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진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전제나 가정을 실험해본다. 그것은 흙이나 석고 같은 물질에 인공적인 힘을 가하는 방식으로 전개될 수도 있고, 평소 간과하고 있는 편견이나 인식을 몸으로 실행하는 방식으로 진행될 수도 있다. 작가가 가진 재료는 연약하고 변화하기 쉬운 물질이거나, 한계를 지닌 작가 자신의 몸이다. 그러므로 그가 더듬어 가는 방식은 그의 손이 닿는 만큼 최선을 다함에도 단단하고 위대하기보다 다공적이고 연약하다.
작가에게 세상을 인식하는 틀은 추상적이거나 이성적인 사고라기보다 엘리자베스 그로스가 『몸 페미니즘을 향해』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우리의 몸이다. 이 땅에 선 구체적인 개별자는 자신의 사회적, 문화적, 성적인 특수성을 담지한 몸으로써 세계와 마주한다. 그리고 그런 그가 마주하는 세계는 견고히 구축된 세계가 아니라 불안정하고 변화하고 있는 세계이다.
2013년 〈물질 놀이〉에서 작가는 흙과 유리에 인공적인 열을 가하는 일련의 실험을 통해 물질의 변화를 포착하고자 하였다. 과학 실험이 조건과 환경을 통제하면서 가설이 들어맞는지 확인하는 과정이라면, 작가는 이 실험을 통해 생성될 또 다른 물질을 상상하며 가정을 유예한다. 유리를 가열한 첫 번째 실험에서 물질은 액체가 되어 녹아내리다가 다시 굳었고, 수분을 머금은 흙을 가열한 두 번째 실험에서 흙은 수분을 날리며 점차 자리를 잡다가 그 상태로 굳었다. 유리와 흙을 같이 가열한 세 번째 실험에서 두 재료는 자신들의 끓는 점에 따라 변화를 거칠 뿐 서로 융화되지 않는다.
실험이 끝난 후의 물질들이 조형적이거나 미적인 측면에서 탁월한 형상을 띄지는 않는다. 그것은 가뭄을 겪은 땅이나 용암이 흐른 화산 지대의 축소판으로 보이기도 하고, 땅에 오랜 기간 묻혀 있다가 발견된 훼손된 유물처럼 보이기도 한다. 사실 흙과 유리는 서로 ‘사건’의 전후이다. 흙을 고열에서 가공하면 유리가 되고, 유리는 점차 마모되며 흙으로 돌아간다. 흙과 유리는 근본적으로는 같음에도 작가의 실험에서 융화되지 않은 채 개별적으로 남는다. 제3의다른 물질을 상상한 최초의 계획과는 다른 결과이지만, 어떤 것이 변화하고 되어가는 과정을 추적하려는 작가의 태도를 확인할 수 있다.
‘물길’(2015-2016) 연작에서도 〈물질 놀이〉의 실험적 태도를 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 작가는 석고가 물을 만나면 녹는 성질을 활용하여 블록 형태의 석고에 물을 떨어뜨린다. 작가는 그 과정에서 물의 흐름이 석고를 특정한 형태로 만들어 내기를 바라지 않는다. 모든 결과는 우연에 맡긴다. 〈물질 놀이〉에서는 최소의 결과를 바라기도 했지만 여기서 결과는 열려 있다. 그러나 모든 실험이 그렇듯 조건을 통제하는 것은 인간이다.
인간은 물질의 속성을 인지한 상태에서 실험을 수행한다. 결과는 실험자의 계획된 우연 아래 끝을 맺는다. 이 시기 작업노트를 보면 작가 스스로도 이에 한계를 느낀 것으로 보인다. “어느 순간 이러한 작업 방식이 물질적 재료만 바뀌고 있는 것이 아닌가 여기게 되기도 했다. 다시 말해, 이와 같은 방법론이 일종의 고정된 문법처럼 느껴지게 된 것이다.”
이러한 고민이 지속되는 가운데 과도기에 제작된 작업으로 보이는 것이 ‘세계지도’(2019) 시리즈와 〈Into the Grid: Hiding in Public〉(2019)이다. 〈세계지도〉는 구의 형태에 가까운 지구가 2차원의 지도로 형상화될 때 발생하는 왜곡을 드러내는 작업이다. 이를 위해 작가는 지구본의 땅 부분에 요철을 만들고 파란색 물감을 발라 벽면에 굴렸다. 3차원의 지구가 2차원에 펼쳐질 때 특정한 대륙이나 바다가 중심에 놓이는 것과 달리, 이 작업에서 지구는 벽면에 몇 번이고 반복되어 찍히게 된다. 대륙의 모양은 우리가 알고 있는 익숙한 모양이지만 그 반복성 때문에 중심이 없어진다.
한편, 이후 제작된 〈세계지도: 오렌지 껍질 문제〉(2019)는 2차원 지도에서 발생하는 한계를 지적하는 용어인 ‘오렌지 껍질 문제(Orange Peel Problem)’를 문자 그대로 적용해 오렌지 껍질에 지도를 그린 작업이다. 〈물질 놀이〉와 ‘물길’ 연작에서 작가는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과학적 사실을 실험해보았다면, ‘세계지도’ 시리즈에서 작가는 우리의 인식에 의문을 제기한다. 지도의 왜곡에 대해 우리는 어렴풋이 알고 있지만 이에 대한 비판적인 관점을 유지하지 않으면 종종 그러한 사실을 잊게 마련이다.
〈Into the Grid〉(2019)에서 작가는 추상화된 지도에서 벗어나 물리적인 공간에 작가 자신의 신체를 대입한다. 미국 어느 도시의 이방인으로서 문서진은 자신의 신체와 엇비슷한 크기의 직사각 거울을 도시 곳곳에 배치하여 현장에 왜곡을 발생시키고 그 뒤에 몸을 감춤으로써 은신의 기술을 발휘한다. 과거 작업에서 문서진이 물질의 객관적 성질을 실험하고, 인간이 가진 편견을 가시화하여 의문을 제기했다면 여기서부터 실험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자기 자신의 신체를 실험의 변수로 두기 시작한다.
인간은 지성과 이성을 통해 무한함에 이르는 상상이 가능하지만, 신체는 시간적, 공간적 한계를 지닌다. 작가는 〈내가 그린 가장 큰 원〉(2016)에서 자신의 신체가 뻗을 수 있는 만큼 최대한의 원을 그려보고, 〈등반지도: 관악산 둘이서 하나되어 암장〉(2016)에서 바위의 단면에 종이를 덧대고 손의 면적만큼 닿는 곳을 탁본처럼 찍어내면서 신체와 대상이 마주한 기록을 남긴다. 문서진은 자신의 유한함을 실감하고 손이 닿는 만큼의, 목숨이 달린 만큼의 가능함 속에서 새로운 실험을 추구한다. 실험대상은 이제 세계의 물질이 아니라 세계 속의 나라는 몸이다.
〈비우기: 몸으로〉(2018)와 〈살아있는 섬〉(2020)은 노동과 결합된 퍼포먼스이다. 전자는 “지우려는 노력마저도/지우고/잊으려는 생각마저도/잊고/비우려는 마음마저도/비우고/버리려는 욕심마저도/버리고”라는 싯구가 적힌 둥근 나무통을 파도가 치는 해변에서 끊임없이 굴리는 퍼포먼스 작업이다. 후자는 꽝꽝 얼어붙은 호수가 봄이 되어 녹을 때까지 한 달 반의 시간 동안 끝없이 눈을 쌓아 올리는 퍼포먼스 작업이다. 모래에 새겨진 글씨는 파도에 실려 지워지고, 쌓아올린 눈은 점차 따뜻해지는 햇볕과 녹아내리는 호수 아래로 사라진다. 두 작업 모두 일정한 시간 동안 신체의 반복된 노동이 필요하지만, 잉여가치를 남기지 않는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작가 자신과의 약속 뿐이다.
앞선 〈물질놀이〉와 마찬가지로 두 작업 모두 정해진 결과를 앞두고 실험이 수행된다. 그러므로 여기서 중요해지는 것은 마찬가지로 과정이다. 작가의 퍼포먼스는 멀리서 혹은 가까이서 시종일관 담담하게 영상에 담긴다. 카메라는 심리적인 불안이나 신체적인 고됨을 극적으로 담아내기보다 수행을 멀리서 지켜보며 관찰자이자 방관자의 시선을 투영한다. 이는 작가가 자신의 작업을 바라보는 다소 건조한 시선 같기도 하다.
문서진은 이미 자신의 신체가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끝없는 시를 쓰도록 고안된 둥근 나무통은 작가가 굴린 거리만큼만 시구를 만들어내고, 호수 위에 쌓인 눈은 날씨에 따라 녹았다가 굳기를 반복하며 일정높이 이상은 쌓이지 않는다. 작가는 자신이 가진 신체를 초월하고자 하지 않는다. 그가 행했던 물질 실험들이 사물들이 가진 속성 그 이상을 극적으로 넘지 않는 것과 같다.
여기서 역설적으로 퍼포먼스의 한계가 드러난다. 기록된 영상의 한계가 그것이다. 관객은 모든 시간을 경험하지 못한다. 기록물은 퍼포먼스가 거기에서 있었음을 증언할 뿐이다. 조용하게 녹아내리는 호수 얼음표면의 너울거림과 그에 따른 작가의 내면적 불안은 호숫가의 바람에 묻힌다. 도리어 작가의 외로움이나 불안은 영상보다 두께 3여 미터에 달하는 퍼포먼스 기록을 담은 책의 두꺼운 여백에 담긴다. 퍼포먼스를 촬영한 사진들 사이 사이에 끼어든 아무것도 쓰이거나 찍히지 않은 빈 종이의 연속은 호숫가에 쌓인 눈 같다. 작가는 시간을 지루하게 기록하기보다 작가 자신이 오롯이 보냈던 시간을 새하얀 두께로 암시할 따름이다. 그가 자신의 지리한 경험을 관객과 공유하는 고유한 방법이다.
작가는 작가 자신의 질문에서 파생되어 전개되는 과정을 꼼꼼히 추적한다. 처음에는 관찰자에서 시작하지만 점차 작가 자신의 신체를 개입시킨다. 신체는 물체와 접촉하면서 발생하는 그 순간을 증언한다. 그 순간은 섬유의 씨실과 날실이 끝없이 이어지며 만나는 무수한 교차점들과 같이 작가의 신체와 끝없이 교차하며 쌓여나간다. 문서진이 시도하는 작품이 ‘되어가는 과정’의 ‘끝’은 어쩌면 생각했던 것보다 평범할지도 모른다. 그 결과물 자체의 스펙터클은 관객이 무엇을 기대했던 간에 그리 크지 않을 수 있다. 그럼에도 문서진의 작품은 긴장이 넘친다.
이 긴장은 퍼포먼스의 휘발성을 조각적으로 남기려는 시도와 조각의 항구성을 퍼포먼스적으로 해체하려는 시도가 공존하는 데서 발생한다. 작가는 퍼포먼스 과정에서 발생한 사건을 단지 시간으로 남기기보다 신체적이고 촉각적으로, 즉 조각적으로 기록하고자 한다. 동시에 작가는 조형적인 완결성을 추구하기보다 과정에서 발생하는 몸적 경험, 즉 퍼포먼스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조각을 해체한다. 이러한 작가적 시도를 매개하는 것은 여전히 이 세계를 겪어가고 있는 작가 자신의 ‘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