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아라는 마음이 복잡할 때나 휴식이 필요할 때마다 고궁을 방문하곤 했다. 작가가 태어나고 자란 도시 수원은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고 있어서 그녀는 고궁의 단청 문양을 호기심을 가지고 관찰할 기회가 많았다. 고궁을 따라 걷다보면, 우리는 여러 가지 질문을 떠올리게 된다. 누가 건축물의 외관에 이 형형색색의 아름다운 색깔을 칠하기 시작했을까? 다양한 문양들은 도대체 어디로부터 유래한 것일까? 우리나라 무형문화재 48호 단청 장인이자 불화가 만봉 스님의 연구에 따르면, 고대 단청과 관련된 방증사료들이 비록 많지 않지만 오늘에 전하는 가장 오래된 단청유물은 중국 서한시대 묘의 부장품. 가옥 형 토기에서 흔적을 찾을 수 있다.
단청의 패턴 문양의 유래는 멀리는 그리스 로마지역에서부터 고대 근동지방, 이슬람과 인도를 거쳐 타클라마칸을 지나 돈황의 석굴에서도 나타나는데, 많은 유물들이 서양의 도굴꾼들에 의해 훼손되었지만 남아 있는 석굴 중에서 벽화가 도채 된 동굴만 무려 469개소나 된다고 한다. 단청에 사용되는 물감은 구하기 힘든 재료여서 예로부터 단청은 부와 권력의 상징이었다. 많은 역사학자들은 실크로드를 따라 이동했던 서역상인들이 이 값비싼 재료들을 중국을 거쳐 한반도까지 전해주면서 불교의 도상들과 문양까지 가져왔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만봉 스님은 우리나라 단청에 관한 가장 오래된 문헌자료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솔거의 일화에 관해 언급한다. “태어나면서부터 그림을 잘 그렸던 솔거가 황룡사 벽에 노송을 그렸는데, 왕왕 새들이 날아와서 앉으려고 허둥대다가 떨어지곤 하였다. 후에 채색이 낡고 바래 자 절의 스님들이 단청으로 보수하였는데 그만 새들이 날아들지 않았다.”는 내용이다. 이 일화에서 단청을 그려 넣어 치장하는 것은 솔거가 그린 그림의 마술적인 힘을 손상시키는 것으로 표현한다. 새들도 속을 만큼 리얼(?)했던 솔거의 노송은 단청의 반복적이고 다채로운 색채로 인해서 사실적인 마력을 잃고 새로운 추상화로 바뀌었다.
이 문헌 속 필자는 단청의 마력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는 듯하다. 단청의 화사한 마력은 솔거의 사실적 묘사와는 다른 힘을 지닌다. 이 패턴들은 현대미술의 색면 회화가 지니는 강렬한 색채의 발산과 옵티컬 아트의 반복된 패턴으로 어지럼증을 유발할 정도로 시각적 환영을 만들어 낸다. 김아라는 이 추상적인 단청의 색채와 패턴에 매료되어 수년 동안 작업해왔다. 수 십 개로 반복 나열되어 웅장해 보이는 단청은 고궁이나 산 속 깊은 사찰의 처마에서나 마주할 수 있는 오래된 것으로 관심을 두지 않으면 무심코 지나칠 수 있었지만, 작가에 의해 전통적이며 새로운 것이 되었다.
김아라가 시도한 단청 문양의 첫 작품 〈집합 #1〉은 2015년에 제작되었는데, 이 작품은 단청 문양이 그려진 지붕 서까래가 서로 얽힌 구조물이다. 뒤틀린 두 개의 원형 구조물로 종로 도시갤러리 윈도우에 전시되었던 이 작품은 단청의 청록색과 파란색 테두리 그리고 서까래 전면에 그려진 여섯 개의 꽃잎을 가진 태평화 문양으로 제작되었다. 2016년에서부터 2019년까지 제작한 〈집합 #3, 4, 5, 8〉에서는 이 서까래 모양의 구조물이 초현실적인 디지털 그래픽 이미지 상태로 캔버스에 그려진 평면작업으로 이어진다. 이 작업에서 사용된 색은 하늘색과 짙은 녹색 그리고 태평화 문양을 그린 빨간색이 전부다.
불교에서 색채는 연기법을 바탕으로 반야사상의 ‘색즉시공(色卽是空)’, 화엄사상의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유식사상의 ‘유식무경(唯識無境)’으로 전개되어 오면서 인식대상자인 ‘색’과 인식 주체자인 ‘마음’이 둘이 아님을 드러내는 말로 쓰였다. 다시 말하면, ‘어떠한 색이라도 홀로 존재하는 색은 없다’는 법칙이며, ‘색과 색이 만나고 연기의 이치에 따라 서로 의지하는 관계를 이룬다’는 것이다. 결국 색은 인연에 따라 발생하고 ‘색은 항상 변할 뿐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말한다. 불교의 대표적인 경전인 반야심경에 등장하는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의 의미도 ‘모든 물질의 세계 그대로가 공(空)하다’는 뜻이다.
즉, ‘어떠한 사물이든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뜻이다. 김아라의 작업은 단청에서 나타나는 색채의 선명한 관찰과 구분으로 시작했다. 이 색들은 서로 공명하며 접합되기 시작하는 데, 색은 서로 대립하기도 하고 얽히고설키면서 화면에 도열한다.
2016년 〈무제, untitled〉에서 작가는 한층 더 기하학적이고 추상적인 화면을 대담하게 실험한다. 〈집합〉이 서까래 구조물의 입체적인 표현이었다면, 이 추상화에서는 노란색, 하늘색, 빨간색, 주황색 그리고 하얀 실선이 서로 짜깁기 되어서 만들어진 패턴화로 전환된다. 이 패턴은 두 줄의 노란색이 검은 테두리로 나뉜 채, 청록과 진 파랑색의 줄무늬를 따라 하얀 줄무늬가 가로지른 하늘색 띠로 연결된다. 그러다가 마름모꼴 사각형 패턴 위에 사태극 문양이 바람개비처럼 맴도는 〈집합 #6〉으로 전개되면서 본격적으로 패턴 작업에 진입한다.
이 패턴의 단조로움은 원형 바탕에 기하학적 선 분할과 전통적 문양의 배합이나 2018년에 제작한 문자적인 기하 추상 〈균형〉으로 변주하면서 새로운 형식을 모색하기에 이른다. 같은 해 제작한 〈얽히다〉는 대각선으로 중첩된 화면을 보여주고 있어 그간의 평면적인 문양과 차별화된다. 〈흔들 흔들 #1, #2〉 는 이 색의 패턴 조각이 만화의 한 장면처럼 너울 치는 형상을 보여주는 데, 그간의 작업이 단청의 전통문양에서 유래한 것임을 유추할 수 있었다면, 이 작품에서 전통의 흔적이라곤 흔들리는 패턴 조각의 색채가 유일하다. 이런 과감한 실험은 이듬해 제작된 〈사각형 패턴 #1, #2, #3〉 시리즈에서 극대화된다. 고궁의 문살이나 문설주 같은 데서나 볼 법한 이 색채 패턴은 사각형 화면을 따라 서로 엇갈리면서 맴돌고 있다.
작가는 이와 같은 작업을 통해서 ‘박제된 전통’이 아닌 지금의 현실을 더 표현하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2019년에 제작된 〈공존하는 이미지#1, #2, #3, #4, #5〉에서는 지금까지 작업에서 나타났던 전통적 문양의 흔적이 최소화되고 옅은 청록색 기운의 바탕이나 가느다란 선의 색채에서만 간헐적으로 단청의 미감을 느낄 수 있다. 같은 해 제작된 〈무제-접합〉은 이 선적인 요소들을 더욱 살리면서 아주 부분적으로 더 실제적인 단청의 문양을 적용했다.
최근 작가가 팔복예술공장에 입주하면서 전주에서 제작한 작업은 이 시리즈에서 보여준 오브제적인 설치작업의 연장으로 읽힌다. 이 작업에서 색채와 패턴은 고궁의 건축물이나 사찰 혹은 한옥의 문살 모양에서 나타나는 비례와 구조를 보여준다. 이 패턴과 구조들은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것들이며, 전체를 설명하지 않아도 부분을 통해서 전체를 알 수 있는 것들이다.
국립현대미술관의 2019 현대차 프로젝트를 통해서 작은 미술관 서사를 개인전에 적용한 바 있는 작가 박찬경은 ‘박제된 전통’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전통은 ‘무의식’을 건드리는 어떤 것이며, 뒤통수를 붙잡는 어떤 힘이고, ‘나의 현대화’를 방해하는 매혹이고 요즘 말로 전형적인 ‘타자’이다. 내가 ‘이것으로 부터 벗어나 있다는 일종의 불안은 내 사고 능력, 문화적 수용력을 언제나 반쪽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 같다. 따라서 내게 전통의 재구성이나 현대화 자체보다 흥미로운 것은, 전통이 하나의 타자로서, 귀신처럼 알 수 없는 대상으로 출몰한다는 의미에서 증상만 있을 뿐 과학적인 병명을 찾기 어려운 일종의 '지역의 상처'다”라고
김아라가 고궁에서 무심코 마주했던 ‘전통’은 이제 작가의 작업 깊숙이 들어와 앉았다. 박찬경의 말대로 그것은 그녀의 뒤통수를 붙잡는 ‘무의식’으로 그녀의 현대화를 끝없이 방해하는 전형적인 타자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녀는 그것으로부터 도망치고 있는 중이다. 그러다가 다시 그것이 귀신처럼 출몰하는 증상만 있을 뿐 과학적인 병명을 찾기 어려운 지역적 상처로 남게 되는 것처럼, 그녀의 작업에서 현대와 과거가 서로 접합되고 서로 흔들리고 얽혀서 하나의 색이 되고 지역적 상처와 같은 문양이 된다. 우리는 그것을 또 다른 전통이라 부르겠지? 나는 그녀의 작업이 끝없이 변해 갈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러다가 ‘항상 변할 뿐 영원하지 않은 상태’에 도달하게 된다면, 그것이 우리가 찾던 ‘색(色)’ 즉, ‘텅 비어있는’ ‘꽉 찬 색(色)’을 마주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