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ihye Park, Practical Work Yoga, 2015 © Jihye Park

프랑스어에 à peine이라는 부사구가 있다. 이 구문의 핵심은 peine(고통)이다. 따라서 à peine의 어원에 가장 가까운 의미는 ‘간신(艱辛)히’ 이다. 그리고 우리말과 마찬가지로, 고단한 노력은 목표와의 거리를 좁히기 위한 것이라는 전제 하에 그것은 ‘가까스로’를 의미한다. 그런데 이 표현이 쓰인 문장을 우리말로 번역하다보면 난감한 경우가 생긴다. 그것은 문맥에 따라 어떤 때는 ‘가까스로 성공했다’는 안도감을 나타내지만, 다른 때는 ‘기껏해야 ~ 밖에 안된다’는 열패감을 내포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표현을 번역할 때는 먼저 행위의 성패를 따져봐야 한다. 그래서 문장의 주체가 결국 성공했다는 것인가, 실패했다는 것인가? 말의 외연은 기준선에 가깝다는 좌표를 나타낼 뿐이지만, 내포는 그 기준선에 닿은 자와 닿지 못한 자를 기어코 나누라고 요구한다. 이 표현이 고통에서 시작해서 목표에의 접근을 의미하다 급기야 그 의미가 통하려면 성패가 구분되어야 하는 상황은 얄궂게도 이 곳의 젊은 작가들의 삶과 닮았다. 박지혜는 작가로 살아가는 과정에서 겪는 이 ‘간신히/가까스로/기껏해야’의 복잡한 정서를 물리적 공간과 경제적 맥락 속에서 풀어놓는다.


제약은 나의 힘

우리의 미술환경에서 이제 막 한두 번의 개인전을 거친 작가가 지속적이고 안정적으로 작업을 할 수 있는 작업실을 갖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가까스로 (대부분 전용이 아닌) 작업공간을 갖는다 해도 고민은 계속된다. 작업실에서 작품을 만든 뒤 그것을 전시장으로 운반해서, 전시를 하고 나면 그것을 별도의 창고로 옮기거나 판매하지 않는 한, 다시 작업공간으로 가지고 돌아와야 한다. 다시 말해 작업실이 충분히 크거나 용이하거나 가깝지 않으면 또 다시 엄청난 비용이 추가된다. 그래서 박지혜는 철저한 계획과 계산을 통해 이 조건 내에서 가능한 규격을 초과하거나 비용이 추가되지 않도록 작업을 한다.

예를 들면 작품을 얇고 가벼운 재료로, 작은 단위를 규칙적으로 반복할 수 있는 형태로 만들어 포갤 수 있게 함으로써 작가가 직접 운반하거나, 전시 후 폐기할 수 있게 한다. 2010년부터 박지혜가 자주 사용해 온 재료는 골판지나 크래프트지 같은 형태를 만들기 용이한 종이인데, 그것을 완벽하게 계산된 도면에 따라 자르고, 이어 붙여 구조를 만들고 에폭시나 우레탄을 입혀 전혀 다른 재료처럼 보이는 표면을 만들어낸다. 박지혜는 스스로 처리하기에 좋은, 심지어 “버리기에 완벽한” 작품들을 만든다고 말하곤 한다. 현재의 경제적 조건에 간신히 맞추고, 있는 만큼의 공간에 가까스로 밀어넣는 작업을 하지만, 그 결과물이 기껏해야 제 자리로 돌아올 수밖에 없는 현실에 박지혜의 작업은 최적화되어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박지혜의 작업은 제약을 없애거나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강박에 가까울 정도로 거기에 종속된다는 점에서 수행적이다. 일일이 종이의 치수를 측정하고 계산해서 손으로 잘라 붙여 매끈한 구조를 만드는 일은 질릴 만큼 노동집약적인데다, 그런 작업들을 철저하게 주어진 공간 안에서 제작, 전시, 보관 혹은 폐기할 수 있게 함으로써 예술활동의 제약 자체를 부각시키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련의 작품들을 맞닥뜨리면 그런 수행적 의미가 전부라고 요약하기에는 눈 앞에서 읽어낼 것들이 너무 많다. 시선은 어느 새 작가를 둘러싼 환경에서 작품 자체로 옮겨간다.


감각의 배반과 제한

박지혜는 종이로 공장이나 공사현장 등에서 볼 수 있는 크레인, 저장탱크 같은 어마어마하게 크고 무거워보이는 금속 구조물이나 사물들을 작게 축소해서 모형처럼 만드는데, 정교하게 칠한 안료 때문에 이 종이 구조물은 꽤 무거워보인다. 하지만 작가는 그것을 다시 가뿐히 매달거나 아슬아슬하게 설치해서 가벼움을 강조한다. 재현된 대상의 가늠할 수 없을 정도의 어마어마한 크기와 무게의 이미지를 축소를 통해 제거한 다음, 다시 색과 표면으로 무거운 원재료처럼 보이게 만들고, 또 다시 실제의 가벼운 무게를 눈치채도록 설치해서 이미지를 전복한다. 대상, 질감, 크기, 무게는 이내 기대를 저버리고 엎치락 뒤치락 서로를 배반하면서 마그리트의 파이프처럼 읽어낼 거리들을 만들어낸다. 건물의 복도에 육중하게 살랑거리는 〈Chain〉(2011)이나 방파제의 테트라포드를 와르르 띄워 놓은 〈Overflow〉(2012-13)가 대표적인 경우이다. 

박지혜의 감각에 대한 관심은 2013년의 첫 개인전 《붉은 방》에서 가장 첨예하다. 작가에 따르면 ‘붉은 방’이라는 제목은 눈을 감은 상태에서 느껴지는 색과 공간의 감각에서 착안했다고 하며, 실제로 전시장에는 검은 선들 사이로 붉은 빛을 뿜어내는 조명들이 ‘짐승같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 전시의 작품들은 주로 종이와 우레탄을 사용한 이전의 작품들과 꽤 달라보인다. 일부 작품에서는 커다란 구조물을 축소하여 모형처럼 만드는 작업 방식을 고수하고 있지만, 종이-우레탄 구조물에 비해 훨씬 언어화하기 힘든 감각들을 자극한다.

전자에서는 두드러진 감각을 설명하기 위한 단어들을 추려내기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대부분 ‘큰’, ‘작은’, ‘무거운’, ‘가벼운’ 같이 형태를 규정하는 형용사 수식어들인데다, 단어 간의 대비도 분명했기 때문이다. 반면 이 개인전의 작품들은 몇 단어로 쉽게 묘사되지 않는다. 특히 전시실 모서리에 단번에 묘사하기 힘든 기묘한 유기체의 일부 같은 형태로 자리 잡은 〈Red_faint〉(2013)는 작가가 신체적 한계에 이르러 정신을 잃었을 때의 감각을 애써 기억해내서 시각화하려고 한 작업이라고 하는데, 그만큼 형용하기가 어렵다. 종이-우레탄의 감각이 선명하게 응결되는데 비해, 붉은 방의 감각들은 구름처럼 흩어진다.  

하지만 외견상 전혀 다른 이 작업들을 다시 묶어주는 것은 박지혜 특유의 ‘빠듯함’이다. 《붉은 방》작업들도 한계 상황에서 극히 제한된 감각을 어떻게든 붙잡으려 한다는 점에서 아슬아슬하긴 마찬가지다. 작업의 동기가 달라졌을 뿐 제약을 감각의 힘에 의존해 드러내겠다는 일관된 관심이 보인다. 실제로 ‘작업과정에 끼어드는 현실적 제약’과 ‘제한된 감각’을 직접 결합한 작품도 있는데 〈헤아릴 수 없는 애정과 관심〉(2015)이 그것이다. 이 작품은 “무보수”라는 단어를 색각이상 검사를 위한 알록달록한 이미지처럼 만든 것인데, 작가는 실제로 전시 과정에서 겪은 부당한 경제적 제약을 출발점으로 삼았다고 한다.

그는 이 소통불능의 상태를 신체적 감각을 매개로 전달하려고 한다. 관객은 처음에는 단어를 읽어내는 데만 집중하지만, 점차 세심하게 왜곡한 이미지의 윤곽이며 애써 고른 액자, 컬러 이미지와 대비되는 70장의 가독성 없는 무채색 출력물들에 이르기까지, 작가가 감각적 소통이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로 나뉘는 경계에서 의미를 발생시키려고 부단히 노력한 흔적을 보게 된다.


작품-신체-텍스트

박지혜가 사용한 재료와 매체들이 다양하다 보니, 그의 일관성을 작품의 외부, 즉 미술제도나 예술노동에 대한 문제제기에서 찾으려 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하지만 달리 보면, 작가는 그렇게 변수나 실수를 허용하지 않는 현실에 처해 있기 때문에, 자신의 신체와 작품 모두를 물리적 공간을 차지하고 버텨내야 하는 하나의 몸뚱이로 인식하는 내적 일관성을 갖는다. 조각을 하는 작가에게 운신의 폭이 좁다는 말은 은유이면서 동시에 글자 그대로 공간적 의미로 이해된다. 그리고 그런 ‘몸 하나 둘 곳 없음’을 신체적 감각을 통해 보여주는 것은 자연스럽고 효율적이기까지 하다. 작가의 신체를 작품과 연결하는 태도는 최근 작가가 집중하고 있는 텍스트 작업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요가교본처럼 만든 소책자 〈실전작업요가〉(2015)나 텍스트 설치인 〈헌신의 요가〉(2015)는 작업을 하는데 필요한 특정한 동작들을 자세히 설명함으로써 작가의 신체를 자꾸만 불러낸다.

이 작품을 위해 박지혜가 텍스트 혹은 책이라는 매체를 선택했다는 것은 조금도 놀랍지 않다. 책의 몸은 공간적 제약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울 뿐 아니라, 작가가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종이로 되어있지 않은가. 애초에 편집은 공간 속에 의미요소들을 적절하게 배치하는 조각작업이 아니던가. 게다가 텍스트는 언어와 이미지의 무한한 조합을 열어놓으며 그 어떤 매체보다 큰 효율을 자랑하지 않는가. 두 번째 개인전이자 텍스트인 〈홀리홀리홀(Wholly Holy Hole)〉(2015)은 작품-신체-텍스트에 대한 한 덩어리 사유방식의 절정을 보여준다.

가벼운 종이나 모형재료들로 엄청난 노동력을 쏟아 부어 동그란 구멍 형태의 구조물(〈Nightmare_the white castle〉(2014-2015))을 만들던 작가는 그 비효율의 낭떠러지에서 오는 현기증과 온몸이 빨려들어가는 듯한 신체감각을 기반으로, “구멍에 대한 경외와 탐닉”에 관한 페이크 다큐를 써내려간다. 웹브라우저의 아이콘부터 도너츠에 이르기까지 온갖 구멍 형태에 대한 음흉한 상상의 텍스트들은 끝간 데 없이 황당하게 뻗어나간다. “상상은 공짜”라는 그 진부한 표현이 어떻게든 몸을 뻗을 구석을 찾는 박지혜에게 적용되었을 때는 어쩐지 예사롭지 않은 쾌감을 수반한다.  

다른 한편, 감각으로 텍스트의 구성 방식을 휘저어놓는 작품도 있다. 〈헤아릴 수 없는 애정과 관심〉에서는 한 단어의 가독성이 문제였지만, 〈완벽하게 쓸모없는〉(2016)에서는 플립 시계 형태의 단어판들이 짝을 이루는 방식이 문제가 된다. 시계판이 넘어가면서 단어들은 불일치한 조합을 이루지만 그것은 무의미한 것으로 넘기기에는 작가가 처한 상황을 너무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구문(이를테면 “완벽하게 쓸모없는”)이 된다. 여기서 시계판이 넘어가는 감각적 효과는 결코 부차적이지 않다.

〈Still Here You Again〉(2014)에서도 빛을 이용해 단어들이 반복적으로 나타났다 사라지게 함으로써 조합된 구문이 달라진다. 앞서 작가가 유독 “형용사적” 감각에 예민하다고 한 바 있는데, 추측컨대 그것은 속성, 성질을 규정하는 수식어(attribute)가 휘두르는 일종의 완력 같은 것을 감지했기 때문인 것 같다. 박지혜가 단어를 다루는 방식을 보면 규정으로부터 나아가, 규격, 규칙, 보편, 표준 등의 절대적 기준으로 정해진 것들에 대한 회의가 엿보인다(이것은 이제 써나가기 시작한 〈표준의 탄생_intro〉(2016)이라는 소설의 미래의 내용이 될 것으로 보인다).

작가는 그 부과된 기준들에서 절대 벗어나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면서 그것을 ‘박지혜 식’으로 번역한다. 이번 아트 스페이스 풀의 전시《공감오류: 기꺼운 만남》에서 선보인 〈순수한 소진_일시적 구조재〉(2016)는 일정한 규격으로 생산되고 (경우에 따라 묶음으로) 판매되는 합판과 각목을 구입하여 치수를 정교하게 계산해서 자투리가 조금도 남지 않도록 잘라붙여 만든, 다른 용도는 없는 정육면체 덩어리들이다. 그리고 각 정육면체는 작가가 양팔로 들어올릴 수 있을 정도의 무게와 크기로 되어 있다. 세상이 정해준 치수를 자신의 몸에 맞추되 아무런 잔여물도 남기지 않는 이 치열하고도 무용한 행위는 묘하게 서글프다.

그러나 그 덩어리들은 예술가로 살기의 빡빡함을 드러내는 척도가 되면서 세상에 눈싸움을 걸 듯 오기를 내비친다. 물론 다른 한편으로는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뒤틀리거나 옹이를 드러낸 싸구려 목재들은 허탈함을 가중시킨다. 또 다른 작품 〈순수한 소진_배회하는 상영관〉(2016)은 작가가 예전에 제대로 실현하지 못한 채 보관 중이던 작품의 부품들(축소된 객석 모형)을 이번 전시를 계기로 되살리거나 혹은 써서 없애기 위한 설치이다. 수레처럼 손잡이, 바퀴, 가림막까지 장착한 이 장치는 결국은 다른 작가의 영상들을 보는 데 사용되기 위한 것이다.

어느 정도는 존재감의 경쟁구도에 들어가기 마련인 단체전시에서 이 작품은 엉뚱한 방식으로 존재이유를 찾는다. 작품의 몸은 박지혜의 몸에게 (작업실에서 나옴으로써) 자리를 내주고 다른 작품의 몸에다 잘 맞춰줌으로써 전시장에서 어슬렁거려도 좋다는 허락을 얻는다. 방구석에서 눈총을 받다 밖으로 나와 뭐라도 해보려고 시도하는 한량 같아 혀를 끌끌 차게 되면서도, 그 정교한 조명이며 야무진 생김새에 기특함마저 느끼게 된다. 

이렇게 모아놓고 보니 박지혜의 종횡무진한 매체들을 아우르는 단어가 하나 있다. 라틴어 ‘corpus’는 어원상 신체를 의미하지만, 오늘날 여러 서양언어에서 단어들의 덩어리나 뭉치, 글들을 묶어놓은 책이나 작품집을 의미한다. 물론 박지혜가 서양어의 기원 따위에 관심을 가졌다는 뜻은 아니다(남의 말의 기원은 늘 매력적이고, 늘 피부로 와닿지 않는다). 그보다는 팍팍한 환경에서 작업할 방식들을 찾다보니 박지혜는 자신의 작품을 몸이자 텍스트이자 덩어리로 인식하고, 또 다른 몸과 공존하게 하는 감각적 방법을 찾아냈을 뿐이다.

박지혜는 빠듯한 공간 속에 덩어리를 놓고 고민하면서 안간힘을 써서 어쩌면 허무한 것들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세상이 부과한 규칙들에 대한 삐딱한 항명인 것만은 아니다. 예상 밖으로 이런 생존의 방식은 예술노동의 문제에 국한되지 않는 고전적 조각의 문제들, 즉 신체와 감각과 덩어리와 의미의 문제들을 진지하게 제기한다. 그것은 조각의 역사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졌기 때문이 아니라 박지혜의 몸뚱이를 둘러싸고 비어져 나온 문제들이라 한없이 진지하다. 그리고 그 진지한 문제들이 박지혜가 작가로 살아가도 좋다는 허락을 내려주면서 다시 규칙을 부과한다. 간신히 부질없을 것!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