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여
년 전 군대에서 일이었다. 휴가 잘린 상병 하나가 군대 내 pc방에서
뭔가를 클릭하고 있었다. 뭔 일인가 해서 살펴보니, 그는
다음 로드 뷰를 통해 자신의 집을 찾아가고 있었다. 대답이 가관이었다.
"이렇게 하면 집에 간 것 같아 기분 좋아" 가상으로 즐기는 휴가를 (속으로 조롱하며) 이해했지만, 한편으로는
기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가 보고 있는 장면은 최소한 수개월 혹은 몇 해 전의 과거였기 때문이다. 그는 도대체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일까.
소위
메타버스 시대가 열리며 가상과 현실이 중첩되고 있다. 하지만 중첩은 오로지 실시간으로 동기화되지는 않는다. 수년 전의 현실이 가상의 영역으로 옮겨져 압도적인 시뮬라크르를 구성하고, 그
가상은 지금의 현실과 뒤죽박죽 뒤섞인다. 가상과 현실의 중첩은 필연적으로 과거와 현재의 중첩도 야기한다. 데이터화된 과거가 영원히 현재와 섞이는 기술, 그것이 아무도 언급하지
않는 메타버스의 실체다.
정여름의
단편영화이자, 시각예술 작품인 〈그라이아이: 주둔하는 신〉(2020)과 〈긴 복도〉(2021)는 이러한 중첩 과정에서 겪는 미확인의
공간과 인물들, 그에 얽힌 이야기를 풀어내는 작품이다. 첫
번째 작품 〈그라이아이〉는 화자이자 작가의 1인칭 시점으로 시작한다.
데니오(Dino), 에뉘오(Enyo), 펨프레도(Pemphredo) 세 자매는 그라이아이(the Graeae)라 불리며
하나의 눈을 공유한다. 그들은 번갈아 가며 하나의 눈에 세 개의 시각을 담는다. 이 중 전쟁의 여신, 에뉘오는 두 자매 몰래 눈을 들고나왔고, 화자는 에뉘오의 이야기를 들려주겠다고 말한다. 전쟁광 에뉘오의 관점을
중심에 두지만 다른 두 자매의 시점도 중첩되는 이야기이다.
작가는
증강현실 게임 포켓몬 GO를 한다. 포켓몬 GO는 GPS 정보를 기반으로 현실 공간에 게임 공간을 혼합해, 길을 걷다 특정한 포인트에서 몬스터들을 만나고 대결해 포획하는 게임이다. 유저들끼리
결투가 이루어지는 공간을 체육관이라 부른다. 이러한 체육관은 보통 역사적 상징물이 있거나 교회와 같이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곳에 지정되며, 대개는 플레이어들의 요청으로 선정된다.
화자는
근처에 있는 체육관을 향하다가 미군기지 앞에서 멈춘다. 그곳은 분명 게임 속에서 10여 개의 체육관이 퍼져 있는 지역이지만, 정작 사전신청을 하지
않은 자가 쉽게 들어갈 수 없는 곳이다. 여기서 작가의 탐구는 시작된다. 이 지역은 왜 존재하고, 그 안에 살던 사람들은 누구일까? 포켓몬 GO의 GPS 시스템을
해킹해 가상으로 미군 기지 안으로 화자는 침투한다. 이제 화자는 인터넷 도처에 흩어진 이미지와 정보를
추적해 하나의 이야기를 완성해 나간다. 이 점이 정여름 작업의 특이한 점인데, 네트워크에 흩뿌려진 과거의 편린들만을 사용함으로써 의도적으로 그 빈틈을 만들고 허구적인 이야기로 채운다. 그는 콜라주적 조립 방식의 풋티지 필름의 약점을 사변적(思辨的)으로 돌파한다.
화자는
미군 용산 기지 터에 일제가 러일전쟁(1904년)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주둔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이후 미군의 주둔 기간까지 무려 114년 동안 민간인의 출입이 허용되지
않았던 땅이라는 사실을 발견한다. 이곳은 구글 맵에서도 그저 녹지로 표현되는 비밀의 공간이었으며, 존재하지만 갈 수 없는 미지의 공간이었다. 여기에 더해 화자는 미군
기지 내 미군들의 삶을 추적한다. 그들은 향수병을 군사적 장애로 규정하고 이를 방지하기 위해 미군 기지의
인테리어와 건물 디자인을 철저히 유사 미국화시킨다. 카페테리아는 본토보다 더 실감 나게 입주해 있으며, 거리의 건물은 낮다. 그들은 자신의 유년 시절 겪었던, 영광스러웠던 과거의 미국적 삶을 기지 안에서 즐긴다.
미군
기지 앞에서 포획한 포켓몬과 114년 동안 개방되지 못한 땅, 할리우드와
같은 세트 장에서 살아간 미군 사이 무엇이 더 가상적인 경험의 결과물일까? 정여름은 "디즈니랜드는 실제의 나라, 실제의 미국 전체가 디즈니랜드라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 거기에 있다"고 말한 장 보드리야르의 명제를 역전시켜 보여준다. "포켓몬 GO는 실제의 식민지, 한국을 드러내고 미군의 이데아를 폭로하기 위해 거기에 있다". 게임적
알고리듬에 대한 예술가의 무기화 전략이 돋보인다. 증강현실을 탑재한 눈과 인터넷 아카이빙 탐색 덕에
역사는 오히려 투명하게 보이기 시작한다.
이 점에서 가상현실은 가상적인 무엇을 생산하는 시스템이 아니라
현실의 잠재되어 있던, 그러니까 분명히 존재했지만, 우리의
의도적 망각으로 보이지 않던 것들이 소환되는 기술로 자리매김한다. 정여름에게 가상은 모방이나 이본이
아니라 잠재적인 것들의 다른 말이다. 작가는 이 잠재적인 유령들을 소환하는 영매다. 가상과 현실이 구분되기보다는 과거 현실의 데이터들이 한편으론 가상화되고, 또
한편 지금 여기와 중첩되는 것이 유령의 출몰 조건이 된다.
"기록은
현실에서는 사라지지만 가상의 세계에서는 잔존한다"
〈그라이아이: 주둔하는 신〉(2020) 중.
영화는
초반 한 게이머의 역사적 탐구를 다루는 다큐멘터리처럼 보이다가 미군이라는 전쟁기계의 이데아와 음모를 추적하는 미스터리 장르로 전환된다. 작품의 몽환적이고 으스스한 BGM은 이러한 모드 전환의 장치들이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작가 자신의 눈, 시각적 경험을 의심하며 반성한다는
점에서 철학적 에세이처럼 보인다. 인터넷 내외부 공간을 산책자처럼 걸으며 탐구하고, 키치적인 요소에서 숭고한 요소를 끌어낸다는 점에서 그의 작업방식은 발터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가 21세기
한국에 도달했다면, 바로 이러한 작업물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을 일으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