을 격동 시키는 붓의 세기 등등은 순백의 화면 위에서 화가의 현란한 기술을 통해 차곡차곡 세계가 된다.

이 기본 값에 투쟁하지 않는다면 이미 익숙한 것을 반복하는 속성을 가질 수밖에 없지만 세계 일반에 대한 비판과 연결되어 우리에게는 아직 세 개의 비단 주머니-이것이 늘 성공했다고 말할 순 없지만-가 남아있다. 비단 주머니 안에는 ‘은폐’와 ‘탈 은폐’라는 멋진 개념적 기예가 남아 있다. 음의 고조만 바뀌었지만 가수가 바뀜으로 새로운 노래가 된다. 세상과 관련된 날 서고 세련된 비판은 내용과 양식 속에 은폐 또는 탈 은폐 방식으로 변주함으로 새로운 작품이 된다. 끊임없이 혼합되는 양식은 영원히 새로울 것이다. 물론 다 같이 함구해야 하는 것에도 동참해야 한다.

‘있었던 것을 반복하지 않는 것이 새로움일까?’, ‘있었던 것을 잘 반복하는 것이 새로움일까?’의 질문은 화가에 있어서 회화가 꼭 새로 워야 할까라는 질문으로 바뀐다. 새로움이라는 말은 너무 직선적이다. 사실 화가는 무한한 과거의 힘과 미래의 힘이 충돌하는 지점이다. 과거로부터 계속된 회화의 논증은 화가라는 현재 안에서 미래의 가능성을 향해 덜거덕거린다. 기본 값 안에서 반복하는 화가에 대하여 영리한 기예의 소유자라 비난 할 수 없는 이유는 화가가 충돌하는 지점이기 때문이다. 아렌트는 이것을 대각선의 힘이라고 명명한다. 무한한 과거의 힘과 무한한 미래의 힘이 어디서 오는지 모르지만 그 종착점은 충돌의 지점이다. 대각선의 힘은 이 충돌의 지점에서 출발한다. 자신의 기원은 제한 적이지만 종착지는 무한하다.

화가는 새로움 이라는 직선에서 무한을 향한 대각선으로 방향 전환을 위해 덜거덕거린다. 작가는 충돌의 지점으로서 무한을 향해 나아가려는 대각선의 힘을 위한 지연 행위를 한다. 아렌트는 이런 대각선의 힘이야 말로 사유 활동에 대한 완벽한 은유라고 말했지만 이것이야 말로 예술 생산 활동의 완벽한 은유일 것이다. 이것이 두 번째 비단 주머니이다.

나는 이 충돌의 지점을 작가인 본인에서 화면으로 돌린다. 이마쿼크-이미지의 최소단위-는 순백의 화면위에 존재할 수 없다. 이것은 과거에 대한 단절에서 시작되어 기원이 요원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마쿼크들은 물질을 매개로 끊임없는 충돌을 일으키기 때문에 순백의 화면위에선 끝없는 에너지의 증폭만을 일으킨다. 따라서 대각선의 힘이 투과되고 있는 면이 필요하다. 제한된 과거와 무한의 힘을 가진 충돌의 지점 말이다. 이것만이 증폭되는 이마쿼크의 물질들과 대칭되어 균형을 찾을 것이다. 이것이 형광면이다. 형광면은 위와 아래, 높이와 깊이가 없다. 창연한 눈부심만 존재하며 일시적이다.

색은 왜곡되며 본연의 색은 삼켜진다. 형광면 앞에 화가는 물감을 얼른 옮기므로 형광면을 덮기에 급급하다. 충돌의 지점으로서의 화가가 방향전환을 위해 지연행위를 한다면 충돌의 형광면 앞에선 자는 안절부절 한다. 형광면과 물질의 충돌의 사건 앞에서 화가는 신을 벗을 지경이다. 형광면 위에 물질로서의 물감들은 미끄러지고 정신을 차릴 때 쯤 잔잔해진 형광면위에 물질로서의 물감들이 만들어낸 덩어리가 발견된다. 

눈부심으로 인한 혼미함은 물감들의 간격에 반비례한다. 혼미한 정신 속에 물감은 행위이자 과정의 흔적이다. 디디-위베르만은 이미지는 고유한 운동성을 지닌다고 하는데 혼미한 정신 속에서 행해진 행위야 말로 이미지를 향한 순수한 운동일 것이다. 그리고 모든 것은 운동하며 운동하는 모든 것은 흔적을 남긴다. 이 말은 물리학적으론 입자들을 뭉치게 하는 힘들 또한 매개 입자를 갖는 다는 것이고 칸트의 말을 빌리면 숭고의 감정으로 인한 마음의 운동(동요) 즉 불쾌일 것이다. 물리적 관점에서 이마쿼크와 물감의 관계와 충돌의 지점으로서의 형광면과 숭고의 감정과의 관계, 즉 이 두 그룹의 기묘한 공존에는 관통하는 것이 있다. 물질과 숭고는 운동(힘)에 의해 공존된다는 것이다. 형광면 위에 물감이 운동하고 있다.

그렇다면 화가는 무엇을 하는가? 판단하지 않고, 아니 그 전에 운동(그리기)은 시작된다. 판단이 사라진 있는 그대로의 상태의 그리기만 있을 뿐이다. 대상이 없는 그리기, 목적이 없는 그리기, 주체가 없는 그리기의 상태는 그리는 행위의 멈춤(pause) 상태이고 오직 그리기의 이전의 흔적들만을 수반한 그리기이다. 운동의 진행, 정지, 진행, 정지를 반복하는 그리기는 지속적으로 깜박거리며 리듬을 만든다. 이 리듬이 쌓이면 오히려 그리기(운동)가 쫓아간다. 형광면이 사라지고 화가의 혼미한 정신이 잦아들며 손과 어깨에 고통이 느껴질 때 쯤 화면에는 덩어리들이 주름지어 발견된다. 결국 화가는 물감을 옮기는 가련한 애쓰는 자이며 이런 화가의 그리기는 주인 없는 그리기이다.

그나저나 세 번째 비단 주머니는?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