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지고
보면, ‘캔버스 위의 물감’ 이라는 가장 단순한 회화적 요체, 작품과 공간, 관람객으로 이루어진 전시 현장을 관찰하고, 이를 작업 안으로 개입시키는 데 꽤 오랜 시간을 예비해왔던 홍성준의 창작 방향은 시대의 취향과 유행을 탐색하는
대신 그만의 독자적인 속도와 리듬으로 전개되어 온 측면이 있다. 전시를 보는 행위 자체를 비평적 주제이자, 작품이 재현되는 씬 자체를 구체적 대상으로 삼았던 연작을 통해 홍성준은 전시 속의 전시, 작품 속의 작품이라는 ‘겹’ 구조를
표현한 바 있다. 이를 통해 작품을 둘러싼 중층적 시선을 회화의 내부와 그 바깥으로 상호 침투시키는
스마트함을 보여주었다.
변화하는
매체의 조건과 변치 않는 양가적 속성을 탐구한 작업의 면모는 작업을 위한 예비 데이터인 디지털 사진 이미지를 평면 위에 적극적으로 병치한 또 다른
시리즈로 이어지기도 했다. 2020년 이후 회화적 레이어와 깊이에 관한 일루전(Illusion, 환영)을 평면 상에서 강조하는 방식은 이전의 작업과
양식적으로 구분되는 지점으로 비춰진다. 평면 위에 평면을 재현하거나,
그들 사이의 경계를 뭉근한 그림자를 통해 강조한 결과물은 작업의 전후를 살필 여유가 없는 이들에게는 추상 실험의 일면 정도로 축소
해석될 여지를 남기기도 한다. 그 안에서 간취해야 할 것이 있다면, 작가가
일상적으로 대하는 회화 재료의 물성과 재현의 속성을 도구삼아 행하는 작가 식의 어법, 일종의 매체적
유머에 있다.
지지체와
바탕, 안과 밖, 보는 것과 보이는 것, 디지털과 아날로그, 그림과 그림 아닌 것에 관한 이항 대립적인 요소에
사실적 기법을 동원하여 끊임없는 혼선을 가하는 것이야 말로, 실로 회화적인 농이자, 매체에 관한 자전적 서술인 것이다. 오래 전 작업으로부터 가장 최근의
작업을 살펴보면, 표현의 양상과 전략은 달라졌지만 그 기저에는 회화에 대한 근본적 물음과 이에 대한
자기 정의를 지속적으로 갱신하고자 하는 태도가 있다. 회화를 구성하는 가시적 조건과 보이지 않는 구조를
교차시키며, 작업과 가까워졌다 멀어지기를 반복하며 화면 위를 선회해 온 과정에 다름 아닐 것이다.
《Enfolding the air》로 명명한 이번 전시는 최근 몇 년간 구축해온 작업의 논리가 중첩되고, 여러 방식의 조형적 시도들이 풍성하게 계열화되고 재편되는 예술적 전기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그러나 이미 근래의 전시 《Flowing Layers》(파이프갤러리, 2022)를 통해 스스로가 설정한 작업의 쟁점에 대한
회화적 대응 양상과 비평적 코멘터리가 일정 부분 정립되었고, 시각예술가로서 구사할 수 있는 다양한 표현
기법과 공간에서의 효과적 적용을 통해 솔로 작가로서 지닌 역량을 입증한 바 있다.
그런
점에서, 이번 전시에서 각별하게 눈여겨보고자 하는 것은 새롭게 시도된 재료와 기법에 대한 시각적 경탄, 회화에 대한 매체기술적 접근만은 아니다. 오히려, 전시를 거듭하며 매끈하게 조탁되기 마련인 작품 서술과 디자인적 감각, 재료를
다루는 공예적 수행은 작품과 작가가 관계 맺는 특수한 면면을 덮어버리는 때가 있다. 한 동안 화면 안팎에
다양한 중층들을 집중적으로 설계하고 이를 매개로 한 새로운 통로를 열어두고자 했던 시기를 지나, 작업과
작가의 신체성이 적극적으로 상호 침투하고, 작업의 물리적 존재감으로부터 현상학적 경험을 겪은 작가의
인식항을 들여다보고자 하는 일에 관심을 두고자 한다.
최근
몇 해 동안 전개되었던 작업의 중심어였던 ‘레이어’라는 단어가
전시의 표제에서 사라짐과 동시에, 어쩐지 전시를 이끄는 것은 레이어의 설계자인 작가로부터 작품 그 자체로
이동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도 그럴 것이, 작품을 구성하는
레이어는 화면의 물리적 구조나, 그 위에 물감으로 표현해 낸 이미지들의 환영에 지나는 것이 아니라, 작품의 전방과 주변 공간, 보는 이의 몸과 마음에 광활하게 침투하며
일종의 ‘계’(界)로
확장되기 때문이다.
수수께끼와
같은 전시를 마주해야 하는 이들에게 할 수 있는 제안이란 가령 다음과 같은 사고의 전략이다. 오늘 이
시간의 전시가 작가 홍성준의 초기작을 불러모은 ‘회고전’이라도
되는 양, 지난 시간 작가가 자신의 회화와 세계의 예술에 대해 느꼈던 의구심과 확신이 어떻게 쌓이고, 흩어지고, 우회하고, 교차하며
지금의 작업으로 이행했는지에 대한 사고의 조각들을 사방에서 불러 모으는 일. 눈앞에 현존하는 아름다운
평면들을 단서 삼아 그 속을 지나는 미묘한 주름과 분사되고 뭉친 흔적을 살피고, 무엇인가 단단하게 굳어지기
전의 말랑한 시간으로 돌아가보는 일은 어떠한가. 공기 속에 산화되고,
시간 속에 침잠한 무수한 창작의 레이어를 복원해보는 자세로 전시를 살펴보는 일은 마치 잘게 부서진 토양의 표면을 통해 심층부의 역학을
되짚어가는 지질학자의 그것과도 같다.
오늘날의
화려한 시각예술에 ‘지질학’이라는 고졸한 수사를 연합하여
볼 수 있다면 아마도 그 까닭은 물성의 형성과 지층 사이의 역학관계를 좇는 과학적 탐구의 일면에 유구한 회화의 역사 속에서 일어났던 간헐적인 인식
전환과 회화 연구의 역동성을 투영해 볼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예술작품 또한 돈으로
값어치를 매기고 거래하는 상품의 범주에 들지만, 작가의 온 사유와 신체성이 각인된 물신(物神)이자 관람객의 미적 욕망과 탐구심이 투영될 때만 그 속을 보여주는
의뭉스러운 블랙박스기도 하다. 쌓을수록 평평해지고, 덜어낼수록
깊어지는 역학적 원리는 꼭 지질학을 설명하기에 적당한 것이 아닐 수도 있을 것 같다. 오늘 작가의 면모가, 작품의 이면이, 전시의 에너지가 그런 것일 수도 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