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준(b. 1987)은 회화의 레이어, 즉 ‘겹’에 대한 고민과 그 본질에 대해 질문을 던지며 작업을 이어왔다. 겹겹이 쌓아 올리는 방식을 통해 작가는 회화의 근본적인 구성에 대해 다루는 동시에, 기억과 시간성의 지층으로 내면화하거나, 시촉각적 환영감을 환기시키며 회화의 폭넓은 가능성을 보여준다.


《Code against Frame》 전시 전경(라흰갤러리, 2019) ©라흰갤러리

초기 작업에서 홍성준은 디지털 시대의 사진 이미지를 회화라는 프레임으로 가져오며, 스크린 이미지의 의미와 그 맥락에 관한 고민을 담아왔다.
 
그 예로, 2014년 첫 개인전 《Life between line》에서 작가는 카메라를 통해 수집한 이미지들로부터 공간을 재해석하고 회화의 의미를 확장하는 시도를 보였다. 그리고 2018년도부터의 작업에서는 이러한 시도를 더욱 확장하여, 보는 행위와 보이는 주체 사이의 관계에 대한 메시지를 담기 시작했다.


《Code against Frame》 전시 전경(라흰갤러리, 2019) ©라흰갤러리

2019년 라흰갤러리에서 열린 개인전 《Code against Frame》은 ‘보다(see)’라는 행위에 대한 의구심에서 시작하여, 회화로써 회화의 개념에 도전한다. 작가는 회화의 핵심 요소인 캔버스를 일종의 ‘창(window)’ 혹은 ‘프레임(frame)’으로 가정하고, 프레임이 된 캔버스 안에 또 다른 프레임을 담았다.
 
작가의 이러한 구조적인 기획은 ‘보다’라는 행위가 어쩌면 표면적인 형태와 색채 등이 이루는 조화를 통해 직관적으로 습득된다는 가정에서 출발했다.

《Code against Frame》 전시 전경(라흰갤러리, 2019) ©라흰갤러리

홍성준의 회화는 매끈한 캔버스, 즉 프레임이 마치 보호색처럼 시선을 이끈다. 여기에는 마티에르나 붓질의 흔적 등 작가만의 시그니처 대신에 어떤 대상과 비슷해 보이는 표피가 덧씌워져 있다.
 
마치 대리석처럼 보이는 캔버스 표면은 농도를 일정하게 설정한 아크릴 물감을 마블링 기법으로 한 번에 찍어내고 물감이 마르기 전에 이리저리 흔들어 완성한 것이다. 그리고 작가는 젤(gel) 성질을 지닌 아크릴 물감을 유리판에 칠하고 말린 후 스킨처럼 떼어내어 캔버스/프레임 표피를 수집한다.

홍성준, 〈1505〉, 2019, 캔버스에 유채 및 아크릴, 116.7x80.3cm ©홍성준

이후 작가는 캔버스/프레임 속 또 다른 프레임들을 설정하여 이미지를 선별하고 그리는데, 이 이미지 역시 직접 촬영한 사진들로 이루어져 있다. 약 10년 간 수집한 작가만의 ‘IMG’ 아카이브는 그동안 작가의 시선, 관심, 기억, 감성 등을 사로잡은 직관의 이미지 집합이다.
 
작가의 주관적인 정체성이 담겨있는 이 이미지들은 다시 회화의 프레임에 선별되어 화면 안으로 소환되면서, 그 시간성과 공간성을 상실하게 된다. 이때의 선별 기준은 회화에서 색채와 형태 등 온전히 시각적인 조건에 있었다.


홍성준, 〈1501〉, 2019, 캔버스에 유채 및 아크릴, 116.7x80.3cm ©홍성준

이로써 주관적이고 사적인 시점에서 출발한 ‘IMG’ 아카이브가 객관적으로 카테고리화되고 참조적인 요소로 변환된다. 그리고 이는 결국 회화라는 프레임의 표피적 요소로 재구성되고, 작품으로 전시됨에 따라 마침내 공공의 이미지가 되어 새로운 맥락을 창출한다.
 
이처럼 홍성준은 회화의 물성에 대한 탐구이자 오늘날 시각에 대한 실험으로서 레이어를 화면에 쌓아 오며, 새로운 맥락을 만드는 일에 주목해 왔다.


《레이어스》 전시 전경(학고재 I 디자인 프로젝트 스페이스, 2020) ©학고재 갤러리

나아가, 2020년 학고재 I 디자인 프로젝트 스페이스에서 열린 개인전 《레이어스》에서 작가는 회화의 레이어 구조를 통해 필연적으로 온전하게 목격하는 것이 어려운 대상인 하늘과 바다의 모습을 담았다. 사각 틀에 포획된 대자연의 초상은 생경하게 다가온다. 수많은 층의 공기와 물로 이루어진 자연 풍경은 그의 화면 안에서 얇은 물감 막 위로 응축된다.


홍성준, 〈스터디 레이어스 01〉, 2020, 캔버스에 아크릴, 162.2x150cm ©홍성준

홍성준은 카메라와 붓을 도구로 삼아, 공기와 물처럼 유동하는 심상을 재차 박제한다. 이에 따라서, 원본의 대상은 끊임없이 왜곡되고, 비워진 틈새마다 현재의 감정이 침투하게 된다.
 
전시에서 선보인 작업 중 ‘스터디 레이어스’(2020) 연작은 소재의 선별 과정을 형상화한 회화다. 홍성준은 기억의 선명도에 따라 장면을 순차적으로 배열하고, 찬란한 배경 아래 단조로운 색면을 쌓는다. 이로써 그의 화면에는 얕고도 명확한 층계가 드러나는데, 이는 곧 기억의 층위이기도 하다.


홍성준, 〈스터디 6413〉, 2020, 아크릴에 아크릴릭 페인트, 60x30cm ©홍성준

에어브러시로 채색한 회화 연작은 마치 부피가 없는 평면처럼 극도로 매끈한 화면을 드러낸다. 동시에 사진처럼 정교하게 묘사된 풍경 도상과 함께 말려 올라간 종이면의 모서리와 여기에 드리워진 그림자가 입체감을 만들어 낸다.
 
한편, 물감을 두텁게 쌓아 만든 오브제 연작에서는 회화의 지층을 모형화한 듯이 그 층위가 더욱 극대화되어 나타난다. 가령, 〈스터디 6413〉(2020)은 평면과 입체 구조를 복합적으로 드러낸다. 망원경으로 본 시야를 조형한 이 작업은 원형 아크릴릭 보드를 결합해 시각의 중첩을 상징적으로 표현한다.


《Flowing layers》 전시 전경(파이프 갤러리, 2022) ©파이프 갤러리

이처럼 홍성준의 작업은 평면과 입체를 오가며 이루어진다. 이때 평면 작업과 입체 작업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서로 반대되는 방법론을 적용하는 점이 인상적이다.
 
예컨대 평면 작업을 위해서 작가는 키워드에 부합하는 이미지를 찾기 보다 직접 입체적인 구조물을 여러 형태로 제작하고, 촬영 기법을 통해 평면에 어울리는 방향으로 구상한다. 반대로 입체 작업에서는 머릿속에 떠도는 추상적인 이미지를 연습장에 도면처럼 그리고, 해당 작업이 전달하는 메시지와 소재가 일치하는지 고민한다.


《레이어 사이를 바라보다》 전시 전경(갤러리박, 2022) ©갤러리박

그리고 2022년 갤러리박에서 열린 개인전 《레이어 사이를 바라보다》에서 홍성준은 축적된 레이어 사이에서 감지할 수 있는 시간성에 대한 고민을 담아 냈다.
 
캔버스와의 마찰 없이 에어브러시로 화면에 분사된 안료, 캔버스 위에 덧씌워진 한지와 천 등의 배합, 캔버스 바깥으로 새어 나온 채로 응고된 물감의 흔적, 캔버스 뒷면에 칠해진 형광색이 벽면에 반사되어 비추는 캔버스 뒷면의 네온 빛 등 다양한 재료와 도구가 동원되어 레이어가 쌓인다. 그렇게 만들어진 레이어의 표면은 마치 퇴적된 지층과 같은 시간 감각을 구성한다.


홍성준, 〈스터디 레이어스 40, 41, 42〉, 2022, 캔버스에 아크릴, 201x603cm ©갤러리박

이러한 측면은 과거를 회상하는 느낌을 일으키는 흑백 그림 〈스터디 레이어스 40, 41, 42〉와, 그라데이션이 적용된 한지를 쌓아 응축된 레이어의 에너지를 보여주는 설치작품 〈Condensed Layer(Wave_1)〉, 시간의 거리와 정도에 따라 점진적으로 크고 밝게 표현된 〈Layers of the air 6-1,2,3,4,5,6〉에서 잘 드러난다.
 
여기서, 레이어 사이를 유동하는 시간의 형태는 눈에는 보이진 않지만 작품 내외부로 스며들고 확장하는 크고 작은 에너지를 전달한다.


《플립 오버》 전시 전경(디스위켄드룸, 2024) ©디스위켄드룸

이렇듯 ‘스터디 레이어스’ 연작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홍성준은 다양한 재료와 도구로써 쌓아 올린 레이어에서 비롯되는 환영감과 시간 감각을 실험해 왔다. 그리고 이러한 시도는 2024년 디스위켄드룸에서 열린 2인전 《플립 오버》에서 ‘가볍고 투명한 레이어’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한 단계 더 나아가게 된다.
 
전시 《플립 오버》에서 선보인 ‘스터디 레이어스’ 연작은 전작과 달리 색과 이미지가 사라지고, 연한 그림자만 남은 레이어의 실루엣과 투명함을 담아내고 있었다. 또한 화면 안에는 빛이 표면에 닿는 각도에 따라 변화하는 미묘한 색감을 통해 또 다른 환영감을 연출한다.


홍성준, 〈Layers of the air 21〉, 2024, 캔버스에 아크릴, 53x45.5cm ©디스위켄드룸

이와 함께 전시된 ‘Layers of the Air’(2024) 연작은 투명함과 가벼움의 감각을 비누방울 이미지로 시각화한다. 이전 ‘스터디 레이어스’ 연작에서도 종종 등장했던 비누방울은 전작에서 화면 안에 온전히 담겼던 것과 달리, 해당 작업에서는 방울 내부의 형상 자체에 초점이 맞춰지며 그 투명한 속성이 더욱 부각되어 나타난다.


《Study Layers》 전시 전경(68프로젝트, 2024) ©홍성준

이렇듯 홍성준은 2차원과 3차원의 경계에서 회화의 ‘레이어’를 실험해 오며, 시각적 재현과 신체적 경험 사이의 관계망을 새롭게 구축하고 있다. 작가는 이를 통해 평면성과 환영성이라는 상반되는 조건을 중심으로 전개되어 온 회화의 본질을 오늘날 어떻게 바라보고, 또 새로이 규정할 수 있을지 질문한다.

 "회화만의 매력은 평면에 구현할 수 없을 듯한 물성의 결합, 그리고 3차원 세계를 표현할 수 있다는 무한한 가능성에 있다고 본다."   (홍성준, 마리끌레르 코리아 인터뷰 중) 


홍성준 작가 ©홍성준 사진: 김홍빈

홍성준은 홍익대학교 학부와 동 대학원에서 회화를 전공했다. 개인전으로는 《Study Layers》(68프로젝트(KORNFELD 주최), 베를린, 2024), 《ENFOLDING THE AIR》(프람프트 프로젝트, 서울, 2023), 《Flowing Layers》(파이프 갤러리, 서울, 2022), 《레이어 사이를 바라보다》(갤러리박, 서울, 2022), 《레이어스》(학고재 I 디자인 프로젝트 스페이스, 서울, 2020) 등이 있다.
 
또한 작가는 《All makes sense》(아트사이드 갤러리, 서울, 2025), 《APRICITY》(프리즈 No.9 코크 스트리트, 런던, 2024), 《플립 오버》(디스위켄드룸, 서울, 2024), 《Instead of Result, a Process》(M5 갤러리, 도쿄, 2023), 《사유의 베일》(일우스페이스, 서울, 2022) 등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홍성준은 2023년 독일 베를린 68프로젝트에서 레지던시 작가로 활동하였으며, 그의 작품은 박서보재단, 아트스페이스 호화에 소장되어 있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