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그가 보여주는 화면의 세계는 꿈이나
SF(Science Fiction)물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차원이 뒤섞이고 바닥이 일어나고
사람들이 공중에 떠 있거나 괴이한 형태로 변형이 되어 있거나 구부러진 형태로 환원되는 장면들. 꿈의
세계가 SF 즉 공상과학과 맞닿아 있다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지점이다.
과학이 무의식 세계의 비현실적 이미지들을 현실 속에 실현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꿈에서나
가능했던 초월적 상상 세계는 이제 진짜 문자 그대로 현실이 되고 있다.
과학기술의 발전이 상상과 꿈이라는
비물질적 세계를 물질세계로 옮겨와 주는 제1선의 전령이 되었다고 모두가 입을 모으는 시대가 올 것을
알았는가? 단순히 편리성과 효율성을 극대화하는 기술문명의 지배가 아닌,
땅을 기반으로 한 세계를 수중 세계로 완벽하게 이동시켜 버리는 것과 같은 세계 말이다. 첨단과학이
만들어 내고 있는 세계의 본말이 궁극적으로 비합리적, 비과학적 세계라는 역설을 보게 된다. 기술로 실현되어 우리의 감각세계로 들어오기 전에는 허무맹랑한 망상이나 나약한 자들의 믿음 정도로 취급되어 온
것이 꿈과 상상이지만, 대부분의 과학기술 발명의 역사는 그런 인식들이 역전에 역전을 거듭한 반복의 역사였다.
딱히 뭐라 규정할 수 없는 대상은 완벽히 새로운 것의 도래 일 가능성이 크다. 온라인과
현실을 접목시킨 새로운 가상세계이자 새로운 현실세계, 또 하나의 유니버스인 메타버스(Metaverse). 온라인 공간에서 나를 대신해 주는 캐릭터인 아바타(Avatar)는
이미 20년 도 전에 존재했지만, 가상(假象)이라는 설정을 한 치도 벗어나지 않은 인형놀이와 같은 개념에
머물렀었다. 그러나 현실과 초 연결된 메타버스 속 아바타는 실질적인 쇼핑을 하고 공연을 관람하고 새로운
안무를 배우고 스타의 사인회에서 사인을 받아오는 등 현실의 거의 모든 것을 살아내고 있다.
지금까지
그 무엇으로도 규정되어 보지 못한 어떤 세계가 과학기술 위에 구축되고 있다. 이로서, 비언어적, 비합리적, 규정불가의
세계는 거짓이 아닌 진실, 현실의 또 다른 버전이라는 위상으로 재탄생하고 있다. 여기서, 특정 구조와 철학, 세부요소들을
갖춘 것을 하나의 세상이라 한다면, 박다솜의 ‘기울기’ 세계도 새로운 유니버스로 존재하게 된다. 무의식 속 암울한 터널을
빠져나오며 공포와 슬픔의 현실을 정면 응시한 작가의 대안인 ‘기울기’,
이 가상적 프레임은 박다솜의 유니버스이자, 현실과 초 밀착 공존하는 일종의 메타버스가 된다.
박다솜의 ‘기울기’는 또한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첫째, 대상이 사람이든 사물이든, 기울기 그 자체가 대체 쓸모 있는 화두인가 라는 질문이다. 이것은
인간 존재에 대한 근원적 연민과 긍휼의 마음에서 비롯된 작가의 독특한 관점이자 새로운 가치로서, 흥미롭게
주목해 볼 대목이다. 둘째, 사람과 사물 모두가 기울기라는
연민의 프레임을 통해 동등한 관계를 맺게 된다. 기울기로 치환시키는 행위는 위계를 없애는 주술이 된다. 모두가 기울기로 치환되면 공평해진다. 셋째, 이것은 또한 어쩌면 가장 예술적인 시도이다. 예술이 본질적으로 잉여라는
맥락을 따라가다 보면, 박다솜의 예술은 잉여의 세계 중에도 가장 극단에 놓여 있음을 알 수 있다.
쓸모없음, 비합리, 무의식, 불연속, 소멸, 해체
등에 기반한 기울기의 세계. 그것이 지닌 예술적 가치는 크다. 프로이트가
정신분석학에서 꿈을 현실과 의식세계를 해석할 수 있는 중요한 단초로 보며 꿈의 위치를 격상시켜 놓았지만, 지금
우리는 전혀 다른 차원으로 넘어가 있다. 물리학자, 수학자, 엔지니어, 과학자들은 세상을 대부분의 비선형(Non-linear)과 혼돈으로 가정하고 그 기반 위에서 다양한 연구 과제와 그 해결책을 찾아가고 있다. 꿈이나 환상이 외설이라고 단언할 자는 누구인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도출해낸 박다솜의 ‘뜨거운 기울기’. 그 프레임과
구조가 만들어 낸 메타버스가 쓸모없는 외설이라고 말할 자는 누구일까?
글. 김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