람한이라는 페르소나
LED패널의 수많은 입자로부터 발광하여 망막에 맺히는 납작하고 매끄러운 그림. 사이키델릭한
색감으로 묘사된 이것은 시티팝이 흘러나오는 도시의 네온사인을 연상케 한다. 그 인공적 불빛에는 기형의
생물과 사물이 몸을 한데 뒤엉킨 독특한 도상이 있다. SF의 공상과 픽션에 가미된 거짓, 그리고 열화된 기억 속 흔적이 그로테스크하게 공존한다. 단적인 무엇으로
설명할 수도, 선형적인 서사를 부여하기도 곤란한 자극적 이미지다. 아름답지만
괴이하고, 화려한데 쓸쓸하여 혼란한 감각만이 말초로 지각될 뿐인.
그런 시각 이미지를 생성하는 작가 람한은 동시대 미술과 소셜문화의 주목을 동시에 받고 있다. 한예종 예술사에서 애니메이션을 전공하고, 작은 규모의 전시와 출판물로
작품을 공개했던 그녀가 주요 미술계의 호출을 받은 것은 《유령팔》(서울시립북서울미술관, 2018)부터였다. 해당 전시를 기획한 홍이지 큐레이터는 일상의
하나가 된 웹 공간에 대해 조망하고자 하였고, ‘아날로그와 디지털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지 않는 80년대생 작가들’을 언급하며 강정석, 김정태, 박아람, 압축과
팽창, 김동희, 람한을 초대했다.
2010년대 미술계의 떠오르는 화두였던 신생공간과 그들 담론 속에 이름을 알린 젊은 작가들이 제도권에 소위 ‘액세스’되거나 ‘휘발된’ 사례가 빈번할 때, 람한은 일러스트레이터 겸 만화가로 소개되며 약간은
결이 다른 ‘뉴페이스’였다.
람한은 신생공간 세대가 거쳤던 물리적 공간이나 그들이 모여 주도한 작가미술장터 《굿-즈》(세종문화회관, 2015) 및 파생된 동류 행사에 참여한 적 없이, 그보다도 바깥의 영역에 있다가 호명된 경우였다.
독립만화와 캐릭터 굿즈를 전시· 판매하는 곳에서 첫 개인전 《람한: 나이트캡》(유어마나, 2017)을
열며 인디 아티스트로 활동한 람한은 동시기에 불거졌다. 몇 년 내 소멸한 미술의 세대 담론과는 직접
닿을 인연이 없었다. 오히려 《유령팔》 이후 《PACK 2018: 팅커벨의
여정》(공간사일삼, 2018), 《Ghost Shotgun》(시청각,2019)
등에 섭외되며 람한은 앞의 담론에 등장했던 공간을 추후 경험했고, 이내 상업갤러리 초대
및 소속 작가가 되었다.
그 사이 《2020 부산비엔날레: 열 장의 이야기와 다섯 편의 시》 (부산 원도심 일대 등, 2020), 《SF2021: 판타지 오디세이》(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 2021), 《게임사회》(국립현대미술관, 2023)에 주요 커미션 작업을 선보였고, 《아트바젤 홍콩 2023》 ‘디스커버리즈’ 섹터에 소개됐는가 하면, 연예기획사 및 글로벌 명품 브랜드를 비롯한
여타 기업과의 협업 및 광고에 참여하고, 패션지 화보에 모델로 직접 등장하는 등 기존 미술계에 있던
암묵적 허들을 넘고 다방면의 이력을 쌓았다.
이처럼 급가속한 람한의 인기 혹은 당대 문화와의 발 빠른 맞춤은 두 가지 상반된 시대 배경을 원인으로 짚을 수 있을 것
같다. 첫째, 청년이 88만원
세대, 삼포세대로 불리며 디스토피아의 2010년대를 자급하여
버텨야 했던 점, 둘째, 청년이 자기표현과 가치 추구에 능한 MZ세대로 지칭되며 2020년대 주목할 신인류 계층으로 떠오른 점이다. 절망이 극복된 게 아니라, 포기해서 득도에 이르러 뒤틀린 변종이
될 수밖에 없는 암울한 사회에서 람한이 수행해온 혼성의 미감과 멀티프로필은 어쩌면 동세대에게 선망의 동력이 됐을 거라 추정해 볼 수 있다.
보다 정확히 짚자면, 람한이라는 새로운 페르소나와 그 페르소나가
제작한 작업이 만들어낸 이미지가 소비되면서 지금의 람한이 형성됐다고 할 수 있겠다. 람한은 본격 데뷔
이전에는 블로그와 SNS에 작품을 게시해 회자됐고, 그녀의
인스타그램을 본 큐레이터에 의해 미술관 전시에 섭외됐으며, 그 일을 계기로 웹에 최적화된 화면을 실물로
전시하여 ‘디지털 페인터’라는 수식어에 안착할 수 있었다. 일러스트레이터, 만화가는 물론 전통 회화작가와 구별되는 디지털 페인터
람한은 자기를 분기점으로 매체 변화의 새로운 수사를 떠안았다.
라이트박스에 디지털 일러스트를 프린트한 ‘Room type’(2018) 연작을 람한에게 의뢰 · 소장한 서울시립미술관은
일단 이를 뉴미디어로 소개하면서 미술사의 다음 과업까지 내비친 바 있다. “이 작품은 디지털 페인팅이라는
디지털과 회화가 결합한 새로운 장르를 보여준다. 일반적으로 회화 장르로
통칭되는 ‘페인팅’이라 하면 캔버스와 붓을 사용하는 제작방식만을
떠올리기 쉬우나, 람한의 디지털 페인팅은 태블릿과 포토샵으로 제작된다.
이처럼 모호한 경계를 지니며 새롭게 구축되는 장르들은 기존까지 구축된 소장품의 부문에 편입되기 어려운 지점이 존재한다. 이 작품의 경우 서울시립미술관의 소장작품 관리 시스템 뉴미디어 부문에 등록되어 있다.”1
람한은 국내 미술계가 신생공간을 통해 발화했던 신구세대의 간극과 제도적 책임론의 이슈가 꺼져갈 때쯤, 그 자리를 대신하며 등장한 매체 담론에 적용되기에 적합하였다. 80년대생
작가가 미대를 졸업하고 느꼈던 생계의 어려움과 작가되기의 막막함이 그 자체로 나름의 주된 경향이 되어 떠오르자,
다음은 그들과 이후 90년대생 작가들의 신선한 등장을 필요로 했고 거기에는 사회학적 세대론과
결합된 포스트미디엄의 이슈가 있었다. 《유령팔》은 인터넷 공간 안팎의 비가시적 연결성을 가지고 관련
주제와 감각을 엮어낸 전시였다. 젊은 세대가 구사하는 신종 미술 어법과 온라인 환경에 쏠린 이목은 《21세기 회화》(하이트컬렉션,2021),
《조각충동》(서울시립북서울미술관, 2022), 《히스테리아: 동시대 리얼리즘 회화》(일민미술관,
2023)등의 전시에서도 부분적으로 이어 살펴졌다. 이들 전시는 MZ세대 관람객은 물론, 특히 동세대 작가 사이에서 큰 관심을 받았다.
“이미 2010년대부터
젊은 작가들이 쌓아온 고민과 변화를 바탕으로, […] 작가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방법론을 사용하는지를
짚어볼 수 있도록 전시를 구성하였다. […] 우선 분리된 표면 (이미지)과 몸체 (물리적 실체) 간의
관계 설정, 가상공간에서의 제작이 실재로 출력될 때의 낙차, 온라인
유통과 유동성, 일시성의 결합 같은 매체 중심의 시도를 살펴볼 수 있다.”2
람한은 디지털 스크린에서 극명해지는 RGB컬러를 활용해 매체성을 강조하고, 정방형 패널을 의도적으로 자주 사용함으로써 인스타그래머블한
작업의 주제를 선명하게 가시화했다. 인스타그램 계정을 작업 발표와 아카이빙 포트폴리오로 활용하고, 카탈로그와 광고에 등장한 자신의 사진 이미지도 편집해 공개해두었다. 현재 8만8000여 명의 팔로워는 인플루언서 람한의 정체성을 계량화한다. 당연하게도 거기에는 온전한 사실성은 없다. 람한은 경계가 불분명한
작풍이 미치는 영향력을 현시대를 투사하는 용어로 마침 사용할 뿐이다. 불황의 시대에 진력난 대중이 희구하는
버블경제의 찬란함처럼, 람한의 페르소나가 그렇게 빛난다.
“인스타그램에는 절망이 없다. 그래서
어딘지 괴기스러워 보인다. 흔히 청년세대에 대한 이야기들은 대개 절망과 포기로 수렴된다. 청년들의 삶이 얼마나 어려운지, 그로 인해 우울, 좌절, 증오, 혐오 같은
현상이 얼마나 일상화되었는지가 늘 문제시된다. 그런데 정작 청년세대가 보편적으로 이용하는 SNS에는 그런 흔적이 없다. 그곳은 언제나 밝고 희망차고 화려하다.”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