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I.
내부 온도
박정혜의 이전 작업들과는 달리, 근래의 회화들은 서늘한 에너지를 내뿜는다. 한때 그의 팔레트를 가득 채웠던 녹색, 노란색, 갈색은 파란색, 보라색, 회색으로
대체되었고, 오래 전부터 등장해 왔던 비정형의 추상적 형태들은 더욱 각지고 평판화되어서, 둥글고 유기적인 개체라기보다는 딱딱하고 인공적인 구조물에 가까운 구성을 이루게 되었다. 새로운 작업군에서는 전반적으로 고요함과 안정감이 느껴지는데, 이는
저장 양식과 기록 체계에 대한 박정혜의 최근 관심사와도 맞닿아 있다. 결과적으로 그의 회화 속 공간들은
정지된 상태에 머물러 있는 듯하며, 장기 보존을 위해 차갑게 유지되는 저장 용기들을 떠올리게 만든다.
이처럼
에너지를 제어하는 방식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냉장의 원리이기도 하다. 통제된 기후 속에 보관되는
각각의 물품은 저마다의 온도와 습도를 가져오며, 이는 서서히 내부 환경 조건과 평형 상태를 이루게 된다. 냉장고는 이러한 방식으로 내용물에 내재된 에너지를 효과적으로 중화하지만, 이는
시스템 작동을 위한 외부 전력이 안정적으로 공급될 때만 가능하다. 전기가 끊기거나 밀폐 단열에 문제가
생기면 주변 온도가 상승하면서 내부에 결로가 생기기 시작하고, 상하기 쉬운 음식들이 부패하기 시작하면서
박테리아와 곰팡이 포자가 번식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냉장고의 온도계가 설정이 적절치 못할 경우, 냉각 장치가 과잉 작동하고 내부 수분이 얼면서 얼음 결정이 형성될 수 있다.
박정혜는
자신의 작업에서 이 두 가지 시나리오를 모두 암시한다. 따뜻한 색채를 사용한 그림에는 곰팡이가 핀 것처럼
어두운 반점들이 흩뿌려져 있고, 파란색과 검은색으로 표현된 그림에는 서리를 연상시키는 하얀 물방울들이
나타난다. 이처럼 냉장실 속에 묘사된 조형적 요소들은 작가의 이전 작업들과 연결되는 모티프이자, 하나의 이미저리로서 냉장실 환경과 그 내부에서 에너지가 변화하는 모습에 대한 박정혜의 시각적 연구를 상기시킨다. 그렇게 그려진 형태들은 냉장고의 물리적 구성 요소(냉각 코일, 팬, 컴프레셔 등)를
연상시키는 동시에 보다 넓은 의미에서의 저장용 구조(선반, 서랍, 용기 등)를 떠올리게 한다. 이
모든 작업을 관통하는 것은 제텔카스텐 방식의 물질적 표상으로서 종이에 대한 언급이며, 이는 박정혜가
상호 참조적으로 목록화되는 드로잉을 끊임없이 창작함으로써 그것을 예술적 탐구의 원동력으로 삼고 있음을 방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IV.
리애니메이션
우리는 냉장고를 열 때마다 저장된 재료 목록의 현황을 시각적으로 검토하게 되는데, 때때로
이러한 과정에서 실험적인 레시피에 대한 아이디어가 샘솟기도 한다. 그렇게 꺼내진 각각의 재료들이 모여
하나의 요리로 재탄생하는 것처럼, 박정혜의 회화는 드로잉에 내포된 이미저리의 관계성과 가능성들을 지속적으로
탐구하는 과정을 통해서 구체화된다. 여기서 작가의 드로잉 저장소란 단순히 추상적 형태들의 정적인 집합이
아니라, 끊임없이 유동하며 살아 움직이는 개념적 연결망으로서 아이디어와 이미지 사이의 결절점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다.
역동적인
저장 방식이자 강력한 사고의 도구로서, 제텔카스텐은 박정혜만의 독특한 표현 방식을 관통하는 핵심을 부각시킨다. 각각의 새로운 그림들은 이전에 기록된 생각들을 재맥락화하며, 이
과정에서 현 시점의 문제의식을 통합하고 새로운 사고방식을 형성하는 통찰과 해석을 촉진한다. 즉, 박정혜의 회화는 자신의 “보조 기억” 속 모티프들의 융합(convergence)을 통해 과거 드로잉에
대한 오늘의 해석을 구체화하는데, 이는 파생을 넘어서는 새로운 구성으로 귀결된다. 따라서 작가의 개인 아카이브를 채우고 있는 드로잉들은 단순한 목록으로 보관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캔버스 위에서 지속적으로 수정되고 재구성되기 위한 것이다. 작가는
대형 드로잉 작업 〈제텔카스텐〉을 통해 자신만의 시각적 저장소에서 선별한 이미지들을 제시하면서, 기억
속 형태와 색채, 그리고 그것들이 내포하는 에너지 사이의 공명에 대한 분석의 장으로 우리를 이끈다.
*
Johannes F.K. Schmidt, “Niklas Luhmann’s Card Index: Thinking Tool,
Communication Partner, Publication Machine” in Forgetting Machines: Knowledge
Management Evolution in Early Modern Europe, ed. Alberto Cevolini (Leiden:
Brill, 2016), 289-3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