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흥미롭게도, 정수진의 회화는 서구중심주의와 망막중심주의의 공모가 체계화한
사물의 ‘단일한’ 질서에 질문을 던지고, “몹시 상이한 자리에 머물러 있고, 놓여 있고, 배치되어 대립하기도 했던”6 ‘특정한’ 사물과 ‘특정한’ 시간이
함께 할 수 있는 ‘공통의 바탕/장소’로 자신의 화면을 내어주고 있다. 이는 냉전 체제의 와해와 세계질서를
재편하는 전지구화의 격변, 이에 따른 동서(東西) 사물 질서, 체계의 충돌과 갈등을 한국, 시카고 등에서 목격한 청년 예술가의 일상과 경험, 끝끝내 본질을
탐구하려는 변증법적 태도와 관련이 있는 것 같다.
그러하기에 정수진의 회화는,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주(主),
종(從) 관계의 전통적인 구도와 원근법의 공간을
보여주지 않는다. 이러한 개성적인 객체의 독립된 자유의지는 자칫 혼란과 불안을 유발하지만, 각 개체의자율이 보장되고 전체의 구조가 깨어지지 않는 조화로운 이상향을 꿈꾸며 작가는 조정자의 위치에서 끊임없이
작품을 구성한다.”7
우리를 둘러싼 시공간의 다양한 물리적 환경 변화는 그녀의 회화 속 다차원의 ‘특정한’ 사물들의 배열 방식과 공명하고 있다. 보르헤스가 상상한 중국의 어느
한 백과사전처럼, 정수진의 백과사전 사물 항목을 상상해 보자. 그의
회화 속 사물들은 그 어떤 위계도 순서도 없이 때론 줄쳐진 그리드 위나 겹쳐진 다차원의 평면 위에 서로와 무관하게 독립적으로 배열될 뿐이다.
약병, 빵-빨조각, 양파, 서양배-한입 먹은
배, 밤톨 뒷덜미가 보이는 짧은 머리칼의 두상, 호두-뇌, 미니 건물 미니 건물 단면, 아이스크림
꼬깔, 눈 결정, 흘러내리는 물감, 구멍, 눈-눈동자, 초콜릿바, 유리잔을 감싸는 코르쉐 부분, 나무 막대, 각목, 토끼-하마, 리본-보타이, 나비, 브라운 컬러머리칼의 남자얼굴 등이 정수진의 회화가 보여주는
사물 항목들이다. 이 항목들 가운데, 나선형 선, 얇고 곧은 선, 원 등의 조형 기호와 반짝임, 길게 늘인 핑크색 다이아몬드 마름모, 팩맥처럼 보이는 원형, 윙크하는 유쾌 소년 등의 약호화된 만화적 형태들이 코드로 더해질 수 있다.
시각과 인식 사이: 다차원적 평면성
사실 공통의 바탕/장소 속 ‘이상한’ 사물들은 정수진이 오랜 시간 연구하여 구축한 이론과 관계 있는 세계의 이미지다. 그녀는 지난 2014년, 자신의
회화세계를 독해할 독자적인 이론 체계서 『부도(不圖)이론: 다차원 의식세계를 읽어내는 신개념 시각이론』(부도지, 2014)을 출판했다. 이 이론은 성이심(成以心)의 『성명설도(性命說圖)』에서 설명하는 “부도위도(不圖為圖)”라고 한다. ‘부도위도’는 ‘그림이 아님을 그림으로 삼는다’
혹은 ‘그림 아닌 것을 그림으로 한다’로 번역할
수 있다.
이것은 일차적으로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빈 공간으로 보이지만, 곧 “그리지 않는 것을 그리는 것”이다.8 이 논리에 따르면 ‘부도위도’는
그림 아닌 것과 그림 사이의 역설적 관계를 의미한다. 이는 정수진에게 지금 여기 ‘존재하는 사물’을 본다는 ‘시각’(아직은 그림 아닌 것)의 문제가
‘인식’(정수진의 그림)이라는 차원으로 ‘전환된 사물’ 사이의 관계일 수 있다. 시각과 인식의 관계는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과 서양, 동양 등의 공간, 한국어, 영어, 불어 등의 언어에 따라 전혀 다른 형상, 다른 차원으로 전개되는 것이다.
이 같은 추론이 가능한 것은, 작가가 이 이론을 통해 우리가 눈으로 직접 보는 현실계와 평면 속에 등장하는 형상계에 대한 범주를 구분하고, “형상계는 인간의 관념이 이미지로 존재하는 세상이다. 사물이 존재하는
세상이 아니라 사물을 바라보는 수많은 관점이 존재하는 세상”을 의미한다고 설명하기 때문이다.9 그는 단순하게 자신의 감정이나 느낌을 그림 속에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다양한 시각과 차원의 전체상, 그 ‘구조’를 주목하는
것이며, 이는 다시 말해서 다차원의 구조, 다차원의 전체상임을
드러내고 있다.
정수진의 회화세계를 강렬하게 각인시켰던 작품은 균질한 밀도로 시선을 끌었던 ‘뇌해(腦海)’ 연작일 것이다. 숨막힐
듯한 밀도로 밀어붙이던 작품들은 2021년 전후하여 제작된 ‘Pink
Sea’, ‘Observer’ 연작 등에선 보다 대담한 화면 구획과 반복적인 패턴, 기호처럼
처리된 눈, 눈동자와 물질성을 강조한 물감/색채 덩어리가
등장하고 있다. 이들과 더불어, 인간 두뇌를 닮은 호두-호두인 듯한 뇌, 게임 캐릭터 팩맨(Pac
Man) 같은 토끼-토끼 닮은 팩맨, 토끼얼굴의
오리-오리 같은 토끼 등의 이중형상의 출현도 흥미롭다.
이질적인
사물들을 연결하고 배치하는 데페이즈망 기법의 적극적 활용 역시 정수진 회화의 예술적 현재성을 고양시킨다. 세밀하게
그린 구상적 형상들의 파편과 배열, 2차원적 입체와 납작한 기호의 접합, 모호한 정체의 이중형상 등은 초현실적 환영 세계를 개시하고 있다. 작가가
말하고자 한 문제, 즉 ‘보는’(시각) 것과 ‘인식’하는 것 사이에 존재하는 수많은 낯선 차원은 보다 선명하게 가시화되고 있다.
이는 분명 오랫동안 탐구하며 구축해 온 작가의 시각이론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 작가의
진정성 있는 변증법적 논리싸움이 매력적인 예술작품에의 황홀한 미적경험을 방해한다고 할지라도, ‘특정한’ 여러 사물과 여러 시간이 겹쳐진 다차원적 회화는 결코 같을 수 없는 시각과 인식의 관계를 반성적으로 성찰하게
하는 ‘공통된 바탕/장소’로서의
의미를 확보하고 있다.
1 이영철 「복잡성의 공간, 불연속성의
시간: 《’98도시와 영상-의식주》
展의 기획과 연출에 관하여」《도시와 영상-의식주》 카탈로그, 《당신은
나의 태양》 카탈로그 2005 토탈미술관 p.143 재인용
인용문의 볼드 처리는 원문과 상관없이 이 글의 주요 키워드로 강조하고자 처리하였다
2 “자신의 꿈과 함께 끊임없이 연상되는 공상과 자신의 생활 주변에
존재하는 수많은 사물들, 활동하는 공간들, 즐겨 읽던 만화책들을
주인공 삼아 그녀만의 바다(뇌해)에 자유롭게 펼쳐 놓는다. 그들은 […] 서로에게 영향받지 않는 독립적인 사물[…] 작품에 등장하는 술 마시는 여자(작가)를 째려보는 오징어 한 마리, 끊임없이 연상되는 상념(想念)을 암시하는 양파, 슈퍼마켓
진열대의 소인(小人)들 인간의 뇌를 닮은 호두 알 한 개까지
모두 그녀의 그림 속에서 완전한 자율적 존재[…] 그러기에 그녀의 작업은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주(主), 종(從) 관계의 전통적인 구도와 원근법의 공간을 보여주지 않는다. 이러한
개성적인 객체의 독립된 자유의지는 자칫 혼란과 불안을 유발하지만, 각 개체의 자율이 보장되고 전체의
구조가 깨어지지 않는 조화로운 이상향을 꿈꾸며 작가는 조정자의 위치에서 끊임없이 작품을 구성한다” 강승완
《젊은 모색2000– 새로운 세기를 향하여》 전시 리플렛 글 (국립현대미술관, 2000)
3 미셸 푸코 지음 이규현 옮김 『말과 사물』 민음사 2012 p.7
4 위의 책 p.9
5 전근대 중국의 백과사전류라 할 수 있는 『삼재도회(三才圖會)』 (전 108권, 1609)나 『설부(說郛)』(전 100권, 1407경)는 각각 그 책 나름의 질서가 있었다. 사전의 사전적 정의에 충실하게도, 그 책 속 각각의 항목은 합당한 근거로 인해 그 자리에 존재했다
6 미셸 푸코 앞의 책 p.9
7 조상일 『대각선논법과 조선역』 파주: 지식산업사 2013 p.24, 정연심「정수진의 그림 겹쳐진 차원, 의식의 파동」 《정수진 개인전-부도위도》S2A갤러리 2025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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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원고는 (재)예술경영지원센터 ‘2025 한국미술 비평지원’으로 진행하는 특별 기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