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그림》 전시전경 © 미메시스 아트 뮤지엄

안두진 작가의 ‘그런 그림(That kind of picture)’은 이런 그림이다. 일견 나무, 바위, 바다를 닮은 도형들이 친숙하게 다가오지만 전례 없는 색과 중력을 거스르는 모양이 낯선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네모나게 틀 지어진 캔버스에 한정되어 있지만 작게 그려진 인간 군상과 드넓게 펼쳐진 우주적 풍광의 대비가 테두리 너머의 광활함을 상상하게 하며, 화면을 빈틈없이 채운 형광면에서 치밀함이 엿보이는 동시에 물감의 크랙과 느슨한 붓질에서 관용이 느껴지는 그림. 무엇을 그렸다고 유추하기조차 어려운 이 그림에 대해 작가는 의도와 주관이 배제된 ‘주인 없는 그리기’의 수행이자 결과물이라 말한다. 자연이 물질을 구성하는 방식을 모방함으로써, 작품은 무언가를 지칭하거나 설명하지 않고, 그저 존재하는 것으로 제 몫을 다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작가의 개입을 최소화하려는 안두진의 태도와는 달리, 작품이 걸린 모양새는 작가의 힘(또는 큐레이터의 힘)이 과도하게 가해졌다는 인상을 준다. 〈Silence〉(2010)가 그 예다. 3층 전시장 입구에서 관객을 맞는 본 작품은 사람의 머리 높이보다도 한참 높은 곳에 걸린 데다 화려한 색채까지 겸비해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를 연상시키며 성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러한 상황은, 작가가 그토록 꺼렸던, 회화가 구체적인 대상을 흉내 내는 모습처럼 보인다.

“회화가 ‘스스로’의 방식으로 가능성을 가진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한, 창작자의 개입을 최소화하고자 한 안두진 작가는 왜 다분히 의도적인/의도적으로 보이는 배치를 취한 것일까? 이는 정녕 작가의 ‘고의’로서 ‘주인 없는 그리기’의 예외를 만드는 ‘실수’일까? 

오점이라 읽힐 여지가 다분한 이런 배치는 역설적으로 화가와 그림이 누구 하나에게 종속되어 있지 않고 독립적으로 존재함을 강조하며, 그것들이 각자 ‘회화(예술작품)’라는 ‘순간’, ‘구성’, ‘집합’에 기여하고 있음을 깨닫게 한다. 작품 〈Silence〉의 배치와 그에 따른 감상을 보기에 보자. 작품이 높이 걸린 탓에 이를 보기 위해서는 고개를 젖혀 전시장 위쪽을 바라보아야 한다.

이러한 자세를 유도하는 작품 배치는 숭고함을 유발하는/유발하고자 하는 그림의 내적 논리를 보강한다. 역으로 그림 안에 그려진 그림들로 하여금 캔버스 안에서 만들어지는 숭고는 우리로 보는 제스처를 요구하는 작품의 배치를 수긍하게 한다. 이렇게 작가는 손이 닿을 수 없는 작품의 위치를, 오묘하면서도 거룩한 작품의 분위기를 납득시키는 가운데, 요소들의 ‘있음’ 집으며 회화의 영역을 캔버스 바깥으로까지 확장한다.

그 맞은편 빨간 점들이 종종 박힌 검은 하늘을 공유하는 〈점과 점들〉(2013), 〈닮은 것과 닮은 꼴〉(2019), 〈(쿵! 찌익)-(움직임과 검은 사각형)-( )〉(2022), 전시 말미에 일직선상에 놓였지만 서로 다른 간격을 갖고 걸린 ‘(촤락)-(풍경위에 풍경)-( )’(2022) 시리즈, 〈Gabriel(no.1)-검은 원과 검은 사각형〉(2022), 〈Gabriel(no.2)-검은 원과 검은 사각형〉(2022) 또한 제작 시기보다도 시각적 유사성을 토대로 한 큐레이팅의 산물로서, 작품과 작품 간의 연결성과 리듬을 찾아내는 관객들을 있게 한다. 그리고 그때의 연결성과 리듬은 다시, 그림들의 반복과 차이의 타당성이, 사각 틀에 선행한 자연 법칙이 관장하는 색, 형태, 질료의 가시적인 당위성이 된다.

레비 R. 브라이언트는 모든 객체들이 독립적으로 존재하기에 그들이 동등하다고 했다. 이는 모든 객체가 동등하게 여겨져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어떤 객체도 다른 한 객체에 의해 구성될 수 없다는 뜻이다. 앞선 경우에서 작가는 색, 형태, 분위기, 질료 나아가 캔버스의 위치, 관객과 같은 캔버스 안팎의 요소들이 만날 수 있는 촉매제 역할을 자처하며, 그것들의 경계가 명확하다는 사실을 각성시키는 가운데, 자신 또한 그것들의 힘겨루기를 조장하는 하나의 독립적인 인자임을 강조한다.

안두진과 별개로 회화를 이루는 수많은 요소가 있고, 그 요소들이 맞부딪히며 운동한다는 현상을 명확히 하고자 배치라는 카드를 꺼내들었던 것이다. 이처럼 저자의 죽음 이후 화가라는 존재의 위기감은 모든 것과 동등해지는 것으로 극복된다. 이때의 동등함이 영점조정이나 사라짐으로 왜곡되지 않도록 그는 끊임없이 실험을 이어나간다.

안두진 작가는 “무엇이 되는 것이 중요 한 것이 아니라 방식에 참여하는 모든 요소와 창작자가 동등한 요소가 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여기서 ‘동등함’이 ‘중요도(기여도)’ 보다는 ‘존재’ 그 자체라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다시금 강조하자면, 안두진 작가의 그림은 그냥 그림이다. 작가의 의도를 배태하고 있는 그만의 귀속품이 아니라, 그와 멀찍이, 때로는 가까이, 구태여 현존한다는 부연 설명 없이도 그 자리에 있는, 그냥 그림인 것이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