람한(b. 1989)은 디지털 페인팅을 주된 매체로 사용해오며, 기억과 환상, 가상과 현실 사이의 불분명한 경계를 다뤄왔다. 특히 그의 작업은 현재와 과거의 팝·서브 컬처, 그리고 미디어에 의해 체험된 디지털 노스텔지어에 대한 관심을 바탕으로, 대중매체 안에서 복제되고 열화되어 진위가 모호한 유사 기억을 잘라 붙여 왜곡된 제3의 장면을 소환하고, 그것을 수용자의 체험으로 치환시킨다.


람한, 〈Cracked〉, 2017 ©람한

람한은 캔버스라는 전통적인 재료 위에 그림을 그리는 기존 회화와 달리, 태블릿에 그림을 그리고 포토샵을 통해 후작업을 하는 디지털 페인팅을 실험해 왔다. 디지털로 창작되는 람한의 상상적 세계는 전통 회화와 달리 물성 없는 파일의 형태로 시작해 다양한 디바이스로 출력되어 물질과 비물질 사이를 자유로이 오가며 무한히 확장된다.
 
람한은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로서 인터넷의 발전에 따른 소셜미디어 환경 속에서 성장했다. 따라서 자연스럽게도 그의 작업에 많은 부분은 온라인에서 가시화되며, 실제 삶의 경험과 가상 세계 사이에서의 유동적인 교환으로 드러난다.


람한, 〈룸 타입_03〉, 2019, 디지털 이미지, 종이에 아카이벌 프린트, 프레임, 101.6x152.4cm ©람한

람한이 영감을 받은 이미지들은 주로 소셜미디어에서 발견된다. 작가는 이러한 이미지를 디지털 페인팅으로 제작한 뒤, 사각형의 라이트박스에 전시하는데, 이는 인스타그램을 비롯한 소셜미디어 화면의 형식을 연상시킨다.
 
갤러리와 미술관에 작품이 전시되고 난 후에는 작품을 잘라 그 조각들을 소셜미디어 상에 다시 한번 공개함으로써, 실재와 가상의 경험을 재활용한 이미지의 순환을 만들어낸다.


람한, 〈룸 타입_02〉, 2018, 라이트 패널에 디지털 프린트, 300x300cm ©람한

이처럼 디지털 환경과 밀접하게 맞닿아 있는 람한의 작업 과정 속에서 탄생한 이미지 안에는 정확한 레퍼런스를 추측하기 어려운 배경과 분위기가 담겨져 있다. 그가 가공한 이미지들은 미디어나 매체를 통해 간접적으로 기억에 각인된 장면들과 새로 구축한 세계에 존재하는 오브제들의 재배치를 통해 여러 세계가 하나로 겹쳐지고 파편화된 장면적 연출을 그려낸다.
 
그 결과, 람한이 그려내는 장면은 실재하는 것처럼 익숙하면서도 특정한 시공간이 뒤섞인 낯선 가상의 공간이 된다. 


람한, ‘룸 타입’ 연작, 《유령팔》 전시 전경(북서울미술관, 2018) ©휘슬

이러한 람한의 작업이 본격적으로 미술계에 주목을 받게 된 것은 2018년 북서울미술관에서 열린 단체전 《유령팔》부터였다. 해당 전시는 ‘아날로그와 디지털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지 않는 80년대생 작가들’을 조명하며, 일상의 일부가 된 웹 공간에 대하여 다루었다.
 
이 전시에서 람한은 그의 첫 번째 연작 작업인 ‘룸 타입’을 처음 소개하며, 기존의 작업과 새로운 방향성을 알리기 시작했다. ‘룸 타입’ 연작은 작가가 처음으로 시도한 대형 설치 작업으로, 이는 디지털 출력, 리소그래피와 모니터를 통해 선보였던 기존 작업 방식에서 벗어나 독립적인 서사를 구축한다.


람한, 〈룸 타입_01〉, 2018, 라이트 패널에 디지털 프린트, 300x300cm ©람한

이 연작은 호텔 객실에 대한 이미지를 환상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는 객실에 대한 작가의 개인적이고 내밀한 기억과 생각을 바탕으로 재구성된 장면이다. 작가는 편하게 쉴 수 있도록 만들어진 이 공간에서 막상 아무것도 바꾸거나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모순을 발견하면서, 그 안에 개인적으로 애착을 가지고 있거나 기억 한 켠에 자리한 사물들을 모아 보고자 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가상의 공간은 작가만의 내밀한 이야기가 담겨 있는 사적 아카이브가 되는 한편, 이후 전시공간이라는 공공장소에서 거대한 사이즈로 옮겨져 관객과 마주하고 소통하며 소비된다.


람한, ‘외톨이’ 연작, 《유령팔》 전시 전경(북서울미술관, 2018) ©휘슬

이와 함께 선보인 또 다른 연작 ‘외톨이(Object)’는 거대한 ‘룸 타입’ 그림에서 조명받지 못한 작은 기물들을 따로 크롭해 만든 그림이다. 람한은 이 작업에서 소외받는 물건들을 조망하고 서사를 부여해, 마치 칸 만화에서 무언가 클로즈업샷으로 대상에게 감정, 감각적인 몰입을 유도하듯 가로세로 90cm 크기의 작업으로 재제작하였다.
 
이러한 방식은 작업의 일부를 크롭해 인스타그램에 올려 왔던 작가의 온라인 아카이브 및 전시 방식이 현실의 영역에서 새롭게 시도된 것이기도 하다.


람한, 〈수베니어01_06_F〉, 2019, 종이에 잉크젯 프린트, 33x33cm ©휘슬

이 두 연작의 연장선상에 출발한 또 다른 연작 ‘수베니어’는 여행지에서 느끼는 환상과 거짓 기억, 왜곡된 판타지를 접시와 티컵 등 기념품의 형태로 풀어낸다. 이 이미지들은 여행지마다 흔히 발견할 수 있는, 어쩌면 특별할 것이 없는 사물에서 느껴지는 허무함과 부질없음, 그럼에도 갖고 싶어지는 마음의 이중성을 내포한다.
 
한편, 2020년 부산비엔날레에 참여하며 제작한 연작 ‘케이스’은 인간과 동식물이 결합해 하나의 새로운 신체를 이루는 혼종적 형상을 담고 있다. 화면의 매끄러운 질감과 부드러운 그라데이션, 광택 처리는 이러한 이종 간의 결합이 더욱 액화되는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듯한 환상성을 자아낸다.


람한, 〈Case_01_01(독소)〉, 2020, 디지털 페인팅, 라이트 패널, 100x100cm ©부산비엔날레

이러한 ‘케이스’ 연작에서도 엿볼 수 있듯이, 람한의 디지털 페인팅은 점차 시각적 촉각성이 강조되어 나타나기 시작했다. 람한은 특정한 서사 없이 오직 감각을 통해서도 관객의 공감을 이끌어 낼 방법에 대해 고민하였고, 이는 곧 시각적인 자극을 주는 장치와 방법을 한 화면에 집약할 수 있는 표현 방식에 대한 탐구로 이어지게 되었다.
 
예를 들어, 람한은 질감을 표현할 때 1차로 회색 하이라이트 표현을 한 다음, 2차로 그 위에 하얀 점을 덧칠해 평평한 레이어에 볼록 튀어나온 듯한 착시를 준다거나, 특정 부분에 집요하게 디테일을 끌어올리는 대신 나머지 부분은 흐릿하게 처리하여 집중 효과를 높인다.


람한, 〈Case_01_02〉, 2020, 디지털 페인팅, 라이트 패널, 100x100cm ©부산비엔날레

람한은 이러한 표현적인 효과를 모아 감각을 극대화하는 방식을 ‘시각적 ASMR’이라 표현한다. ASMR이 소리를 통해 그 대상의 질감을 상상하게 만드는 데에서 나아가 마치 실제로 감각하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듯이, 작가는 시각물에서도 유사한 쾌락의 지점이 존재한다고 보았다.


람한, 〈Souvenir study (hatchery)〉, 2022,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 103x210cm ©휘슬

2022년 휘슬에서 열린 개인전 《Spawning Scenery》를 통해 람한은 그가 작업에서 추구하고자 하는 감각의 경험적 측면을 대중과 공유하고자 하였다. 전시의 제목은 가상의 공간에서 무작위로 출현하고 병렬되는 이미지와 풍경을 의미한다. 여기서 단어 ‘스포닝(Spawning)’은 컴퓨터 프로그램에서 개체가 쏟아지듯이 출현하는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람한은 “어디서 본 듯한 풍경이라는 게 실물이 아니라 실은 영화나 게임을 통해 노출된, 만들어진 이미지를 떠올리는 건 아닐까?” 생각하며, 오늘날의 ‘산란하는 (이미지의) 풍경’을 시각적인 동시에 촉각적인 방식으로 그려냈다.


람한, 〈I am relieved〉, 2022,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 라이트 패널, 130x85cm ©휘슬

그의 작품에는 귀엽고 아름다운 동식물, 인물이 등장한다. 화려한 색상으로 표현된 대상들은 정체를 알 수 없는 끈적이고 반짝이는 물질로 한 데 뒤엉키고 꿈틀댄다. 가령, 전시작 중 하나인 〈I am relieved〉는 전작보다 더 끈적이는 듯한 질감의 피사체를 등장시킨다.
 
당시 작가는 팬데믹 이후 매일 자신의 점막을 훑어가며 몸 상태에 관하여 질문하는 상황과 여러 매체에서 신체 반응에 대해 떠드는 상황을 보며, 보고 만질 수 없는 몸 내부의 조직을 상상하는 기이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를 시각적으로 풀어낸 작업이 바로 〈I am relieved〉다.


(좌) 람한, 〈Save our souls_02(seal)〉, 2022,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 15x15cm / (우) 람한, 〈Save our souls_03(yorkshire terrier)〉, 2022,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 15x15cm ©휘슬

또한 그의 작업에 등장하는 크리처들은 연약한 요소를 지니고 있다. 대부분 작고 털이 부드러운 토끼, 고양이처럼 보이는 생물들이다. 그의 작품 한편에 등장하는 이 크리처들은 주인공이자 작업의 서사를 이끄는 길잡이 역할을 하고 있다.
 
전시작 중 하나인 ‘Save our souls’ 연작은 작가가 그동안 출현시켰던 동물들을 독대하기 위한 작품으로, 외양은 비록 약하지만 전투력은 높아 보이는 작은 괴물들을 전시장 곳곳에 배치했다.
 
아울러, 이 전시에서 작가는 그가 집중해온 가상세계, 판타지에 대한 관심을 VR과 3D 조각을 통해 더욱 구체적으로 표현하였다. 특히, VR 작품인 〈Uninvited-Tamagotchi〉는 관객을 디지털 세계로 전이시켜 그가 창조한 크리처를 더듬어보도록 유도하며, 시각과 촉각, 가상과 현실 사이의 경계를 느슨하게 만든다.


《Inaudible Garden》 전시 전경(휘슬, 2024-2025) ©휘슬

그리고 가장 최근의 개인전 《Inaudible Garden》(휘슬, 2024-2025)은 페인터로서 작가의 고민과 회화성을 보여주는 자리였다. 그동안 ‘룸 타입’ 연작을 시작으로 꾸준하게 기억, 꿈과 같은 디지털 노스텔지어와 현실의 불분명한 경계를 다뤄왔다면, 전시 《Inaudible Garden》에서는 디지털 매체에서의 회화적 기법을 적극적으로 선보였다.
 
이 전시에서 람한은 전통 회화의 기법을 차용하여 그동안 선보였던 구체적인 형상에서 벗어나는 시도를 통해 그만의 회화 언어에 대한 고민을 보여주었다. 특히 전시의 제목 《Inaudible Garden》은 람한이 줄곧 무의식적으로 그려온 식물과 여성을 주제로, 디지털 가상세계에서 구현되지 못하는 생명력과 자연의 본질에 대한 자신의 독특한 감각을 표현한다.


《Inaudible Garden》 전시 전경(휘슬, 2024-2025) ©휘슬

또한 람한은 자신의 그림을 줌인하고 프레이밍함으로써 해당 주체를 강조하고 추상적인 형태와 패턴으로 표현하였다. 이로 인해 작품은 관객으로 하여금 그 작품이 무엇의 일부인지, 아니면 작게 그려서 크게 확대한 것인지 알 수 없게 하며, 시작과 끝의 경계가 모호한 열린 그림으로 다가오게 된다.
 
대상의 본질을 추상화하는 데 중점을 두고 기존의 모더니즘 추상 화가들이 영원성과 시간의 개념을 주요하게 다뤘다면, 람한의 디지털 추상 회화는 디지털 세계와 현실을 오가며 포착한 그 사이의 것들의 복합적인 감각을 표현한다.


람한, 〈Bye Bye Meat〉, 2023,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 라이트 패널, 스크래치 드로잉, 150x200x9cm ©람한

이렇듯 람한은 이미 지나가버린 시간, 존재하지 않는 세계, 규정할 수 없는 존재와 불분명한 노스텔지어를 주제로, 친숙하지만 낯설고, 아름답지만 기괴한 몽환적인 장면들을 선보여 왔다. 또한 작가는 디지털 매체와 환경의 속성을 작업으로 전유하여 실재와 가상의 경험을 교차해 관객에게 날카로운 잔상과 감각의 편린을 남긴다.  

"구체적인 감정이나 장면이 판타지로 표현될 때 보는 이의 상상력을 자극하며 구체적으로 공감을 불러일으킨다고 본다." (람한, Emoment 인터뷰 중)


람한 작가 ©월간미술

람한은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애니메이션을 전공했다. 개인전으로는 《Inaudible Garden》(휘슬, 서울, 2024-2025), 《Spawning Scenery》(휘슬, 서울, 2022), 《나이트캡》(유어마나, 서울, 2017) 등이 있다.
 
또한 작가는 《CUTE》(Somerset House, Kunsthal Rotterdam, 네덜란드, 2025), 《게임사회》(국립현대미술관, 서울, 2023), 《그레이박스 이후: 수집에서 전시까지》(부산현대미술관, 부산, 2022), 《SF 2021: 판타지 오디세이》(북서울미술관, 서울, 2021), 2020 부산비엔날레 《열 장의 이야기와 다섯 편의 시》(부산현대미술관, 부산, 2020), 《Fantasia》(Steve Turner Gallery, LA, 미국, 2019), 《유령팔》(북서울미술관, 서울, 2018) 등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람한은 이 외에도 패션, K-팝, 전자제품, 출판 등 다양한 종류의 브랜드, 아티스트와 왕성한 협업을 진행해 오고 있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