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Night is Young》 전시 전경(갤러리룩스, 2019) ©유재연

이만 보(步)의 하루

“(…) 그리고 하염없는 희망들이
회색의 옷을 입고
일몰 이후의 저녁 안개처럼
다가온다.”
노발리스(Novalis), ‘밤의 찬가 Hymnen an die Nacht(Hymns to the Night)’1


한 공간은 한 장면을 구체화하는 장소 혹은 무대가 된다. 특정한 장면이 반복적으로 묘사되고 기억되듯이 우리는 일상에서 몇 가지 장면들을 재현/재연하면서 익숙하고도 낯선, 낯설고도 공포스러운 기억을 소환하곤 한다. 이러한 묘한(uncanny) 기억들은 고립과 비애, 꿈, 망각 등을 통해 이미 존재하고 있지만, 가시적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단편적이며 일상의 평범함 속으로 찾아온다. 지극히 진부하리만큼 감춰진 환상은 현실 밑에 위장되어 있어 기억과 환상이 완벽히 다른 형태의 낯선 침묵으로 자리잡은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일상의 상당 부분을 침묵이 지배하지 않는 장소들을 찾아다니며 침묵의 두려움에서 벗어나는데 할애한다. 그러나 모순적이게도 우리는 도시의 번잡스러움과 삶을 재촉하는 집요함에서 벗어나고자 발버둥치면서 우리를 에워싸는 질긴 적막을 찾아 숨는다.

유재연의 하루는 집을 나와 세 시간 거리를 왕복하여 걷고 이동하여 가지는 점심시간과 작업실, 미팅 그리고 밤 산책으로 이루어진다. 그의 하루 이동 거리는 이만 보(步), 런던을 찾아오는 여느 여행객과 다름없는 횟수로 채워진다. 유재연의 이만 보(步)는 보들레르(Charles Baudelaire)와 벤야민(Walter Benjamin)이 묘사한 만보객(flâneur)과는 사뭇 다르다. 이미 오래전에 현대인의 일상이 된 도시에서의 배회는 도시 풍경의 일부가 되어 거리를 두고 구경함과 동시에 누군가의 시선으로부터 관찰 당하는 대상이 된다는 점에서 유사하지만, 21 세기의 만보객은 낮보다 밤에 독보적인 존재가 된다. 군중의 일부이면서 관찰자로서 자신을 구별하고자 하는 만보객에 대한 모순은 밤에 공원을 걷는 사람들을 주목하는 작가 자신의 태도와 대상 모두를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낮 풍경과 현저히 다르게 땅거미가 내린 밤의 산책자는 뚜렷한 목적 없이 밤을 배회한다. 그러나 주변을 관찰하거나 사색하는 침묵의 여유보다, 길어지는 침묵에 대한 두려움과 낯섦에 질식되어 한 손에 든 스마트폰의 하얀 불빛을 바라본다. 유재연은 공원에서 밤의 만보객을 관찰하는 또 다른 형태의 행인으로서 대상으로부터 시선을 들키지 않도록 그들의 뒤에 먼 발치 머물러 있다. 딜런 트릭(Dylan Trigg)의 저서 ‘장소의 기억 The Memory of Place’(2012)에서 낯섦(uncanny)에 대한 특정 표현이 파편화되고 왜곡된 장소의 한 시각으로써 “무장소성(un-place)”에 대해 언급하듯이, 밤의 만보객은 현실에서의 물리적인 공간과 장소에 대한 해석이 불필요해진 스마트폰 안에서 무한히 표류한다. 그리하여 밤의 만보객, 즉 산책자는 걷는 행위에 대한 목적이 무색할 정도로 밤의 소멸된 형상으로 남는다. 이것은 우리에게 온전한 소외와 고립이 주는 불가사의하고 긴장감 있는 환상으로 우회한다. 더욱이, 어둠에 대한 본연의 두려움이 뿌리내리면서 밤은 연속적으로 떨어진다. 아니, 밤은 떨어진 것이다.


1. 19 세기 독일 초기 낭만주의 시인. ‘밤의 찬가’ (1880)는 여섯 편의 산문시로 구성된다.



푸른 달과 밤과 잠 그리고 꿈

“나는 잠을 잘 수가 없습니다. 오직 꿈을 꿀 뿐입니다. 잠 없는 꿈을.”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 ‘꿈 Sogni(Dreams)’


지나가는 행인들을 집어삼킬 듯, 유독 커다랗고 묘한 보름달 빛 아래 인위적인 빛의 네모난 스마트폰 액정을 어둠 속에서 바쁘게 위아래로 움직인다. 밤 산책은 운치가 있는 것 같다가도 조명이 많은 탓인지 깊은 어둠이 무색할 정도로 주변이 밝다. 오늘은 빛으로 가득 채워진 둥그런 달로 현실에서의 밤인지, 무대인지, 꿈인지 혼란스럽다. 어쩌면 나는 매우 혼몽한 꿈을 꾸고 있는지도 모른다.

밤 산책이라며 나는 어슬렁 어슬렁 공원과 골목 주변을 서성인다. 걷는 와중에 주변에 누가 지나가는지 어느 인기척에 동물이 도망가는지, 차가 나를 스쳐 갔는지도 모르게 멀뚱히 스마트폰 액정을 바라보고 있는 나와 마주한다. 주변을 훑어보니 오늘 밤은 평소와 다른 것 같다. 다른 때와 다른 온도 차로 어떤 밤의 기운을 원했던 것일까? 분명, 매일 밤 산책을 하는 나는 무심결에 같은 동선 안에서 빙빙 돌아 내 주변을 유영하는 미세한 공기들을 포착했을 텐데 오늘은 무언가 낯설다.

내일 비가 오려는지 밤 공기가 눅눅하고 푸른 녹슨 냄새가 난다. ‘푸른 녹슨 냄새’라니. 파란 빛도 아닌 푸른 빛은 문득 노발리스(Novalis)가 상실감과 그리움, 어둠에 대해 그린 비애와 망각의 ‘푸른 꽃 Heinrich von Ofterdingen’ (1802) 2과 벨라 바르톡(Béla Bartók)의 ‘푸른 수염 영주의 성 A kékszakállú herceg vára(Duke Bluebeard’s Castle)’(1911) 3과 같은 “환상 소설(Literatura Fantastica)” 혹은 비극적인 오페라에 가득할 것 같다. 마치 꿈과 망각과 같은 요소들을 통해 이미 존재하고 있지만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단편적인 사건들이 자기장처럼 나를 끌어들인다.

나의 눈과 귀는 더욱 날카롭게 곤두서 있다. 귀에 이어폰을 꽂고 플레이리스트를 돌려본다. 손가락으로 산만하게 아주 짧은 동작들을 반복한다. 결국 어제 들었던 음악을 다시 듣는다. 어쩌면 지금 이 시간 내가 원하던 음악이 아닐 수 있음에도 결국 나는 익숙함(heimliche)을 찾으려 애쓰고 있는 나의 모습과 마주한다. 카프카의 꿈에 관해 끄적거려 놓은 짧은 글들은 그가 깨어 있는 시간과 잠든 시간 그리고 꿈을 꾸고 있는 시간의 경계가 무너져 평범한 현실의 삶과 현실처럼 보이는 공포 사이에서 고통스러운 시간들을 함께한다. 우리는 잠이 들지 못하는 시간이나 깊은 잠에 먹혀 온갖 꿈을 꾸는 시간에도 꿈의 끝자락에 매달려 아주 많은 꿈을 꾸었지만,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 만큼 기억에 남는 것은 없다. 꿈은 단지 슬픔과 행복감이 뒤섞인 감정으로 변하여 우리는 유감스럽게도 모두 잊어버리고 만다.


2. 노발리스의 2 부작으로 구성된 낭만주의 소설 ‘푸른 꽃’은, 1 부 〈기대〉에서 시인 하인리히가 낯선 세계와 접촉하고 성장하는 과정에서 지나가던 나그네가 들려준 푸른 꽃에 관한 이야기에 매혹당하여 여행을 떠나는 이야기를 그린다. 상징과 은유로 가득한 2부 〈실현〉은 노발리스의 사망으로 미완으로 남는다. (민음사, 2003)
3. 20세기 민족주의의 민속 음악에 대한 경향을 연구한 작곡가 벨라 바르톡의 단막 오페라 《푸른 수염 영주의 성》은 후기 낭만주의와 인상주의의 양식을 보여준다. 본 오페라는 샤를 페로(Charles Perrault)의 전래 동화집 속 이야기를 기본으로, 푸른 수염을 가진 늙은 영주의 성에서 전 부인들이 차례로 여섯 개의 문을 차례로 열면서 다가오는 어둠의 고립과 비극에 대해 이야기한다. 



망자의 자리와 새
 
영어에 낮이 어둠 속으로 내려간다는 표현이 있듯이 과거 사람들에게 밤은 상상 속에서 ‘떨어지는 것(when night is falling)’이며 다가오는 밤은 ‘짙어진다(darkening)’. 이처럼, 우리에게 밤은 눈으로 보일 뿐만 아니라 모든 감각이 열려있어 낮과 다른 의식의 흐름과 행동 방식을 포용하도록 한다. “낮에는 눈이 있고 밤에는 귀가 있다”는 스코틀랜드 속담이나 존 헐(John M. Hull)의 저서 ‘바위 만지기 Touching the Rock’ (1990)에서 “시야와 달리 소리는 왔다가 사라진다”고 언급하듯이 소리는 어두운 침묵 속에서 악기의 아주 얇고 섬세한 활처럼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밤에 관한 클리셰일 수 있는 한 낮의 빛보다 한 밤의 어둠에서 죽음의 몽환과 그리움, 두려움, 고립에 대한 기억을 밤이 갖는 본질적인 요소로 주목한다. 숨막히는 긴 밤, 어둠 속에서 벌레와 나무의 기척만 들리는 망자들이 누운 자리를 걷는 것은 침묵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한 것일까? 아니면 각자가 짊어지고 가야 할 슬픔과 죄책감들을 덜어내기 위한 고백의 시간인 것일까?

헤르만 브로흐(Hermann Broch)는 ‘베르길리우스의 죽음 Der Tod des Vergil’ (1945)4에서 죽어가는 시인의 침묵의 행군에 대한 “침묵 속의 침묵”을 이야기한다. 그는 서로를 비추는 침묵이 결국 망자들을 위한 침묵이지 살아있는 이에게는 인색하다고 말하듯이, 묘지를 걷는 밤의 산책자에게 침묵은 오로지 살아있는 사람에게만 소환되는 두려움과 호기심, 낯섦과 욕망으로써 의미가 있을 뿐이다. 작은 크기의 회화 ‘Moving Graves’(2019) 시리즈와 〈Wetland Stroller〉(2019)는 관찰자가 초승달 아래 밤의 연극 무대를 꾸민 망자들이 자리한 무덤에 인격이라도 부여한 듯 이들 주변을 서성인다.

유재연의 블루 페인팅에서 현실과 환상, 잠시 잊혀졌던 유년기의 기억은 감춰진 욕망, 불안, 죄책감, 죽음과 같은 형태로 무덤을 배회하는 산책자와 새와 조우하는 산책자로 등장한다. 〈Bird Talk〉(2019), 〈Bird Waltz〉(2019), 〈Bird Waltz〔skater〕〉(2019)에서 화면의 왼편에 사람의 허리 즈음에 오는 크기의 새는 산책자와 춤을 추거나 그를 응시한다. 새는 정확히 어디를 관찰하고 있는지 그를 정면으로 마주치기가 어렵다. 새는 관찰하는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 존재이기도 하지만 죽음 혹은 평화의 메타포로 쓰이기도 한다. 예컨대, 버지니아 울프(Virginia Woolf)의 ‘자기만의 방 A Room of One’s Own’ (1929)에서 울프는 오찬 모임에서 고기 덩어리들과 그릇에 차려진 자두와 커스터드를 상상하면서 테니슨(Alfred Tennyson)의 시를 반복적으로 읊는다.

“(…) 찬란한 눈물이 떨어지네, 문 앞에 핀 시계풀에서. 나의 비둘기, 나의 사랑이 다가오네.”

작가가 품고 있는 희망 혹은 죽음과 환멸을 은유적으로 보여주듯이, 푸른 달빛 아래 롤러 스케이터와 스마트폰을 들고 있는 산책자가 새와 조우하는 모습은 대상보다 이 장면을 몰래 지켜보는 관찰자(작가 자신)의 시선을 주목해 본다. 우리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 새는 ‘나’의 두려움과 욕망을 대체하는 동경의 대상 혹은 우리가 이미 그 새가 되어 화면 안에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냐리투(Alejandro González Iñárritu)의 영화 ‘버드맨 The Bird Man’(2014)에서 분열적인 독백으로 모호한 현실과 환상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새를 통해 극대화되는 것처럼, 유재연의 블루 페인팅에 등장하는 새는 초조함과 불안함, 유년기의 기억을 담은 현실 부정의 연극 일지도 모른다.

4. 헤르만 브로흐는 제임스 조이스와 토마스 만 등과 함께 20 세기 초 의식의 흐름과 철학적 사색을 통한 글쓰기를 한 문학가이자 철학가이다. 장편 소설 ‘베르길리우스의 죽음’은 나치시절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감옥에서 죽음을 기다리며 쓰였다. 브로흐의 저서에서 “들릴 수 있는 것은 아직 들리지 않는 것들 사이로 다시 빠져들었다. (…) 소리의 부재가 가져온 침묵, 침묵이 펼쳐지는 수면 거울의 거울이다.” 라고 언급하듯이, 죽음을 앞둔 고대 로마의 시인 베르길리우스를 내세워 삶과 존재의 의미에 대한 사유와 성찰을 하고자 했다.



컷-아웃, 회화의 조각들
 
유재연의 달과 별들은 작업의 출발점에서 시작되는 가장 첫 번째 단계의 요소들 중 하나로 이들을 버무려 컷-아웃(cut-out)하고 화면을 재구성한다. 그는 권위적인 사각형에서 벗어나 10 호 이내의 레디메이드(ready-made) 형태의 프레임 안에서 화면을 느슨하게 다룬다. 캔버스 모양에 따라 회화에 접근하는 태도가 달라지듯 작가는 당연하게 염두하고 있던 틀에서 조금씩 벗어나려는 태도를 취한다. 육각형 페인팅 〈Escaping Moon〉(2019)은 슈리글리의 드로잉에 등장했던 문구에서 파생된 작업으로 달과 별은 늘 함께 존재하는 정형화된 인식 사이에 ‘어쩌면 달은 별로부터 도망치고 싶어하는 것이 아닐까?’ 라는 질문에서 시작된다. 유재연은 달의 측면과 둘의 관계성에 집중하여 색채–이미지– 프레임의 관계를 풀어나간다. 그와 동시에 물감을 한 겹씩 쌓는 방식보다 닦아내며 그려 나가는 행위에 집중하므로 회화가 갖고 있는 느슨한 측면을 환기한다.

두 번째 컷-아웃은, 손쉽고 즉각적으로 기록할 수 있는 아주 작은 낙서의 마커 드로잉(marker pen drawing)에서 시작된다. 작가는 달과 별, 빛, 사람, 움직임의 형태 등의 밤 입자들을 각각의 “파운드 푸티지(Found footage)”5처럼 사용하여 이미지들을 봉합한다. 즉흥적으로 채집한 마커 드로잉 이미지는 포토샵에서 색종이를 오려내 듯 하나씩 트레이싱하여 새로운 화면을 재조합 한다. 나아가, 프로그램에서 완성된 색면 드로잉은 인체 사이즈의 자작나무 판으로 납작하게 제작된 후, 나무 표면 위에 유화 물감으로 원본의 마커가 겹쳐지는 지점, 선이 지나가는 자리, 면과 면 사이에 다른 색 등 색칠공부 하듯이 얇게 나무 표면을 채워 나간다. 드로잉의 원본은 한 때 작가가 감정을 가감없이 배설했던 파편이었다면, 자작나무 판 위에 철저하게 계산된 색면은 더 이상의 사적인 기록이 아닌 스펙터클한 “조각-회화(piece-painting)”로 전복된다. 그렇다면 우리는〈Moon Disco 2〉(2019), 〈Moon Glow〉(2019), 〈Stage Earth〉(2019)를 “색면 회화(color-field painting)”나 “회화적 조각(painterly sculpture)” 혹은 “조각적 회화(sculptural painting)”로 불러야 할까?

초기 큐비즘의 콜라주는 현실에서 실제적인 부분들을 그림의 영역으로 가져옴으로써 다양한 형태와 매체 안에서 스스로를 강화해왔다. 피카소(Pablo Picasso)와 브라크(Georges Braque)의 초기 실험에서부터 만 레이(Man Ray)의 포토 몽타주,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William Carlos Williams)의 5 부작 시 ‘패터슨 Paterson’(1946)6 등까지 콜라주 기법이 회화, 문학, 조각, 영화의 범위를 넘어서 과도한 이미지나 요소들을 배설한다. 유재연은 자신의 작업을 “조각-회화(piece-painting)”로 지칭함으로써 드로잉(평면) –컴퓨터(콜라주) –조각(평면) –회화(평면) –조각(콜라주)의 순서로 이미지를 읽고 재현/구현하는 방식을 교차시킨다. 그리하여 그는 실제 풍경에 존재했던 대상을 지워버리고 물성을 밋밋하게 만듦으로 회화, 조각, 드로잉의 모호한 경계에서 단일한 ‘조각들(pieces)’로 바라보고자 한다.

세 번째 컷-아웃 〈Night Skater〉(2019)는, 10 호 캔버스와 여러 장의 트레싱지 위에 붓질한 이미지들을 스탑 모션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한 약 4 분짜리 영상 작업이다. 짙은 울트라마린 블루(ultramarine blue)의 물감 색이 푸른 달빛 아래 풍경과 산책자, 스케이트 보더를 익숙하면서 낯선 분위기 안에서 독보적으로 만들어준다. 어떠한 멜랑콜리일 수도 있지만 푸른 영상은 되려 지나치게 차분하고 의식적인 무심함이 돋보인다. 배경에서 들려오는 벌레 소리와 새가 날아가는 소리, 보드의 바퀴 굴러가는 소리는 화면을 단순하고도 명쾌하게 잡아주면서 일인칭 시점인 대상과 관찰하는 제 3의 인물이 품고 있는 기억을 서사화 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 움직이는 회화는, 흥미롭게도 유재연의 블루 페인팅 시리즈보다 물감의 붓 터치와 물성이 더욱 강하게 드러나면서 제법 탄탄한 자기 검열을 통해 재구성된다. 그는 영상으로 편집하는 과정에서 기억의 진위 여부와 당시에 느꼈던 감정들을 실제와 다르게 기억하는 과정을 거쳤을 것이다. 회화적 성질이 돋보이는 잔잔한 영상은 시간과 공간을 아울러 시간의 연속적인 단계에서 감춰진 욕망을 벗겨내는 과정의 한 축으로 우리가 망각했던 미묘한 단위들을 일깨우도록 한다.


5. 파운드 푸티지는 영상기법으로 기존의 영상 이미지를 기반으로 편집하여 새로운 영상 작업을 만드는 것을 말한다. 이는 재현을 위한 다양한 기법을 차용하는데 콜라주의 기법과 유사하여 개별적인 프레임 단위로 해체하거나 여러 프레임의 선행 혹은 한 프레임의 후행 등 복잡한 버전으로 배치하기도 한다.
6. 윌리엄스의 시는 “불일치(dissonance)”의 요소를 특징으로 미국의 문화 정체성과 관련하여 지역성과 관념이 아닌 사물에 대해 묘사한다. ‘패터슨’은 언어와 사물, 예술과 현실 사이의 불일치를 통해 시와 산문을 콜라주하여 텍스트 안에서 병치하는 방식을 구현하므로 자신이 설정한 상징체계를 반복적으로 전복하고 해체시킨다.



에필로그, The Night is Young
 
E.T.A 호프만(E.T.A Hoffmann)의 환상 소설 ‘밤의 풍경들 Nachtstucke’ (1817)은 회화에서 표현되어지는 밤에 대해 이야기한다. 호프만은 밤의 풍경을 불빛으로 조명된 대상 위에 명암이 날카롭게 대비되는 오묘한 색채로 표현하여 낯설고 불안한 효과를 자아내는 그림과 유사하다고 언급한다. 그래서인지 유재연은 호프만과 카프카 같은 환상 소설과 꿈에 관한 이야기들을 풀어나가는 작가들에게 끌렸을 것이다. 그는 자신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졌던 기억의 뿌리가 무엇인지, 왜인지 모르게 익숙하고 낯선 기억을 꿈을 통해 더듬어 나간다. 그가 현실에서 흐릿하게나마 그 기억이 어떤 색과 형태의 것인지 발견한 것은 밤의 시간과 감각이며 목적없이 배회하는 산책자의 시선이다.

우리가 타인의 시선이 되어 찾고자 하는 감정들은 통상적으로 우회된 이미지로 환유 하여 여러 대상과 기법을 선택하는데 이른다. 기 드보르(Guy Debord)의 마지막 단편 영화 ‘우리는 밤중에 배회하고 소멸한다 In girum imus nocte et consumimur igni(We Spin Around the Night Consumed by the Fire)’ (1978)에서 드보르는 이미지를 인간과 현실의 간극을 중재하는 역할로 바라봄으로써 밤의 어둠 속에서 배회하는 인간상을 그린다. 이것은 두 개의 지점인 현실과 분리된 독자적인 세계를 재현하는 꿈의 기억과 더불어 지극히 밋밋하고 평범한 일상의 감각이 공존하는 밤의 시간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꿈꿀 수 있는 밤의 시간은 길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