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세진, 〈밝게, 지혜롭게〉, 2014, 광목에 먹지,31.8 x 40.9 cm ©권세진

누구나 자신이 속했던 공간 혹은 집단에 대한 기억이 있다. 이는 그곳에서 일어난 어떤 특정한 사건에 대한 기억일 수도 있지만, 딱히 명확하게 묘사하거나 회상할 수 없는 흐릿하고 묘한 ‘분위기’에 대한 기억일 수도 있다. 가령 같은 학교의 같은 건물을 쓰더라도 각 학급이나 학과마다 다른 분위기를 가지고 있듯, 규정지을 순 없지만 사적인 것도 아니면서 그곳의 구성원 사이에서는 공감할 수 있는 모호한 감정(혹은 기억)은 분명 존재한다.
 
《오토세이브 : 끝난 것처럼 보일 때》전을 통해 커먼센터 405호에 자리잡은 권세진의 〈밝게 지혜롭게〉는 폐교된 초등학교의 기억을 다룬 이전작 〈Blurred Landscape〉의 연장선상에서 졸업앨범 속 사진을 기반으로 유년시절 학교라는 시스템의 기억과 분위기를 전시장으로 옮겨놓는다. 여기서 작가는 본인의 개인적인 ‘추억’이나 ‘트라우마’를 이야기하지 않는다. 권세진은 철저히 작품 뒤에 서서 본인이 겪었던 제도 속에서 통용되던 분위기와 감정을 풀어낸다.
 
〈밝게 지혜롭게〉를 구성하는 작품의 소재가 되는 사진 속 사실상 어른들을 위한 ‘쇼’에 가까웠던 운동회나, 영문도 모르고 찍는 단체사진을 비롯하여 ‘국가’라는 개념을 받아들이기 전부터 체득해야만 했던 국민의례의 풍경은 비단 작가 자신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한국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20~30대의 관객이라면 누구나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유년시절의 ‘분위기’를 재현하는 장면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권세진의 작품들은 졸업앨범 속 사진을 소재로 만들어졌지만, 각각의 사진이 지칭하는 것이나 사진을 기반으로 한 회화가 말하는 것과는 조금 다른 지점을 이야기한다. 오래된 사진은 과거 어느 순간의 장면을 그대로 옮겨와 사진 속 인물 혹은 그것을 찍은 사람의 특정한 기억을 불러오거나 관객 역시 자신의 과거 기억을 바탕으로 이를 해석하고 받아들이게 한다. 한 장의 사진은 그것이 품고 있는 정보가 너무 많거나 혹은 딱히 추려낼 정보가 없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결국 사진이 회화로 재조합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작가는 사진 속에서 강조하거나 앞으로 내세우고 싶은 특정한 정보나 기억을 선택하게 되는데, 〈밝게 지혜롭게〉 시리즈에서 선택된 요소는 바로 서두에서 다룬 ‘규정할 수 없는 어떤 분위기’ 그 자체라 할 수 있으며, 이것이 어떤 특정 순간의 기억만으로 형성되는 것이 아닌 여러 기억과 감정이 중첩되고 간섭하여 만들어졌다는 측면에서 이는 작가 특유의 채색방식(장지에 묽은 아크릴 물감을 층층히 스며들게 하기)과도 연결 지을 수 있으며 기존의 사진 기반의 회화가 갖는 표현방식과도 결을 달리한다.
 
전시기간 중 추가된 4점의 작업에서는 작가가 이야기하는 ‘묘한 분위기’를 좀 더 세밀하게 짚어낸다. 추가된 4점의 회화작품은 기존의 작품과 달리 그것의 재료가 되는 사진에서 좀 더 깊숙하게 트리밍한 프레임을 장지에 옮겨 담는다. 작품은 급식을 받거나 병원놀이를 하는 장면을 찍은 사진에서 손동작이 드러나는 부분만을 보여준다. 이는 얼핏 그것이 어떤 행동을 하는 것인지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모호한 장면이지만, 특정 기억이 아닌 유년시절의 학교 시스템의 분위기와 기억 그 자체에 집중하게 한다.
 
한편 4점의 작품과 함께 전시 도중 추가된 요소인 전시공간의 내부의 틈새와 속살에 칠해진 금분은 〈밝게 지혜롭게〉를 구성하는 회화 작품들과 비교하면 다소 생뚱맞은 행동으로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작가는 405호를 자신이 채워나갈 빈 공간이 아닌, 그곳이 커먼센터이기 이전부터 그곳을 스쳐간 수많은 사람들이 남겨둔 흔적이 남아있는 하나의 캔버스로 상정한다. 그리고 가장 본인다운 방식, 마치 장지에 색을 물들이는 듯한 느낌으로 공간에 또 다른 레이어를 남긴다. 이는 한 낡은 벽지와 마감재 이면에 뭔가를 숨겨둔 듯한 인상을 풍기는 동시에 어떤 측면에서는 405호에 켜켜히 쌓인 과거의 흔적들을 자신의 작업으로 가져가는 ‘낙관 찍기’로 읽힌다.
 
이러한 변화를 통해 권세진은 자신만의 독특한 기법을 통해 성취한 작품 자체의 조형성만을 내보이는데 머물지 않고, 작품 내적인 측면에서도 작품의 흐릿한 의도를 분명히 보여주는 성과를 이루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권세진의 〈밝게 지혜롭게〉는 《오토세이브 : 끝난 것처럼 보일 때》전이라는 큰 맥락에서 봤을 때, 마치 오롯한 개인전으로 작동하며 16명의 작가들 중 가장 독립적인 공간으로써 (다소 모순적이지만) 전시 기획의도에 충실히 부합하는 방식으로 존재했다고 할 수 있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