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다솜, 〈잠수함 안에서〉, 2019, 종이에 유채, 150x120cm ©박다솜

종이는 구겨지고 찢어지는 성질을 갖는다. 종이를 자신의 콤포지션의 바탕으로 선택한 작가는 자신의 의사-캔버스를 일단 찢는 것으로 작업을 시작한다. 사각형의 종이는 작가의 마음 상태나 조건에 따라 다른 식으로 찢어지고, 우연성을 제한하는 마음으로 이의 일정 상태의 불가항이 콤포지션에 놓일 수 있는 완전한 무대로서의 자격을 상실한다. 바탕이 의당 가져야 할 전제를 거부하므로, 바탕이 우연적 퍼포먼스 자체이기에, 무엇보다 관객의 시선을 끄는 것이 울퉁불퉁해진 종이 가장자리이기에, 이미 여기서부터 박다솜 작가의 작업의 특수성을 생각해보아야 한다.

종이의 속성이 먼저 눈으로 들어오거나 종이의 속성을 전면에 드러내는 작업의 성격에 대해. 통상 찢어진 종이는 실수이거나 종이-이후의 상황이거나 종이의 끝이다. 찢어진 종이는 더 이상 종이가 아니다. 종이의 뒤나 끝이 종이에서 선행한다. 아닌 종이의 끝을 종이에 앞서 보여준다. 유사-캔버스는 고장이 났거나 망가졌거나 뒤틀려 있다. 사각의 프레임이란 관념을 온갖 형상의 종이, 이미 망가진 종이가 대신한다. 뒤가 앞에, 결론이 시작에 선행한다. 시간의 질서, 논리적 전후관계가 비틀려 있다. 종이이므로 겨우 벽에 세워진 종이는 그대로 작가의 망상이나 착란, 혹은 멋대로의 연출을 잘 견뎌낼 것이다.

캔버스를 통해서도 그런 작업 방식은 숱하게 가능했고 가능할 것이지만, 작가의 방식은 더 극단적이다. 자신의 인물이나 형상들, 이미지를 견고한 바탕이나 단단한 지지대나 안전한 배경은 허락하지 않기에, 이런 영상화가 어지럽고 들쭉날쭉한 바탕을 고집한다. 일부러 찢은 종이, 벽에 세워진 것이라기보다는 벽에 겨우 매달린 것에 가까운 바탕을 먼저 고백하는 이런 전략, 시작도 하기 전에 패배를 자인하는 이런 무능은 물론 세계로부터 등을 돌리는 적절하고도 좋은 방법일 것이다. 삶은 동시에 죽어가는 것이고 시작은 이미 결론에 사로잡혀 있고 인정은 곧 자기-부정에 다름 아님을 계속 보는 사람은 아무것도 아닌 대신 죽음과 결과와 부정에 집착한다.

혹자는 이런 전후관계 뒤집기를 선매 혹은 선제포용(preemption)이라고 불렀다. 예정된 결말, 자꾸 잊고 견제하는 결말인바 패배와 죽음에 마침내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대신에 내가 자처해서 불러들이는 것, 당하고 무너지기 전에 이미 맑고 밝은 눈/정신으로 환대하는 것, 나는 부재할 장면을 내가 연출하는 것, 그러므로 즐기는 것. 작가는 그런 뒤집기를 이미 알고 있다. 작가는 “상실을 내재한 변형”, “결말인 죽음”을 계속 보는 것, 그러므로써 “변형의 순간을 상실로 만들지 않기 위해, 상실에 함몰되지 않으려는” 전략을 구사하려 한다. 부단한 변화와 차이는 결국 상실과 죽음에서 멈출 것이다. 그걸 아는 사람은 필멸의 진리에 겸허하게 무릎 꿇거나 그 진리에 괄호를 치는 대신에 그 진리와 놀이를 시작한다.

상실에 함몰되지 않으려면 함몰에 합당한 자신만의 무대를 설치하고 그곳에서 합을 즐기는 것이다. 작가는 “꿈의 방법론”을 빌려와 자신이 “믿었던 것들이 즐겁게 무너지는 상상”의 무대를 설치한다. 한낱 꿈들, 편평한 이미지들, 납작한 기호들이 마구잡이로 자신들의 내적 논리에 따라 무한히 결합하고 대체되는 그런 꿈의 방법을 통해 작가는 죽음도 상실도 치워진 현실의 논리와 죽음과 상실의 진리 사이에서 이승을 견디고 즐기려한다. 비극은 아니다. 작가는 단단한 것들이 “즐겁게 무너지는” 무대를 불러온다.

심지어 작가가 즐겨 사용하는 색조는 노랑이다. 노란색은 명랑함과 긍정을 위한 색이다. 즐거운 몰락에 바쳐진 노랑. 무력하게 찢어지고 엉성하게 매달려있지만 그렇다고 비극도 우울도 초라함도 아닌 세계의 가능성. 꿈의 방법은 견고하고 단단한 것들의 보호를 받는, 관념의 질서에 종속된 현실을 추방한다. 논리와 질서 혹은 관념의 구조에서 감각은 오작동하면서 자기 생을 쟁취한다. 자신의 이미지, 인물들, 형상들을 보호하고 지켜줄 바탕을 만들지 ‘않으려는’, 이런 처음부터 실패를 전제한 암중모색의 ‘내부’를 읽거나 보거나 이해할 수는 없을 것이다. 감동이나 비극이나 교훈이나 처세나 감상과 같은 우리의 ‘전제’도 찢어져 있을 것이고, 너덜너덜한 큰 종이 한 장에 중요한 부분은 다 찢겨나간, 쓰레기통에서 발견한 종이조각들 같은 형상들이 오려붙여진 듯 그려진, 이 “종이에 유화”를 보기를 보아야 할 것이다.


박다솜, 〈식당〉, 2020, 종이에 유채, 188x151cm ©박다솜

작가의 장면에 등장하는 인간들은 한결 같이 벌린 입을 하고 있다. 작가는 이를 두고 “덩어리에 구멍이 난 것 같다”, “시공간을 잃어버리고 스스로를 망각할 정도로 무엇인가에 취한 순간의 표정을 의도한 것”이라고 말한다. 입의 기능을 잃은 구멍, 부착된 역할이나 기능에서 떨어진 구멍이 입과 동시적으로 보인다. 절정의 순간에 멈춘 입, 감정이나 욕망을 제거한 입, 입술 없는 입이다. 찢어진 종이 위에 그려진 유화이면서도 그나마 애써 찾아 제 자리에 놓으려고 하지만 너무 많은 상실되어 도통 어떤 전체나 재현성도 되찾기 불가능한 “종이에 유화”는 〈잠수함 안에서〉나 〈다리 사이〉, 〈식당〉, 〈좁은 곳〉과 같은 마치 어떤 이야기가 시작될 것 같은 제목을 달고 있다.

제목은 어쩌면 우리, 필사적으로 읽으려는, 필사적으로 읽게 되어 있는 우리를 속이려는 장치일지도 모르겠다. 잠수함 안에서의 의자에 맞아 있는 사람, 그 사람 앞에 테이블, 그리고 기타 등등을 기어이 본다고 해서 그러다 어떻게 하는 것인가? 혼밥족들을 위한 듯한 식당에 혼자이면서도 둘인 듯 앉아 있는 사람을 알아봤다고 해서 거기서 뭐가 오는가? 이야기를 유도하는 듯한 제목과 아무런 이야기도 만들 수 없을 만큼 희소한 인물이나 형상들과 반복적으로 보이는 ‘의자에 앉은’ 사람들이 전부이다.
 
2018년에는 “캔버스에 유화”로 작업을 하던 작가는 점점 더 “종이에 유화”로, 4각 프레임에서 둘쭉날쭉한 바탕으로 이동하고 있다. 벽에 종이테이프로 붙여두고 그린 이 그림들은 전시장에서 어떤 식으로 매달아야 할지 여전히 실험 중이다. 매체와 형식이 작가에 선행한다. 그나마 있던 재현성도 거의 사라지고 있다. 설사 현실의 중지인 꿈의 방법론을 끌어온들 이 꿈은 알아볼 수 있는 기표들이 알아볼 수 없는 방식으로 결합, 대치되는 전형적인 꿈의 방법도 아니다. 이 꿈은 구겨지고 찢어진 채로 버려진 종이들에서 겨우 찾아낸 부분 이미지들이다.

“몸이 변형되는 장면”을 보고 싶었다는 게 작가의 이런 무능한 화면의 동기/욕망이다. 그런데 작가도 자신의 작업이 ‘논리’를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가? 앉은 의자와 구분이 안 되는, 대충 그려도 인간으로 읽으려는 우리의 욕망에 의해 인간이 되어 있을 이런 멍 때리는,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한결같은 표정을 하고 있는 이 인간들, 딱딱하거나 오려지고 불여진 듯 그려진, 이 변형 중에 있는 인간들이 주인공인 이 상황을 보기야 하겠지만 본 그 이후의 과정들이 더 이상 일어날 수 없기에 아마도 우리가 ‘아는’ 꿈과 유비시켜 볼 수는 있을 것 같다. 작가는 자신의 이 끊어지고 무너지고 삭제된 인간들의 상황을 즐기는 것은 분명하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노란색이 그런 단서를 제공한다.

작가의 그림을 이해하거나 감상하는 데 끌어들일 바깥, 레퍼런스, 기억은 무익하다. 우리 역시 작가의 조건과 유사하게 임포가 된다. 서사나 논리나 질서를 무너뜨리려는, 인체를 종이처럼 납작하고 빈약한 순간으로 내몰고 그곳의 소멸을 선취/쟁취하려는, 딱딱한 의자와 물렁한 인간을 분리불가한 상태로 옮겨 놓으려는 이 그리다 만 듯하고 발견하다 만 듯하고 보다 만 듯한, 평면에 갇힌 사람이나 상황은 누차 말하지만 건조하고 우울하고 비극적인 것은 아니다. 이것은 어떤 실험이고 지우기이다. 회화와 인간을 보증해주었던 서사나 조건을 지우는 실험이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