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llation view of 《Son’s Time 1/2》 (The Museum of Korean Modern Literature, 2022) © Jihye Park

*신경 쓰는 너와 나 아는 적당한 사이: 글의 제목은 《아들의 시간》에 출품된 작품 제목을 조합한 것임

라포르

『어른의 문답법』(2022)이라는 책을 선물 받은 적이 있습니다. 관계에 문제가 생겼을 때 평화로운 대화술로 이를 개선할 수 있는 방법과 관련 사례들을 설명하는 책이었어요. 이 책이 전 목차마다 계속 강조하는 지점은 경청하기였는데, 이렇게 친밀감을 형성하고 경계심을 완화하는 과정을 심리학에서는 라포르rapport라고 하더군요. 논쟁의 소지가 큰 대화를 꺼내기 전 상대방과 라포르부터 형성하라는 건 이러한 책들이 내세우는 주된 주장이기도 하지요. 그러나 책을 읽는 내내 저는 저의 라포르적 시도가 상대에게 효과적이지 않다면, 혹은 상대방이 나에게 라포르를 형성할 의지나 생각이 없다면 어찌할지를 고민하며 책을 덮었어요.

각자의 배려와 친절함이 같은 방향을 본다는 건 늘 쉽지 않은 일이니까요. 물론, 그걸 결국엔 설득해 내어 자신이 원하는 방향을 이루는 게 현대인이 추구하는 성공의 방향이며 그것이 곧 이 책이 소비되는 이유겠지요. 그럼에도 종종 관계에서의 우위를 차지하거나 선점하는 일이 사회 구성원으로서 해야 할 당연한 과제이자 성취임을 강조하는 이미지와 글을 보는 게 참 쉽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저도 그걸 원하기에 이 책을 읽기 시작했겠지만, 결국 끝까지 읽지 않는(못한) 방어적인 선택을 한건 나름의 인생살이를 통해 얻게 된 일종의 포기의 방식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인지 저는 박지혜 작가의 작품이 관객과 형성하는 거리감에 이끌려요. 어떤 작품들은 하고픈 말이 너무 많아 부담스러울 때가 있는데, 작가의 작품은 늘 “이정도가 적당하지 않겠어요”라며 적정선을 먼저 제안하는 것처럼 보였거든요. 그게 흥미로웠던 건 매몰찬 홀대여서가 아니라 굉장히 드물게 조심스러운 발화 방식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내가 속한 세계에서 맺는 관계라는 건 라포르의 마음과 시도로만 해결될 수 없는 것처럼 매우 복잡 미묘한 미로 속을 탐험하는 일인데, 작가는 그 미로에서 얻게 된 균열의 언어와 시점을 들여다보려는 것 같았거든요. 

근대문학관에서 진행되는 개인전 《아들의 시간》 또한 작가가 사용해온 언어들과의 연장선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들의 시간》은 인천이라는 지역 리서치에서 시작하지만, 일반적으로 리서치 형식의 전시들이 가지는 모습과 내용을 발견하기는 사실 쉽지 않아요. 저는 종종 로컬이라는 이름으로 기획되는 프로그램들이 지역의 서사를 신화화하거나, 의도치 않게 중심과 밖이 어디인지를 구분하는 기회가 된 경우를 알아요. 그런데 《아들의 시간》에는 지역에 대한 정의도, 판단도, 심지어는 주민의 인터뷰 같은 데이터화된 결과물도 존재하지 않아요.

시골의 넉넉한 인심이라며 낭만을 역설하거나 혹은 지역소멸의 심각성을 운운하는 대신 그저 각 작품에는 작가 자신이 살던 곳과는 다른 장소와 공간을 방문하며 지각한 분절된 삶과 그 충돌의 감정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었어요. 그렇기에 오히려 각 작품들 사이에는 묘한 긴장감이 흘렀어요. 선택과는 다르게 흘러가는 생의 형태, 떨어져 있는 부모와 자식이 혹은 세대가 서로의 안위를 걱정하며, 신경 쓰며 어색하게 나누는 인사, 아슬아슬하게 유지되는 공동체라는 이름이 가진 팽팽하고도 느슨한 모양 등이 조각에 얹혀 있어요. 아, 지금 당장 보지 못했더라도 괜찮아요. 어쩔 수 없이 만나고, 알게 될 수밖에 없거든요. 


작은 마음 씀

여러 기대감을 배반하면서 시작되는 이 전시의 작품들은 그래서인지 그 내용이 유기적이라기보다는 띄엄띄엄 분절된 것처럼 보여요. 게다가 전시장에는 ‘조심’이라고 적힌 안내판과 종이죽으로 만든 칼라콘이 자꾸 앞을 가로막아요. 그래서 그 작품 제목처럼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어요(〈신경이 쓰인다〉). 그러고 보면 〈적당한 사이〉, 〈메리, 매리와 메리의 매리, 그리고 메리〉, 〈아는 돌〉 등의 제목에서는 애초부터 작품들이 전시를 위해 하나의 키워드로 묶지 않을 거라 단언하는 듯 보여요.

그럼에도 대화 중 발생한 침묵 그리고 세대별 차이를 말줄임표와 빛의 색으로 형상화한 〈시차〉, 조심스레 혹은 눈치 보며 안부를 묻는 연락에 대강 대꾸하는 듯한 〈ㅇㅇ〉등은 다시 작가가 바라보는 세계가 어떤 모습인지를 상기하게 해요. 그래서인지 각자 다른 말을 하는 줄 알았던 작품들이, 마치 반쯤 읽은 소설의 구조처럼 정말 말하고 싶었던 결말을 향해 달려가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저는 작가의 조각들을 볼 때마다 그들이 작가가 쓴 시나리오가 배경이 된 무대에서 서 있는 배우들이라고 생각해요. 작가가 짊어준 언어를 형식적으로 충분히 수행할 준비가 된 배우요. 작가가 그 언어들을 구사하는 방식은 브로타스Marcel Broodthaers나 말라르메Stéphane Mallarmé처럼 언어유희나 풍자의 어법이 아닌, 일상에서 쉬이 사용되는 언어와 문장에서 지각한 미시감을 통째로 사물에 접합시켜 그 둘이 마찰하거나 전복하는 순간을 지켜보는 데 더 가까운 것 같아요. 그건 〈시차〉처럼 선택된 언어와 조형이 일대일 대응을 이룰 때도 있지만 반면 주요한 신(scene)에 다다를 때가 있어요.

예를 들면 〈나의 섬〉에서 청 테이프로 만들어진 작은 성은 〈너의 성〉과 함께 마주보고 있는데요. 견고해보이지만 테이프로 얽어진 껍질이 벗겨지면 섬은 무너질 것만 같고, 정작 있어야 할 상판 없이 밥상의 뼈대만 남은 공간에는 작은 도기로 된 성이 덩그러니 있는 풍경이 부딪혀요. 작가는 이 작품에 ‘굳이 그렇게까지 안 해도 된다’, ‘난 잘있어’,‘아마도 혼자 차려먹을 밥상’, ‘고립’등의 문구를 걸쳐놓고 어떤 장면을 상상하게 해요. 그래서 당신은 떠올리겠죠. 당신의 부모와 당신의 관계를 혹은 그에 상응하는 누군가와의 경계 짓는 대화를. 그 연상 속에서 테이프로 된 유약한 섬(을 흉내낸 구조물)과 검은 밥상 속 보잘것없는 성은 엮일 수 있는 자리를 찾을 거예요. 마음을 쓰는 일의 고마움, 그리고 어려움과 불편함을 인식하면서요. 

아, 저기에는 ‘조심’이라고 적힌 칼라콘이 구겨져 쓰러져 있어요. 당신이 계단을 올라가기 전에요. 그런데 정말 그걸 조심하고 지나가면 될까요 아니면, 그를 일으키고 구김을 펴 다음 사람을 위한 호의를 베풀어야 하는 걸까요. 그에게는 그게 배려일까요? 그리고 그 행동은 이 전시장의 질서와는 무관할까요?


우리의 시간

몇 년 전 작가의 전시에서 로봇 청소기로 된 작품을 본 적이 있습니다. 눈알을 붙인 채 이곳저곳을 부딪혀가며 청소하는 그들을 보며 이상하게 슬펐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나 《아들의 시간》에서나 씁쓸한 웃음을 주는 건 여전하네요. 계단에 올라가 〈적당한 사이〉를 한참 내려다보며 또 그랬어요. 장미꽃 모양을 만든 리본을 받치는 각자 다른 지지대들 말이에요. 언젠가부터 저는 제 의지와 행동을 고되게 하는 상황과 존재들에 대응하는 걸 그만두게 된 것 같아요. 예쁘고 아름답다고 일컫는 걸 모두 같이 만들기 위해 웃으며 리본을 꼬면서도, 그래서 좋은 결과가 나오더라도 각자의 입장은 철저히 다르겠지요.

그래서 《아들의 시간》에 얽힌 언어와 그 ‘배우’들은 마치 거울처럼 우리가 겪은 시간들을 비춰냅니다. 그 혼잡한 언어들을 마주하고 동조하는 게 어려울 수도 있어요. 그럼에도 저는 여전히 앞으로 나아가겠다며 큰 소리로 자신을 숨기는 이들보다 어쩔 수 없다면서도 질척거리는 작은 움직임들에 눈이 가네요. 아마 작가는 거기서 또 발견한 틈을 꺼내어 자신의 언어를 사용해 우리 앞에 내세우겠죠. 그건 또 어떤 삶과, 생존의 이름에 대한 무게를 지닌 채 나타날까요. 인천의 서늘한 겨울 바람이 전시와 묘하게 어울리네요.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