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수진 전에는 회화에서는 잘 사용되지 않는 정사각형 캔버스가 눈에 많이 띈다.
50x50cm, 100x100cm의, 화면이기 보다는 기하학을 생각나게 사각형은 다양한
것을 담는 그릇에 나름의 통일성을 부여한다. 무엇인가를 들여다보는 창이기 보다는, 장기판이나 바둑판처럼 엄격하게 한정된 게임 판에서 보이지 않는 수직 수평의 축을 따라 시각적 문법이 생성되고
변형된다.
정수진의 작품에는 필연과 우연의 관계처럼, 엄격한
구조 안에서의 자유로움이라는 역설, 즉 다양성을 창출하는 이질적 논리가 있다. 거기에는 필자가 2000년에 사루비아 다방에서 처음 보았던 정수진의
《뇌해(Brain Ocean)》전처럼, 호두알 같은 작은
공간(뇌)에 바다와 같은 실재가 있다. 자유로운 예술이라 함은 현실적으로 예술이 자유롭기 보다는 예술이라는 한정된 시공간 속에서 둘 수 있는 무한한
게임의 수를 말한다. 예술은 놀이처럼 한정된 시공간 속에서 자유롭지만,
유비를 통해서 다른 차원으로 확장될 수 있다.
보는 사람도 끼어들고 싶을 만큼, 그 안에서 남부럽지 않게 잘 놀아야 하는 이가
바로 예술가다. 《뇌해》전 이래로, 줄기차게 샘솟는 정수진의
마술적 놀이판은 경이로울 따름이다. 한국 미술계에서 특히 ‘개인의
세계’에 빠져있는 젊은 작가들을 중심으로, 도상들이 우글우글하면서
파편적이고 분열적인 서사들이 가득한 회화들이 많이 발견된다. 정수진은 그 효시격인 작가지만, 그들과의 차이점은 현격하다.
결국은 동어반복처럼 보이는 우연적 입자로의
와해인가, 아니면 필연과 상호작용하는 힘 있는 우연인가의 차이이다.
‘다차원 존재의 출현’(전시부제), 즉 다양성이
가능하려면 간헐적 우연만으로는 힘들다. 힘찬 필연이 받쳐줘야 한다. 여기에는
수학이나 기하학, 또는 언어학 같은, 보다 보편적인 문법에
대한 취향이 요구된다. 작가에게 필연은 그림에 대한 끝없는 연구와 그린다는 행위 그 자체로부터 발원한다. 필연과 우연의 관계는 의식과 무의식의 관계와 마찬가지이다.
가령 작가는 무의식과 혼돈을 바로 연관 짓는 것이 어색하다고 말한다. 정수진이 관찰한 바에 의하면, ‘무의식은 정교한 논리체계를 가지고 있고 그 체계를 따라서 움직이고’ 있다. 다만 의식이 ‘무의식의 논리 체계를 이해할 수 없어 혼돈으로 착각하고 있을 뿐’이다. 무의식이 의식과 연동하듯, 감각적, 지적 즐거움과 깨달음을 위해 작가는 필연의 망을 부지런히 짜왔다.
전시와 더불어 출간된, 시각언어의 논리에 관한 책 [부도(符圖)이론: 다차원 의식세계를 읽어내는 신개념 시각이론]을 보면 정수진은 매우 논리적인 작가이다. 부도이론이란, ‘논리적 사고 체계를 시각적으로 보기위한 이론’이며, 이 시각논리의 특징은 ‘옳고 그름이라는 판단체계로 논리를 전개하지 않고, 같음과 다름이라는 판단체계로 논리를 전개한다’는 특징이 있다. 여기에서 논리라 함은, 사이비 교주나 어느 날 갑자기 득도한 사람처럼 어떤 자의적 의견 한 자락을 교조적으로 강조하거나, 여기저기에서 엉성하게 그러모은 상식 백과사전 같은 박식함이 아니라, 시각에 관한 독자적 이론이라 할 만한 것이 피력된다는 뜻이다.
정수진이 말하는 ‘부도’란 다차원적인 형상에 대한 일종의 도해적 기호(graphical symbols)처럼 보이며, 그림은 이 독특한 기호법의 산물일 것이다. 3차원이라는 일상적 차원을 넘어서면 가상의 차원에 접어들며, 화가는 기하학자처럼 무한으로 뻗어나가는 패턴과 다면체를 탐구하게 된다. 그림과 관련을 가지는 그 텍스트는 어떤 자료가 한 형식에서 다른 형식으로 변환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방식이다.
수학적인 두뇌를 가진 면밀한 연구자라면 정수진의 복잡한 회화를 그 기본 구성 요소로 분석한 후, 간결한 시각적 부호나 도식으로 변환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더 나아가 차원의 수를 더해가는 어떤 비밀스런 경로를 파악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정수진의 그림이나 책은 어떤 세계에 편집증적으로 빠져있는 부류에서 발견되는 일정한 체계 내에서의 정합성이 발견된다. 종교처럼 믿느냐 안 믿느냐의 차이를 넘어선다면, 모든 믿음에는 나름의 정합적 체계와 논리가 있다. 종교와 비교하니 편향된 것 같지만, 한 시대가 선택하는 과학적 패러다임 또한 마찬가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