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이하게 먼 세계: 최민영의 회화
“우리는 아직 자신을 드러내지 않은 어떤 존재에게 관찰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마크 피셔(Mark Fisher), 『The Weird
and the Eerie』(2016)
최민영의 회화는 어딘가 ‘다른 곳’에 존재하는 장소의 이미지들이다. 이 장면들이 정확히 어디인지, 언제인지 특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과거를 보고 있을 수도, 현재를 보고 있을 수도, 혹은 미래를 보고 있을 수도 있다. 아니면 그것은 대체된 과거, 인접한 현재, 대리된 미래일 수도 있다. 우리는 구체적이면서도 동시에 특별할 것 없는 장소를 들여다보고, 통과해
보고, 그 너머를 응시한다. 그것은 형광등 빛으로 물든 욕실
같은 가정적 공간일 수도 있고, 고요함이 장난치듯 싸우는 스라소니 한 쌍에 의해 깨진 설야(雪夜)의 풍경일 수도 있다.
많은 작품에서 시간은
밤이다. 우리는 야외에 있거나 그 경계에 서 있다. 대지와
하늘, 전경의 땅과 상공의 광활함이 펼쳐진다. 무언가가 일어나고
있다. 설표, 스라소니, 메기
등이 화면을 점유한다. 때때로 인물이 등장하기도 하지만, 최민영의
회화에서 인간은 대개 부차적이거나 보조적인 역할에 머문다. 자연 세계의 동물들이 우선된다. 이 생명체들은 자유롭게 배회하고 유영할 수 있는 본래의 서식지에 있을 수도 있다. 밤의 설원 위를 느릿하게 걷는 설표처럼. 혹은 물 밖으로 나와 바위
틈에 끼어 수면에 닿지 못하는 물고기처럼, 자유가 제한된 부자연스러운 환경에 놓여 있을 수도 있다. 이 동물들은 우리 자신의 은유일까? 우리는 그들 속에서 우리를 보아야
할까? 혹은 한때 우리였던 존재가 어떤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대형 고양이로 변형된 것일까?
회화 전반에는 느슨한
서사의 기미가 감돈다. 처음에는 각 작품이 고립된 한 순간을 묘사하는 듯 보인다. 그 순간들은 특별하기보다는 오히려 일상적이고 반복적이며, 다소 평범하다. 먹이를 사냥하거나 향을 피우는 일상적 의식처럼 순환적이다. 극단적인
비유를 들자면, 일상의 루틴과 친숙함을 반복적으로 보여주는 야생동물 드라마와도 같지만, 주변부에서 인공성과 부조화가 은근히 균열을 일으킨다. 이 회화들은
최대한의 일상성을 통해 최소한의 낯섦을 제시한다. 초현실주의를 살짝 스치면서도, 그 특유의 부조리한 꿈의 논리를 끝내 허용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작품은 미묘하게
우리를 불안하게 하고 자리에서 밀어낸다. 색채는 과도하게 채도 높게 포화되어 있으나, 여전히 우리가 아는 물질 세계와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 회색과 갈색의
세계가 아니라, 단단히 고정된 보라, 파랑, 초록의 세계이다. 마치 화면의 밝기와 채도를 조정하듯, 색은 재조율되었다. 켜진 상태. 자연스러운
듯 부자연스럽다.
비례 또한 우리를 교묘히
속인다. 동물은 기대보다 훨씬 크거나 작게 묘사된다. 어느
쪽인지 확신하기 어려울 때도 있다. 어떤 순간에는 거대하게 느껴지다가,
다음 순간에는 미세하게 축소된다. 나무와 산 같은 무생물적 요소들과 함께 이 인물들은 화면
안에 배치되고, 균형을 이루도록 무대화되고 조명된다. 이
점에서 최민영의 회화는 이야기만큼이나 이미지 구성 자체에 대한 몰두를 드러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