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진(b. 1988)은 물리적 세계와 몸으로 씨름하는 조각적 과정에 주목하며, 몸을 움직이는 것부터 몸과 마음의 상태가 어떻게 변화하는지에 관심을 둔다. 이를 통해 작가는 삶에 대한 여러 단상들을 조각, 설치, 퍼포먼스의 형태로 풀어내는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


문서진, 〈비우기: 몸으로〉, 2018, 퍼포먼스, 2시간 ©문서진

문서진은 그의 작업에 있어서 도달하고자 하는 결과보다 진행되는 과정 자체에서의 경험을 더욱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렇기에 작가는 작업을 일종의 여정으로 본다.
 
초기 작업에서 문서진은 극기에 가까운 1인 퍼포먼스를 진행하는 등 몸의 수행을 통한 경험을 담아냈다. 어떤 것의 표면을 만지고 무게를 들고 나르는 일을 통한 그의 작업은 몸의 여러 감각들 중에서도 촉감과 관련되어 왔다.
 
이로 인해 그의 작업은 단순히 몸의 노동으로만 보여지는 것이 아니라 신체적인 일에 집중할 때의 감각의 변화와 발생을 담아내며, 그 과정에서 작가 개인이 경험한 몸과 마음의 순간들을 기록한다


문서진, 〈살아있는 섬〉, 2020, 한달 가량 진행한 퍼포먼스 ©문서진

예를 들어, 미국 메인주의 작은 마을 Monson에 위치한 호수 Lake Hebron에서 한달 가량 진행되었던 퍼포먼스 〈살아있는 섬〉(2020)은 2020년 2월부터 3월까지 얼어붙은 호수 위에 삽과 썰매로 눈을 쌓아 봄이 되면 사라지는 섬을 만드는 작업이었다.
 
이러한 작업은 자연의 일부가 되어 필연적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에 몰두하는 일로 귀결된다. 하지만 그 과정 속에서 떠올랐던 여러 단상들, 이를테면 발 딛고 서 있는 자연이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잠재된 죽음에 대한 두려움, 자연에 대한 경외, 연약하고 유한한 존재로서의 인간, 누군가의 응원으로부터 받는 위안 등이 작업에 얽혀 있다.


《살아있는 섬》 전시 전경(CICA 미술관, 2020) ©문서진

2020년 CICA 미술관에서 열린 개인전 《살아있는 섬》은 이러한 작업의 단상과 기억에 대한 해석으로서의 기록물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문서진은 호수 위에서의 기억들이 그 질감과 결에 맞는 기록의 형식을 찾아간다고 보았다. 이에 따라서 어떤 순간은 무게와 두께를 가진 뭉텅이로, 어떤 순간은 빛으로, 또 어떤 순간은 누군가의 손길로 작동되는 움직임으로 전환되었다.
 
여러 감각의 형태로 전환된 호수 위에서의 단상들은 삶에 대한 은유가 되어, 관객으로 하여금 인간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연약한지를, 그리고 Monson의 사람들이 작가에게 그랬듯 누군가의 응원이 한 인간에게 얼마나 큰 위안이 되는지를 전한다. 작가는 이러한 작업이 연대와 지지의 작은 제스처로 다가갈 수 있기를 소망했다.


《맨질맨질하고 딱딱한 삶에 대한》 전시 전경(레인보우큐브, 2022) ©레인보우큐브

한편, 2022년 레인보우큐브에서 열린 작가의 두 번째 개인전 《맨질맨질하고 딱딱한 삶에 대한》은 이십여 년 전 돌아가신 할머니에 대한 기억에서 출발한다. 작가는 청소년기에 돌아가신 할머니를 오래 전부터 떠올려 보며, 그에 대한 기억이 많지 않다는 사실에 기억을 그러모으기 시작했다.
 
대화한 기억보다 몸으로 부대낀 추억이 더 선명했던 작가는 할머니에 대한 기억이 어떻게 육체에 각인되어 있는지를 촉각적이고 조각적인 언어로 탐구하였다. 전시에 포함된 작업들은 몸의 감각에 의한 기억, 언어의 학습을 통한 양육자와 피양육자의 관계, 기억의 가변성, 기억에 의해 형성되는 자아와 만질 수 있는 것과 만질 수 없는 것에 관한 생각들을 담는다.
 
이를 반추하며 제작된 작품들은 관조적이기보다는 참여적이고, 관객의 움직임을 적극적으로 유도하면서 면과 면, 몸과 몸이 맞닿는 감각을 일깨운다.


문서진, 〈전화번호부 비석〉, 2022, 동, 10x10x99cm, 《맨질맨질하고 딱딱한 삶에 대한》 전시 전경(레인보우큐브, 2022) ©레인보우큐브

먼저, 할머니의 손때가 묻은 전화번호부 한 장을 동에 새긴 작업 〈전화번호부 비석〉(2022)은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돌아가신 할머니를 위한 비석으로서 자리하고 있었다. 전화번호부는 거의 유일한 할머니에 대한 기록물로, 그 안에는 할머니가 알고 지낸 사람들의 폭을 전달해줄 뿐만 아니라 글씨 쓰는 습관을 그대로 담는다.
 
〈전화번호부 비석〉과 전화번호부에서 추출한 글자를 금속활자로 만들어 벽에 심은 〈전화번호부〉는 딱딱하고 맨질맨질한 재료의 질감과 활자의 오돌토돌한 글씨를 손가락 끝으로 매만질 수 있게 만들었고, 글을 읽기보다는 촉감으로 느끼도록 유도한다.


문서진, 〈그의 침묵: 그의 말〉, 2022, 종이에 압인, 목재, 가변설치 (177x203x97cm), 《맨질맨질하고 딱딱한 삶에 대한》 전시 전경(레인보우큐브, 2022) ©레인보우큐브

할머니의 손글씨를 따오는 작업은 〈그의 침묵: 그의 말〉(2022)에서도 나타난다. 문서진은 평소 말이 거의 없었던 할머니가 반복해서 내뱉었던 말을 모아 할머니의 손글씨로 편집하고, 이를 3D로 출력하여 물에 젖은 유선지에 형압으로 찍어냈다.
 
“밥 먹어,” “일어나라,” “왜 그래, 응,” “제발 좀,” “내가 죽어야지” 등의 단편적인 구절은 작가의 마음 깊은 곳에 찍혀 있던 할머니에 대한 복합적인 감정들을 담고 있었다.


문서진, 〈그의 침묵: 그의 말〉, 2022, 종이에 압인, 목재, 가변설치 (177x203x97cm), 《맨질맨질하고 딱딱한 삶에 대한》 전시 전경(레인보우큐브, 2022) ©레인보우큐브

작가에게 있어서 무언가를 찍어내는 행위는 면과 면의 만남, 접촉을 의미한다. 이전 작업에서부터 물리적인 대상과 면을 접촉하여 무언가를 찍어내는 행위를 거듭해 왔다. 그러나 이전에는 작가 자신을 퍼포머로서의 역할로 위치시켰다면, 이 전시에서는 닿고자 하는 대상을 구체화하면서 이를 관객에게 전달하는 매개자의 역할을 한다.
 
즉, 그의 전시 《맨질맨질하고 딱딱한 삶에 대한》을 통해 문서진은 할머니에 대한 추억을 단순히 흐릿한 개인의 기억으로 남기기보다 물질의 형태로서의 작품을 매개하여 몸에서 몸으로 전달하고자 하였다.
 
문서진은 그의 작가 노트에서 “연대기가 없는 기억 속의 인물과 조각이라는 몸부대낌을 포착해보려는 시도를 통해, 선명한 자취와 찌꺼기로 존재하지만 포착할 수 없는 사랑의 신비로움을 더듬어 보려했다”고 설명한다.


문서진, 얀 반 에이크 오픈스튜디오 전경 사진(2024) ©문서진

그리고 문서진은 지난 몇 년간 해마다 거처를 옮겨 다니는 유랑 생활을 하며, 낯선 곳에 텃밭을 가꾸고 그곳에서 나온 건초와 잡초로 종이를 만들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종이가 한 이야기이 마지막이자 또 다른 이야기가 시작되는 순간이라는 것을 발견했을 때, 작가는 평범한 사물인 한 장의 종이가 어제와 오늘을 가르는 시간의 마디로 보였다고 말한다.
 
그렇기에 문서진의 작업에서 종이는 단순한 기록 매체가 아니라 머무름과 떠남, 만남과 이별을 거듭하며 살아가는 존재들의 역동성을 담아내는 생태적 장치이다. 또한 밭을 갈고 씨앗을 심고 열매는 거두는 반복의 경험은 개인적 서사를 넘어, 생태계의 순환과 그 속에서 인간이 위치하는 방식을 탐구하는 토대가 되었다.


《뿌리내리며 떠돌아다니는》 전시 전경(씨알콜렉티브, 2025). 사진: 이의록. ©씨알콜렉티브

이러한 작가의 식물-종이의 여정을 바탕으로 꾸려진 개인전 《뿌리내리며 떠돌아다니는》(씨알콜렉티브, 2025)은 종이와 씨앗, 식물의 생애가 얽힌 물질적 구조 속에서, 인간과 자연, 죽음과 삶이 서로 매개하는 생태적 장면을 펼쳐냈다.
 
먼저, 그 여정의 도입부인 〈한 장들〉은 2019년부터 2025년까지 한국, 네덜란드, 미국, 대만 등 여러 장소에 정주하며, 머무는 장소에서 얻은 건초들로 만들어진 종이 작업이다. 작가는 텃밭을 키우며 밭에서 나온 건초나 잡초를 주된 재료로 사용하였고, 더 짧은 기간 머무는 일정으로 텃밭을 키우지 못했던 곳에서는 인근 산이나 숲, 덤불에서 마른 풀을 가져와 원료로 삼기도 했다.


문서진, 〈한 장들〉, 2019-2025, 수제 종이, 가변설치, 《뿌리내리며 떠돌아다니는》 전시 전경(씨알콜렉티브, 2025) ©문서진

이 종이들은 특정한 시간과 장소를 품은 채 새로운 이야기를 기다리는 여백으로 제시된다. 작가는 종이를 단순한 표면이 아니라 생애의 매듭, 순간의 단위로 바라보게 하면서 생태적 시간성을 드러낸다. 생태계의 시간은 직선적 진보가 아니라, 죽음과 생명을 가르는 수많은 단위들의 매듭으로 이루어진다. 종이는 결국 그 매듭을 물질적으로 시각화하는 장치이며, 인간이 그 속에서 위치하는 방식을 다시 질문하게 한다.


문서진, 〈던져진 것들〉, 2025, 씨앗이 심겨진 수제 종이, 가변설치, 《뿌리내리며 떠돌아다니는》 전시 전경(씨알콜렉티브, 2025). 사진: 이의록. ©씨알콜렉티브

한편, 〈던져진 것들〉(2025)은 씨앗이 심어진 종이를 전시장 벽에 던져 붙이는 행위에서 시작하며, 시간이 흐르며 종이 위의 씨앗은 싹을 틔운다. 이 작업은 생명이 개별적 실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물과 빛, 표면, 환경과 얽히며 형성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여기서 종이와 씨앗은 서로를 전제로 하며, 벽과 물, 시간과 함께 얽혀 새로운 생명을 생성한다. 이로써 생명이란 고립된 주체가 아니라, 언제나 함께-만들기 속에서만 존재한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문서진, 〈서 있는 것들〉, 2025, 씨앗이 심겨진 한 장의 종이(180x90x90cm), 가변설치 ©문서진

〈서 있는 것들〉(2025)은 직립한 종이가 비와 이슬을 맞으며 무너지고, 그 자리에서 새로운 식물이 돋아나는 과정을 담는다. 죽은 식물의 몸은 종이로 서고, 다시 스러진 자리에서 생명이 솟는다. 여기서 종이는 죽음과 생명의 경계에 서서 수직과 수평, 상승과 하강의 긴장을 동시에 드러낸다.
 
다만, 이 장면에서 죽음은 단순한 소멸이 아니라 또 다른 생성을 위한 토대가 된다. 무너진 종이는 자신을 소모함으로써 타자의 생명을 일으키며, 그 과정에서 죽음은 끝이 아니라 타자를 위한 조건으로 전환된다. 문서진의 작업은 이처럼 죽음과 삶이 단순히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관계적 장 안에서 서로를 전환하며 나타남을 보여준다.


문서진, 〈텃밭에서〉, 2025, 3D 스캔한 마스트리흐트 뒷마당 텃밭, 터치스크린 인터랙션 ©문서진

〈텃밭에서〉(2025)는 이러한 생태적 사유를 디지털 공간 속으로 확장한다. 이 작업은 마스트리히트 뒷마당 텃밭을 3D 스캐닝하여 구현한 인터랙티브 터치스크린 신작으로, 관객은 가상의 텃밭에 초대되어, 화면을 더듬으며 촉각적 사운드와 시 낭송의 목소리를 듣는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소리들이 수군거리듯 들려오고, 특정 지점에 다가가면 목소리가 더 선명하게 울리면서, 텃밭을 가꾸는 일이 몸의 감각을 통해 터득하게 되는 촉각적 이해의 과정으로 전환된다.
 
이 작업은 3D 스캐닝과 음성이라는 비물질적 형식을 통해 촉각성을 탐구하는데, 생태적 경험이 아날로그적 육체성에만 머무르지 않고, 디지털 기술 속에서도 관계와 감각의 얽힘을 통해 새롭게 생성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문서진, 〈뿌리내리며 떠돌아다니는 것들〉, 2025, 퍼포먼스 영상 기록물, 단채널 Full HD, 10분 42초 ©문서진

마지막으로, 〈뿌리내리며 떠돌아다니는 것들〉(2025)은 패러글라이딩 퍼포머(실제 작가의 쌍둥이 자매)가 하늘에서 수제 종이를 흩뿌리는 장면을 기록한 퍼포먼스 영상이다. 종이는 하늘에서 흩날리다 땅에 닿아 사라지고, 며칠 뒤 그 자리에서 씨앗이 움튼다.
 
2020년 안동 산불의 여파로 5년이 지난 후에도 나무 한 그루 찾기 어려운 단호활공장을 배경으로 퍼포먼스가 펼쳐진다. 퍼포머가 뿌린 종이에는 어떤 문구나 이미지도 담겨 있지 않고, 단풍나무, 벚나무, 전나무 등의 나무 씨앗과 야생초 씨앗들이 심겨져 있다.
 
뿌려진 종이의 흩날림과 씨앗의 발아는 자연 속으로 흡수되는 것이 아니라, 생태계의 리듬 속에서 함께 호흡하며 살아가는 일이 된다. 패러글라이딩의 비상은 그러한 관계적 생애의 장을 드러내며, 인간과 자연이 서로를 비추는 순간적 카타르시스를 불러낸다.


《뿌리내리며 떠돌아다니는》 전시 전경(씨알콜렉티브, 2025) ©문서진

이렇듯 문서진은 면과 면, 몸과 몸이 접촉하며 만들어지는 관계의 순간들에 주목해 왔다. 몸의 수행을 통한 조각적 과정 속에서 작가는 거대한 생의 순환 속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세상을 감각하고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며, 또 소멸해 나가는지를 탐구한다.
 
이러한 사유를 시각적·촉각적 풍경으로 펼쳐내며 관객으로 하여금 그 안에서 각자만의 삶에 대한 단상을 겹쳐 보도록 한다.

"관람자의 고유한 감상이 작품을 완성한다고 믿습니다. 제가 생각해보지 못한 감상은 저에게 돌아와 제 작업의 새로운 언어가 되어줄 거예요."  (문서진, 서울문화재단 인터뷰 중)


문서진 작가 ©서울문화재단

문서진은 서울대학교 조소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미국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개인전으로는 《뿌리내리며 떠돌아다니는》(씨알콜렉티브, 서울, 2025), 《맨질맨질하고 딱딱한 삶에 대한》(레인보우큐브,  서울, 2022), 《살아있는 섬》(CICA 미술관, 김포, 2020) 등이 있다.
 
또한 작가는 《소멸의 시학: 삭는 미술에 대하여》(국립현대미술관, 서울, 2026), 《마당: 마중합니다 당신을》(수원시립미술관, 수원, 2023), 《여름생색전》(인사아트센터, 서울, 2023), 《Skyline Forms on Earthline》(두산갤러리, 서울, 2022), 《Selfish Art-Viewer: 오늘의 감상》(금천예술공장, 서울, 2021), 《낙관주의자들》(아트센터 예술의 시간, 서울, 2021) 등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문서진은 Pier 2 Art(가오슝, 대만, 2025), 얀 반 에이크 아카데미 레지던스(마스트리히트, 네덜란드, 2023-2024), 푸른지대창작샘터(수원, 2023), 국립현대미술관 고양 레지던시(고양, 2022). 금천예술공장(서울, 2021) 등 다수의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참여한 바 있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