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김태연 작가의 작품을 처음 알게 된 것은 2019년쯤이었다. 작은 쇼윈도와 전시장에 큰 마디자와 모양자의 형태를 구부려 까만 입체물로 치환한 조각을 보며 (《The Ruler of the Shape》, 2019) 그가 관심 있는 것은 표준화된 단위의 와해일까? 하는 단순한 질문을 했던 기억이 있다.
그의 작업 세계 전반에 관해 소회를 밝힐 수 있는 지면이 나에게 주어진 지금, 김태연의 작품은 예술과 삶 전체를 빗각으로 바라보고자 하는 일관된 태도로부터 출발하는 게 옳을지 모르겠다. 그가 여태 묵묵히 생산해 낸 것들을 보면 그 외형이 화려하거나 복잡하지 않다. 그의 손에서 생산된 것들은 대부분 기하학적이고 추상적인 선과 면으로 구성되어 있고, 색은 극도로 정제되어 있으며 색이 있다고 할지라도 원료들이 애초에 갖고 있는 색을 그대로 드러내는 경우가 많다.
말하자면 그는 무엇을 꾸며내기보다 자신이 어떤 대상을 변형, 재구성하기로 결정 내리게 하는 외부와 내부의 요인들을 기민하게 지각하는 일에 보다 집중한다. 그리고 그 관찰한 현상의 특성이 조형적 실험에 단계적으로 영향을 미치게 된다.
되짚어보면 양식화된 것들을 향한 호기심과 의심이 줄다리기하는 곳에서 김태연의 작업이 존재해 왔음은 분명하다. 크게는 사회의 법과 관습, 산업 표준 규격, 문화마다 다른 언어처럼 현대인을 둘러싼 인공의 물질 환경과 시스템이 ‘규격’의 범주에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단단해 보이는 이 유무형의 테두리는 작가에게 불편한 놀이터가 된다.
그는 규범을 부정하거나 폐기하기보다 그것을 역이용하며 숨겨져 있던 구조를 가시화하고 비틀어낸다. 비행기에 탑승하기 위해 부치는 수화물의 무게에 해당하는 나무로 캐리어를 만들어 해외 레지던시로 운반하거나(〈23kg〉, 2017), 엘리베이터가 없이 오르내려야 하는 작업실 계단에 맞는 구조물을 계단의 각 칸마다 끼워 넣어 짐을 옮길 수 있는 슬레이트를 만드는 일 (〈불만이 작업이 될 때〉, 2018). 작가는 이 거추장스럽고 비효율적인 행위의 절차를 기꺼이 해내며 기존 제도의 가장자리 면에 예술을 교묘하게 배치하곤 했다.
정량을 보장해 주는 각종 준칙과 기준은 사회라는 안전한 망이 실체로서 존재한다고 믿게 하는 실로 유령 같은 것이다. 이 개념은 빗금이 쳐진 모눈종이 밖으로 선을 그었을 때 그것을 오류라고 인식하게 하는 묘한 힘을 가지고 우리 무의식 어딘가에 잠적하고 있다. 그는 용기를 내어 그 모눈종이의 격자무늬 밖으로 나아가보기로 한다.
그 순간 발생하는 불안정성과 흔들림은 김태연을 움직이는 자양분이 되었다. 타자가 이미 결정해 놓은 선제 조건을 재조직하려는 의지는 보는 이들에게 묘한 해방감을 준다. 일상에 만연한 고정관념과 편견에 대한 그의 가벼운 일갈은 한 방향으로 향하던 사고의 회로를 다각화하는 신호처럼 느껴진다. 그렇게 한동안 그는 노동 방식과 작업의 메세지를 일치시키며 설치와 퍼포먼스, 조각과 레디메이드 사이의 어딘가를 오가는 듯했다.
신경 써서 살피지 않으면 눈에 띄지 않는 역설과 부조리를 포착하는 그의 눈은 작업 환경을 채우고 있는 크고 작은 사물들의 생애주기와 기능적 한계를 살피는 방향으로 향한다. 일반적으로 작품과 사물을 만들 때는 이를 보조해 주는 많은 재료가 필요하다. 각목, 실리콘 틀, 보양재, 종이 테이프, 심지어 이름도 모르는 부품 등을 나열할 수 있다.
작가는 과정에 기여했지만, 결과적으로 시야에서 가려지거나 쉽게 버려지는 것들이 작품에서 능동적인 값을 수행할 방법이 어떤 것일지 고민한다. 가령 〈중성적 구조물〉(2023)은 스티로폼 보호대의 모양, 기능성 페인트인 방청도료의 색채, 알루미늄 파이프의 길이 등 기존 재료가 본디 갖고 있는 특성을 훼손하지 않은 채 그들을 모듈처럼 조합해 만든 설치-조각이다.
각 사물이 애초에 갖고 있었을 기능적 역할(물건을 포장할 때 파손을 막기 위해 사용되는 부품, 철재의 부식 반응을 줄이기 위한 안료)은 그에게 중요하지 않다. 대신 각각의 물질은 오롯이 고유의 물리적 특성을 보존한 ‘중성적 상태’로 조각의 내용과 형식에 동참한다.
이러한 조형 논리는 단순히 주변 사물에 대한 애정과 호기심을 넘어 삶을 바라보는 한 인격체의 가치관을 보여준다. 사회에서 통용되는 나의 모습에서 무수히 많은 생각과 감정, 감각이 삭제된다. 합리적 계산에서 발견되는 오차나 결함은 편집되어 세상에 없었던 것처럼 사라지기 마련이다. 작가는 네거티브의 영역으로 밀려났던 가치를 예술의 장으로 호명하며 실패와 소외의 한계를 가능성과 재생의 개념으로 전환한다.
갤러리 2에서 열렸던 개인전 《수렴과 발산》(2021)에서 전시장 한편을 가득 메웠던 것은 열선으로 가운데를 파내어 완성한 하얀 스티로폼 덩어리들이었다. 여기서 작품은 육면체의 중심에 있던 알맹이, 그리고 그것을 둘러싸고 있던 구멍 난 테두리 둘 다이다. 대칭과 비례가 틀어진 파편들은 수학적 계산 밖에서 실행된 몸의 비결정적 움직임과 그것의 여파 모두를 끌어안고 작품으로서 무대에 오른다. 정답과 오답은 그의 세계에서 모두 위계 없는 자양분일 뿐이다.
한편, 최근 작가는 인간의 신체 형상을 직접적으로 작업의 표면에 접목하는 실험을 시작한 듯 보인다. 2023년의 개인전 《구멍 Way Out》(2023)에서 줄자를 받치는 손바닥 형태의 유토, 구부정하게 말려들어 상체의 내피가 마치 외피처럼 보이는 〈말린 어깨〉를 보며 필자는 궁금했다.
이제 그는 인간의 몸을 하나의 주형으로 보고 그 틀의 한계를 전복하려는 걸까? 중립적인 사물보다 필연적으로 구구절절한 서사를 상상케 하는 신체의 등장은 작가가 단순히 사회적으로 규정된 준칙들에 반문하는 것에만 몰두한 것이 아님을 짐작게한다. 어쩌면 이 행위자는 자신에게 질문하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내가 벗어내려는 언어는, 생각은, 기억은 뭘까? 내 안과 밖에 난 구멍 사이로는 무엇이 채워질 수 있고, 남은 여백을 메우려면 어떤 도구가, 어떤 타인이, 어떤 행동이 필요할까?
그가 석고와 황마로 떠낸 몸의 껍질은 어쩐지 그가 벗어 내려놓은 질문들이 잠시 물리적 실체가 되어 현실에 머무는 듯하다. 말랑말랑한 피막에 위탁한 인간의 표피는 임시로 세운 각재 구조물에 기대어 서서 신체의 제약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그의 몸으로부터 떨어져나온 그림자들은 숨기고 싶은 콤플렉스도, 돋보이려는 부분도 없이 무심히 그 안팎을 우리에게 내어보이고 있다.
재치있게 사고의 무게 중심을 교란하는 태도, 당면한 문제를 예술의 동력으로 전환하는 순발력, 화려한 형용사와 부사로 꾸며지는 과장된 상황을 대하는 담담함. 그런 것들이 어제도, 오늘도 김태연의 언어를 생기있게 만드는 가장 근원적인 가치들이라 믿는다. 서사보다는 보이는 형식의 변주에 방점을 두는 그의 작업은 어느 순간 스스로 발화하기 시작한다.
그 이야기는 문득 그에게 주어진 물음표에서 시작되어 여러 익명의 개인이 마음속에 품고 있을 미완의 문장으로 옮겨가며, 움직일 수 없을 것 같던 세상의 단단하고 해묵은 틀을 천천히 녹여낸다. 그가 던지는 질문으로부터, 현실은 조금씩 더 유연해지고 있음이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