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의 냉장고》 전시 전경(실린더2, 2024) ©박정혜

I. 아이디어 상자

오랫동안 박정혜의 창작 활동에 주축이 되어준 드로잉은, 상상력을 촉진하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탐구하기 위한 일상적 훈련일뿐 아니라, 그 자체로 오롯한 예술적 매체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많은 경우, 다채로운 종이 작업들은 그녀의 회화에서 발견되는 추상적 형태와 구성 문법을 압축해 놓은 버전처럼 보인다. 그러나 때로는 이러한 방법론을 확장하여 기하학적 감성이 깃든 시각 요소들의 거대한 배열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이때 다양한 스케일의 그리드가 대형 드로잉을 위한 뼈대로서 기능하는데, 그 내부는 가장자리가 맞닿은 채로 배열된 여러 장의 개별 종이들로 구성되어 있어 그 자체로 하나의 패치워크된 격자를 형성하고 있다. 이처럼 확장된 드로잉 작업들은 다양한 형태의 윤곽선을 명료하게 기술하고 있지만, 그 내부가 비어있으므로 마치 유령 같은 실루엣을 형성하면서 기저에 깔린 격자 무늬를 노출시킨다.

박정혜의 최근 드로잉 작업 〈제텔카스텐Zettelkasten〉(2024)은 필름에 맺힌 네거티브 이미지처럼 색채값을 반전시켜 — 매트한 검정 바탕 위에 흰색과 은은한 파스텔 톤으로 형상을 표현함으로써 — 이러한 미학을 한층 증폭시킨다. 미묘한 음영과 차분한 그라데이션이 만들어내는 영역들은, 화면에 다양한 수준의 투명도를 생성하여 마치 머리 위에서 촬영한 엑스레이 사진을 연상시키는 평면적 깊이감을 부여한다. 내부에 흩어져 있는 개별 이미지들의 배열은 ‘제텔카스텐’이라는 작업 제목을 암시하는데, 이는 독일어 개념을 차용한 것으로서, 각각의 카드에 개별적인 정보를 기록하고 상호 참조가 가능한 방식으로 정리하는 메모 수집 체계를 일컫는다. 개인적 지식 관리 체계로서의 제텔카스텐 개념은 독일의 사회학자 니클라스 루만(Niklas Luhmann, 1927-1998)에 의해 정립되었는데, 그는 수만 장의 개별 메모 카드를 모아 “보조 기억(secondary memory)”*이라 부르는 마인드맵을 구축했던 것이다.

제텔카스텐 방식은 비선형적이고 재귀적이며 관계적인 특성을 지니므로, 이전에 기록된 생각들과 새롭게 습득한 지식 사이의 예상치 못한 연결을 가능케 한다. 이는 루만의 경우처럼 대규모 정보 저장소에 특히 유용하지만, 박정혜 같은 예술가들이 보관하는 낱장 드로잉 컬렉션에도 적용될 수 있다. 자신의 스케치를 특별히 체계적인 방식으로 정리하지 않는다 해도, 작가의 아카이브는 작업 과정에서 동일한 목적을 수행하는데, 어떠한 사라짐이나 잊힘 없이 필요할 때마다 언제든 저장소에서 꺼내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박정혜의 〈제텔카스텐〉에 시각화된 ‘아이디어 상자’는 최근 작업군을 형성하는 모티프와 구조에 관한 지표적(indexical) 색인으로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II. 비어있음(emptiness)에 대한 불안감

‘저장’이라는 단어는 물리적 공간이든, 디지털 서버든, 혹은 자신의 머릿속이든 간에 안전하게 보존해야 할 무언가의 존재를 암시한다. 이는 저장소에 보관되지 못한 모든 자료들이 분실되거나 삭제될 위험에 처한다는 사실을 방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보통의 경우 바람직하지 못한 사고처럼 여겨질 수 있겠지만, 현실엔 일부러 무언가를 저장하지 않는 경우들, 예컨대 쉽게 대체 가능하거나, 낡았거나, 위험한 것들을 의도적으로 누락시키는 수많은 사례들이 존재한다. 한편 어떤 이들에게는 저장이라는 개념 자체가 물건의 가치나 기능과 무관하게 물건을 절대 버리지 못하는 강박적 수집벽을 상기시키기도 한다. 이러한 생각들을 토대로, 작가는 기존의 저장 체계와 축적의 심리 기제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끌어낸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빈 공간을 채우고 싶어하는 묘한 충동을 느끼고, 일상의 공허함을 마주할 때마다 무의식적으로 불편해한다. 일상적 대화에서 어색한 침묵을 메우려 하거나 여행 가방을 최대한 빼곡히 채우려는 심리는, 공허를 충만함으로 전환할 때 도파민이 분비되도록 조건화된 뇌의 작동 방식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는 우리가 근본적으로 빈 공간을 부재의 감각으로, 또는 물리적 대상이 들어설 수 있는 잠재적 장소로서 인식하는 사고방식의 부산물일 테다. 따라서 공동(void)이라는 개념 자체는 무언가의 결핍을 전제하고 있으며, 왜 비어있는 저장 공간이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 무언가를 채워 넣도록 강요하는지를 설명해 주는 대뇌 변증법(cerebral dialectic)적 근거가 된다.

예술가의 스케치북은 앞으로 그려질 드로잉들을 갈망하며, 마지막 페이지가 채워지는 순간 성취감을 선사한다. 이는 다시 새로운 스케치북을 펼치고자 하는 충동을 자극함으로써 축적과 갱신의 반복적 순환을 만들어낸다. 그런데 디지털 시대에 들어서면서 보다 익숙해진 저장의 패러다임이란, 최신 스마트폰의 내장 메모리나 컴퓨터의 하드 드라이브처럼 저장 공간을 최적화함으로써 효율성을 극대화하는 것이다. 가용 공간이 부족해질 때마다 보관할 데이터의 양을 압축하고 통합하거나 줄여야 하며, 나머지는 클라우드 저장소나 외장 하드 드라이브로 옮겨야만 한다.

이러한 예에서 주목할 만한 예외가 있다면 현대식 냉장고인데, 대부분의 가정에서 보조 장치를 추가하기에는 너무 큰 가전제품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새로운 식료품들을 끊임없이 저장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기존의 저장 품목들을 주기적으로 폐기해야만 한다. 조미료와 같이 잘 상하지 않는 성질의 일부 품목들은 장기간 보관할 수 있지만, 농산물, 육류, 유제품과 같은 주요 식품들은 제한된 시간 내에 사용하지 않으면 신선한 것으로 교체해야 하는 임시 거주자들이다. 이처럼 일종의 하이브리드 저장 체계로서의 냉장고란, 수집품 관리에 관한 보편적(ubiquitous)이면서도 특정적(specific)인 사례 연구와 더불어 시각적 추상화를 위한 독특한 소재가 되는 것이다.


박정혜, 〈Condenser〉, 2024, 나무 패널, 린넨에 아크릴, 160.2x130cm ©박정혜

III. 내부 온도

박정혜의 이전 작업들과는 달리, 근래의 회화들은 서늘한 에너지를 내뿜는다. 한때 그의 팔레트를 가득 채웠던 녹색, 노란색, 갈색은 파란색, 보라색, 회색으로 대체되었고, 오래 전부터 등장해 왔던 비정형의 추상적 형태들은 더욱 각지고 평판화되어서, 둥글고 유기적인 개체라기보다는 딱딱하고 인공적인 구조물에 가까운 구성을 이루게 되었다. 새로운 작업군에서는 전반적으로 고요함과 안정감이 느껴지는데, 이는 저장 양식과 기록 체계에 대한 박정혜의 최근 관심사와도 맞닿아 있다. 결과적으로 그의 회화 속 공간들은 정지된 상태에 머물러 있는 듯하며, 장기 보존을 위해 차갑게 유지되는 저장 용기들을 떠올리게 만든다.

이처럼 에너지를 제어하는 방식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냉장의 원리이기도 하다. 통제된 기후 속에 보관되는 각각의 물품은 저마다의 온도와 습도를 가져오며, 이는 서서히 내부 환경 조건과 평형 상태를 이루게 된다. 냉장고는 이러한 방식으로 내용물에 내재된 에너지를 효과적으로 중화하지만, 이는 시스템 작동을 위한 외부 전력이 안정적으로 공급될 때만 가능하다. 전기가 끊기거나 밀폐 단열에 문제가 생기면 주변 온도가 상승하면서 내부에 결로가 생기기 시작하고, 상하기 쉬운 음식들이 부패하기 시작하면서 박테리아와 곰팡이 포자가 번식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냉장고의 온도계가 설정이 적절치 못할 경우, 냉각 장치가 과잉 작동하고 내부 수분이 얼면서 얼음 결정이 형성될 수 있다.

박정혜는 자신의 작업에서 이 두 가지 시나리오를 모두 암시한다. 따뜻한 색채를 사용한 그림에는 곰팡이가 핀 것처럼 어두운 반점들이 흩뿌려져 있고, 파란색과 검은색으로 표현된 그림에는 서리를 연상시키는 하얀 물방울들이 나타난다. 이처럼 냉장실 속에 묘사된 조형적 요소들은 작가의 이전 작업들과 연결되는 모티프이자, 하나의 이미저리로서 냉장실 환경과 그 내부에서 에너지가 변화하는 모습에 대한 박정혜의 시각적 연구를 상기시킨다. 그렇게 그려진 형태들은 냉장고의 물리적 구성 요소(냉각 코일, 팬, 컴프레셔 등)를 연상시키는 동시에 보다 넓은 의미에서의 저장용 구조(선반, 서랍, 용기 등)를 떠올리게 한다. 이 모든 작업을 관통하는 것은 제텔카스텐 방식의 물질적 표상으로서 종이에 대한 언급이며, 이는 박정혜가 상호 참조적으로 목록화되는 드로잉을 끊임없이 창작함으로써 그것을 예술적 탐구의 원동력으로 삼고 있음을 방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IV. 리애니메이션

우리는 냉장고를 열 때마다 저장된 재료 목록의 현황을 시각적으로 검토하게 되는데, 때때로 이러한 과정에서 실험적인 레시피에 대한 아이디어가 샘솟기도 한다. 그렇게 꺼내진 각각의 재료들이 모여 하나의 요리로 재탄생하는 것처럼, 박정혜의 회화는 드로잉에 내포된 이미저리의 관계성과 가능성들을 지속적으로 탐구하는 과정을 통해서 구체화된다. 여기서 작가의 드로잉 저장소란 단순히 추상적 형태들의 정적인 집합이 아니라, 끊임없이 유동하며 살아 움직이는 개념적 연결망으로서 아이디어와 이미지 사이의 결절점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다.

역동적인 저장 방식이자 강력한 사고의 도구로서, 제텔카스텐은 박정혜만의 독특한 표현 방식을 관통하는 핵심을 부각시킨다. 각각의 새로운 그림들은 이전에 기록된 생각들을 재맥락화하며, 이 과정에서 현 시점의 문제의식을 통합하고 새로운 사고방식을 형성하는 통찰과 해석을 촉진한다. 즉, 박정혜의 회화는 자신의 “보조 기억” 속 모티프들의 융합(convergence)을 통해 과거 드로잉에 대한 오늘의 해석을 구체화하는데, 이는 파생을 넘어서는 새로운 구성으로 귀결된다. 따라서 작가의 개인 아카이브를 채우고 있는 드로잉들은 단순한 목록으로 보관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캔버스 위에서 지속적으로 수정되고 재구성되기 위한 것이다. 작가는 대형 드로잉 작업 〈제텔카스텐〉을 통해 자신만의 시각적 저장소에서 선별한 이미지들을 제시하면서, 기억 속 형태와 색채, 그리고 그것들이 내포하는 에너지 사이의 공명에 대한 분석의 장으로 우리를 이끈다.

* Johannes F.K. Schmidt, “Niklas Luhmann’s Card Index: Thinking Tool, Communication Partner, Publication Machine” in Forgetting Machines: Knowledge Management Evolution in Early Modern Europe, ed. Alberto Cevolini (Leiden: Brill, 2016), 289-311.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