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재연, 〈On the blinking hill〉, 2021, 캔버스에 유채, 145.5x112.1cm ©유재연

애타게 바라던 순간들이 있습니다. 분명 대낮이었는데 깜깜한 밤을 보게 된다든지, 불특정한 시간대에 느닷없이 생뚱맞은 이미지가 떠오른다든지. 또는, 어떤 감정이 만들어낸 희뿌연 증기가 세상을 뒤덮으며 만물의 경계를 없앤다든지.

재연이와 만날 때마다 꼭 그런 느낌을 받곤 했지요. 경계가 사라지더군요. 예술과 삶, 더 나아가서는 삶과 죽음의 구분마저 흐릿해지는 기분이었습니다. 주로 어스름한 새벽빛이 재연이 그림의 화폭을 감싸고 있는데, 그런 빛이 아니었다면 이 아이의 섬세한 감성을 온전히 담아낼 수 없었을 겁니다. 이 이미지들이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향할지, 저는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마치 땅에 내려올 수 없는 존재처럼 느껴집니다. 너무 가벼워서 정착하지 못하는 걸지도 모르겠네요. 어쨌든 재연이의 이미지들은 구름처럼 떠다녀요. 

작품이 중력의 영향권을 벗어났다고 상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서 보다 보면 또, 엄청난 중력이 느껴지기도 하지요. 어떻게 된 일일까요? 재연이의 작품에는 극과 극의 시간성이 버무려져 있습니다. 어린 시절의 공상이 담긴 이미지인데도 어쩐지 우리는 이 작품들을 보면서 - 모든 게 멈추어 버린 - 죽음을 상기시키는 냄새를 맡을 수 있어요. 어떤 생각을 골똘히 하는 중에, 그것과 생판 다른 뭔가가 스멀스멀 기어 나와 머릿속을 잠식해 버리는 경우랄까요?

한국 미술은 중국 미술에 비해 실재적인 경향을 지니긴 하지만, 세상과 맞닿아 있는 정신에 영향받기도 하죠. 중국의 예술은 하늘이라는 관념 그 자체의 완벽성을 추구하는 반면, 한국의 예술에는 향을 피워 생긴 연기 속을 거니는 감각이 있습니다. 고려의 화병을 예로 들어 봅시다. 고려청자는 푸른 빛으로 화려한 존재감을 마음껏 뽐내지만, 사실은 공空의 정신으로 탄생한 예술품이지요. 청자의 자리는 ‘유有’와 ‘무無’ 사이의 어딘가가 아닐까요? 이런 중간 단계를, 저는 음조의 시학이라고 지칭하고 싶습니다.
 
어떤 이미지가 탄생하려면 그 전에 음조 주파수라는 단계를 거쳐야 합니다. 재연이 그림들의 경우에는 모호하고 어슴푸레한 빛으로서 음조가 탄생한 것 같아요. 제 추측이 틀렸다고요? 그렇다면 이 그림들은 동화책 삽화에 그칠지도 모르겠군요. 백번 양보해서 그저 그런 삽화일 뿐이라 하더라도, 이 역시 위장입니다! 어떤 방향으로 달려가는 척을 하다가, 마지막 순간에는 근본적인 출발지로 휙, 되돌아가는 것이지요.
 
저는 딱히 이 글의 정의를 내리지 않은 채 펜을 들었습니다. 단순히 편지를 휘갈기고 있다고 볼 수도 있겠고, 저 자신이 재연이 작품들과 연결되고 싶어 미약하게나마 시도해보는 몸부림이라고 볼 수도 있겠죠. 재연이 작품은 그들만의 독자적인 선을 그리는 듯 보입니다. 전략 없이 감각에 기반을 둔, 온전히 그들만의 방식으로 이루어진 화면이죠. 그럼에도 마냥 천진난만하진 않습니다. 작품이 ‘후기 근대Late Mordern’라는 맥락에 녹아 들어가 있고, 그러한 사실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저는 이 그림들이 후기 근대에 속하진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 특정 스타일에 매몰되기는커녕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냉담하게 대하는 태도 때문이지요. 

결국, 이 그림들은 그저 둥둥 떠다니는 모습으로 보이는 작업이거나, 표류 그 자체를 지향하는 작품이라고 해석됩니다. 아주 일상적인, 날씨가 변하는 것과 비슷한 현상이랄까요? 그 날씨에 우리가 왈가왈부해봤자 의미가 없지요. 아, 그러면 이 글은 날씨를 이야기하는 편지였나 봅니다. 편지글이 다 그렇지 않습니까? 오늘 날씨나 간밤에 꾸었던 꿈, 뭐 이런 것들에 대해 다루지요. 굳이 이야기하지 않는다 해도 크게 문제가 되진 않을 주제들입니다. 하지만 그런 주제를 깊이 파고들어 물음표를 꽂아 넣어도,1아무 문제없는 건 마찬가지 아닌가요? 바로 그게 예술이기도 하고요. 대상의 본성을 깊이 파고드는 태도 말입니다. 그런 태도야말로 예술이 필요로 하는 단 하나의 무게입니다. 다시 말해 중력이죠. 그 힘이 없다면 작품은 서서히 사라지거나 관객의 시야 밖으로 흘러나가고 말 겁니다.

저와 재연이는 마주 보고 앉아, 과거에 일어난 일들과 미래에 벌어질 일들에 대해 소소한 대화를 나누곤 했습니다. 그런 날에는 재연이의 그림들도 우리 사이에서 가만히, 뭔가를 기다리듯 조용히 앉아 있곤 했죠. 그림이란 자고로 그렇게, 때가 오기를 기다립니다. 인간과는 사뭇 다른 관점이겠지만, 그림들도 우리가 ‘인내’ 라고 부르는 개념을 지니고 있는 듯합니다. 인간은 버스를 기다리겠지요. 하지만 작품은 아주 모호한 무언가를 기다려야 합니다. 예를 들면 특정한 형태의 빛 같은 조건들 말입니다. 

제가 이 이야기를 처음으로 꺼냈을 때, 재연이는 말없이 빙그레 웃고 있었습니다. ‘그럴 수도 있겠네요’ 라는 표정이면서도, 이 모든 게 허황된 말이라는 걸 인지하고 있는 듯 보였지요. 자신이 만들어낸 그림이 그 특정 빛으로 탄생했든 다른 빛으로 완성되었든, 사실 재연이에게는 뭐, 그게 얼마나 의미가 있을까요? 작품들은 단지, 그러한 빛이 발생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알릴 뿐이죠. 따지고 보면 마술 속임수와 비슷해요. ‘저기에 분명히 아무것도 없었는데, 갑자기 생겼네? 짜자잔!’ 하는 것처럼요.
 
그렇게, 우리는 그곳에 앉아 있었습니다. 한순간 번쩍 정신이 들었다가도 스르륵 또다시 몽상에 잠기곤 했죠. 기다렸고, 또한 기다림 당했습니다. 점점 무거워지도록 말이지요.

 
1 '물음표를 깊이 꽂아 넣는 사람이 드물다'라는 문장을 썼던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의 표현을 인용했다. 잊힌 채 의식 한켠에 잠들어 있던 이 문구가, 이 글을 쓸 당시에는 되살아난 메아리처럼 내 머릿속을 가득 울렸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