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나라로 들어가기
1. 전시장에는 사물들이 부유한다. 이곳에서는 견고하지 않은 의미들이 생산되고, 그것들은 고정되지 않은 상태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반복한다. 작가가 만들어 놓은 이 혼란스러운 환경에서 당신은 어쩌면 막연하게 불안할 것이고, 소외감을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동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앨리스는 ‘커지면서 동시에 작아진다.’ 당신도 김대환의 작품에서 그런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될 것이라 장담한다. 허무맹랑하게 들리겠지만 모험을 두려워하지 말기를 바란다. 어느 옛날 철학자가 말했다. “익숙하지 않은 것에 대한 호의와 새로운 것에 대한 선의를 가지라”고.
1-1. 풀의 마당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창문이 낯설다. 여러 사물을 합성해 놓은 듯한 푸른빛의 거대한 이미지가 마치 출렁대며 움직이고 있는 것 같다. (2D 평면은 여전히 기능하고 있다) 이 풍경이 ‘이상하게’ 보이는 것은 조악해 보이는 저해상도의 이미지 때문만은 아니다. 떠다니는 사물들은 정확하게 무엇인지 알 수 없고, 중첩된 이미지는 하나의 대상만을 지시하고 있지 않다. 이 표면을 자세히 들여다보면서 여기에 숨겨진 대상들이 무엇을 연상시키는지 하나씩 찾아내려고 애쓸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다. 이것은 착시 현상을 일으키는 트롱프뢰유(trompe l’oeil)나 옵아트(Op Art) 그림이 아니기 때문이다. 작은 힌트 하나를 주자면, 이 이미지를 전시장을 나오기 전까지 꼭 기억하길 바란다.
창문 가운데 작은 프레임이 있고, 그 중심에 카메라가 켜진 스마트폰 하나가 있다. 당신은 우선 맨눈으로 프레임 너머 무엇이 있는지 열심히 관찰할 것이고, 호기심/의심 가득한 눈으로 스마트폰 화면을 뚫어지게 살펴보며 그 너머를 향해 두 번째 응시를 시도할 것이다. 당신의 시선의 끝이 닿는 곳에는 (운이 좋다면) 휴먼 스케일의 대상이 존재할 것이고, 움직이는 대상은 동일한데 ‘이상하게도’ 위치에 따라 스케일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곧이어, 당신은 6인치 스마트폰 카메라를 통해 응시의 자리가 권력의 자리가 되는 것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 모든 것이 착각일 수도 있다는 것도. 혼란스럽다. 그러게 내가 처음에 말하지 않았는가? “부디 의심하시오.”
1-2. 이제 앨리스처럼 토끼 굴로 들어갈 차례이다. 당신은 전시 제목 《안녕 휴먼?》과 더불어 전시장 앞에서 지금까지의 경험을 되짚어 보면서, 이번 전시가 ‘인공 지능’(AI) 혹은 ‘환영’(illusion)에 대한 것이라고 확신에 가까운 추측을 하며 전시장 안으로 들어갈 것이다. 수평과 수직이 거의 맞지 않는 풀의 바닥과 벽을 ‘이상한’ 사각형의 구조물이 지배하고 있다. 사람들이 그곳을 드나들고 있다. 관객참여형 전시라고 ‘오해’할 여지가 다분하다. 이미 무슨 전시인지 다 보기도 전에 ‘알 것 같아서’ 선뜻 내키지는 않지만, 어쨌든 구기동의 변두리까지 힘들게 찾아왔으니 우선 들어가 본다.
천장의 높이와 바닥의 경사가 모두 다른, 온통 새하얀 벽면의 내부가 ‘이상하다’. 공간에 맞춰 온몸을 최대한 구부리고 방 안쪽을 향해 가는 당신이 애처롭다. 그러나, 기존의 전시장 바닥과는 사뭇 다른 부드러운 바닥의 질감이 느껴지지 않는가? 고개를 숙이고 있자니 목은 아파 오고 몸을 잔뜩 웅크린 스스로가 우스꽝스러워서 여기를 얼른 탈출하고 싶어졌지만, 불현듯 당신을 보고 있을 저 창 너머의 누군가의 시선이 생각난다. 그런데, 몇 분만에 응시의 대상이 바뀌었다. 조금 전 전시장 밖에서는 대상을 바라보는 주체로서 당신이 보는 세계가 시각의 대상으로 환원될 수 있었지만, 여기 내부로 들어온 순간 당신 자신이 보이는 대상으로 관계가 전복되면서 조금 전까지 당신이 봤던 세계, 그 유령 같은 풍경의 존재를 의심하게 될 것이다. (다행이다)
*혹시 당신이 호기심/의심이 많은 관람객이라면, 이 구조물을 나가자마자 외부를 빙 둘러볼 것이다. 전시란, 몸을 움직여 볼 가치가 있는 것이다.
2. 이상한 나라에 갔던 앨리스는 6개월 후 거울 반대편의 나라로 여행을 떠난다. 『거울 나라의 앨리스』의 앨리스는 어디든 가기 위해서는 본인이 가려는 방향과 반드시 ‘반대’ 방향으로 움직여야 한다. 당신은 이제 이 구조물을 나가기 전 잠시 머뭇거릴 것이다. 작은 삼각형 방안을 슬쩍 들여다보니 반짝거리는 거울과 타일 바닥이 화장실을 연상케 한다. 그리고, 이 은밀한 공간에 놓여 있는 ‘이상한’ 사물이 하나 눈에 띈다. ‘휴먼’ 스케일(scale)에 어긋나는 크기의 조형물은 실체를 알 듯 모를 듯 보이지만, 당신이 추측하는 그 생명체가 맞다.
그리고, 거울에 반사된 당신의 ‘이상한’ 모습을 대면하게 될 것이다. 천장에 머리를 부딪칠까 봐 고개를 숙이고 온몸을 꾸깃꾸깃하게 구긴, 거울에 비친 당신의 모습은 이 공간에 들어온 순간 ‘스케일’이 달라진 당신의 또 다른 모습이다. 이 인식 과정은 거울 나라의 앨리스가 거울 속으로 들어가서 본인의 몸이 커지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모험과 유사하다.[1]실제 스케일이 달라진 채로 거울에 반사된 당신을 바라보는 순간, 당신은 자신의 존재를 다시, 다르게 인식하게 될 것이다. 거울 속 대상은 단지 반사된 형상이 아니며, 어떤 절대적 기준에 의해 가치가 달라질 수 없는 존재다. 표상의 세계에서 거울 밖의 당신과 거울 속 당신은 그 누가 우위에 있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3. 앨리스는 잠에서 깨는 순간 모든 것이 꿈이었음을 비로소 깨닫는다. 당신도 이제 꿈에서 깨고 현실로 돌아올 순간이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이상하게도’ 당대에는 전혀 이상할 것 없었던 현실(부조리했던 18세기 산업혁명 시대의 영국 사회)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당신은 거대한 ‘체험관’을 나오며, 또 다른 착시효과를 예상하면서 바로 옆방의 나무 바닥에 발을 들일 것이다. 그리고, 당황할 것이다. 평면과 입체가 뒤섞인, 오히려 전시의 전통적인 문법을 따르고 있는 전시장에서 당신은 오히려 어디를 봐야 할지, 어디로 가야 할지 눈과 발의 방향을 잃을지도 모르겠다.
방의 입구부터 ‘이상하게’ 배치된 작품들을 시작으로, 도대체 작품을 보라는 것인지 말라는 것인지 동선은 묘하게 어긋나 있으며 작품들은 마치 기능을 멈춘 채로 존재하는 것만 같다. (김대환의 이전 작업을 본 적이 있다면 이런 느낌은 더욱 강할 것이다) 조각의 덩어리는 해체되어 이제는 좌대 위에 놓인 채로 기능하지 않고, 질료들은 속성을 드러내지 않은 채 형상과 구별되지 않는 상태로 존재하고 있다. 이 공간은 어떤 규칙이나 질서 따위를 찾아볼 수 없는 상태다. 만약 당신이 성실한 관람객의 자세를 포기하지 않고 현대미술에 대한 넓은 아량이 여전히 남아 있다면 작품들의 표면을 살펴보면서 각 매체가 드러내는 특징을 빠르게 간파하려 하겠지만, 이러한 독해 방식으로는 안타깝지만 ‘오해’만 늘어날 뿐이다.
다시 한번 주의 깊게 둘러보길 바란다. 가령, 그림이 향하고 있는 시선의 위치라던지, 작품이 이 공간에 새롭게 개입함으로써 달라진 상황 같은 것 말이다. 우리가 특정 위치와 특정 시각에서만 이미지를 일방적으로 획득할 수 있도록 김대환이 구축한 상황은 전시에서 작품을 수용하는 방식에 대해 의심하게 만든다. 그러나, 만약 당신의 눈과 발을 가로막는 작가의 일시적인 ‘교란 작전’을 무사히 통과한다면, 마침내 다다르는 그곳에 살짝 걸터앉아 보이는 눈 앞에 펼쳐진 ‘이상한’ 풍경은 결국 다르게 보일 것이다. 6월과 7월의 여름은 볕이 좋은 계절이다.
1-1-1. 바닥이 조금 낮은 곳을 열린 문을 통해 기웃거린다. 안에도 작품이 있을 거라고 추측하지만, 막상 전시도 거의 다 본 마당에 대충 보고 떠나려고 했을 것이다. 낮은 공간으로 내려가기에는 망설여져서 문턱에서 고개만 빼꼼히 내밀었는데 공간에 들어가야만 제대로 볼 수 있는 무엇인가 오른쪽 구석에 있는 것 같다. 귀찮지만 결국 몸을 움직여 삐걱대는 계단을 내려간다. 작품인지도 모를 트렁크 위에 ‘이상한’ 드로잉이 하나 걸려 있다. 초상화인가 싶은 것이 가족을 그린 것 같은데 배경이 하늘이다. 혹시 하늘에 떠 있는 다양한 형태의 구름을 보면서 연상되는 모양을 상상한 경험이 있는가? 전시장에 들어오기 전 창문에서 봤던 ‘이상한’ 그림을 기억하고 있기를 바란다. 이미지가 생산되는 과정은 인식의 행위를 통해서 완성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