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여름(b. 1994)은 장소와 그 자리에 깃든 기억에 대한 집요한 리서치와 관찰을 중심으로 둘 사이의 연관성을 탐구하고, 수집한 단서들을 이어 영상 매체로 재구성한다. 그의 작업은 작가의 자전적인 경험과 관찰을 엮어 보이는 동시에 보이지 않는 것을 장소로 길어 올리며, 장소 이면에 자리한 역사와 자본과 같은 시스템의 구조를 들추어 낸다.


《HAPPY TIME IS GOOD》 전시 전경(합정지구, 2021) ©합정지구

2021년 합정지구에서 열린 정여름의 첫 번째 개인전 《HAPPY TIME IS GOOD》은 주한미군기지라는 지정학적 공간을 범람했던 공적, 사적 경험과 이데올로기를 탐색하고, 이를 영상 매체로써 드러낸다.
 
한반도의 미군기지는 분단이라는 비극적 현실을 환기시키는 장소이자, 점령 혹은 전쟁을 아직 끝내지 못한 명령들의 수용소다. 무엇보다 땅의 원주민들에게 그곳은 금기시되고 비밀에 부쳐지는 올림푸스의 산과 같다.


정여름, 〈그라이아이: 주둔하는 신〉, 2020, 단채널 비디오, HD, 컬러+흑백, 스테레오, 33분 ©정여름

반환과 이전이라는 행위가 벌어지지만 어디에도 표시되지 않는 비가시적인 영토인 미군기지는, 정여름의 작업 속에서 가시성과 비가시성, 위장과 출몰이 뒤얽히고 때로는 좌충우돌하는 복잡다단한 영토가 된다.
 
정여름은 이러한 식민주의 모순이 응축된 장소를 편집증적으로 집요하게 파헤쳤다. 예컨대, 2020년도 작품인 〈그라이아이: 주둔하는 신〉은 접근 불가능한 용산미군기지를 ‘포켓몬 고’라는 증강현실 게임을 통해 진입하기를 시도했던 작가의 경험을 바탕으로, 그 장소적 기호들에서 작동하고 있는 논리를 파헤친다.

정여름, 〈그라이아이: 주둔하는 신〉, 2020, 단채널 비디오, HD, 컬러+흑백, 스테레오, 33분 ©정여름

철조망과 벽으로 가로막혀 있는 용산미군기지의 내부는 위성사진으로도 초록 픽셀의 카모플라주로 가로막혀 들여다 볼 수 없다. 하지만, 증강현실 게임과 소셜미디어라는 동시대 네트워크 환경은 은폐된 장소로 통하는 또 다른 우회로를 열어놓는다.
 
〈그라이아이: 주둔하는 신〉은 이 위장된 장소에서 누수되는 욕망과 기호들을 마치 퍼즐 놀이처럼 짜맞춰본다. 일제강점기 시절 사료들로부터 당시에는 아직 완공되지 않은 용산공원의 3D 청사진까지 시간의 양측을 횡단하면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에 놓인 기호들의 가치, 의미, 이데올로기를 함께 심문하게 만든다.

정여름, 〈긴 복도〉, 2021, 단채널 비디오, HD, 컬러, 스테레오, 36분 ©정여름

정여름은 〈긴 복도〉(2021)를 통해 다시 한번 위장막으로서의 미군기지가 지니는 복잡한 역사적 기억과 경험을 조사하며, 식민적 장소라는 문제의 지평을 확장한다. 이 작업은 2020년 작가가 69년 만에 원주시의 품으로 돌아온 미군기지 ‘캠프 롱’을 축하하는 행사 《CAMP 2020》에 전시 작가로 참여하게 된 것을 계기로 시작되었다.


정여름, 〈긴 복도〉, 2021, 단채널 비디오, HD, 컬러, 스테레오, 36분 ©정여름

그곳은 사실 작가의 조부모가 살았던 장소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당시 조부모의 실제 터전은 미군기지의 쓰임을 위해 미군들이 불태워버렸고, 할아버지는 기지의 PX에서 ‘하우스보이’로 일하며 가족의 생계를 책임졌다.
 
캠프 롱은 이들의 삶을 쓸어버린 해일인 동시에, 그 삶의 존속을 가능케 했던 아이러니한 장소였다. 영상 〈긴 복도〉는 그 장소에 얽힌 시간을 헤집어보는 탐정의 조사보고서로서 전개된다. 영상 속에서 탐정은 우연히 받은 엽서가 가리키는 장소인 미군기지 캠프 롱을 탐색한다.


정여름, 〈긴 복도〉, 2021, 단채널 비디오, HD, 컬러, 스테레오, 36분 ©정여름

탐정은 동료(AI)와 함께 투명한 시공간 좌표값 아래 폐허가 된 기억과 망각, 사적/공적인 역사, 그리고 현재라고 부르는 각기 다른 세계를 조사한다. 원주의 캠프 롱에 대한 구글맵에서 유일하게 발견할 수 있는 정보값은 ‘캠프 롱 ATM’이라는 군사적인 외양 뒤에 자리한 금융 자본주의 네트워크라는 실재다.그러나 현장에는 어떠한 금융의 흔적도 존재하지 않고, 선홍 빛 핏자국만이 증거를 가장하고 있다.
 
숲, 기지, 황무지라는 긴 변화의 시간 속에 영속적 기표로서의 위장막을 뚫고 솟아 올라 있는 그 좌표를, 탐정은 단절과 망각을 발굴할 구멍으로 삼는다.


정여름, 〈천부적 증인께〉, 2021, 2채널 비디오 및 사운드, HD, 혼합, 스테레오, 8시간, 1시간, 15분. ©정여름

이처럼 정여름이 역사라는 과거와 동시대라는 현재의 두 축을 교차시키는 주 매개체는 GPS, 위성사진, CCTV 등의 시각 정보 기술이다. 보는 법과 공간의 인지 방식 자체를 변화시키고 있는 이 기술들을 우리가 본다고 믿는 것 속에 존재하는 맹점, 그리고 그 이면에서 도사리고 있는 또 다른 응시를 환기시킨다.


정여름, 〈천부적 증인께〉, 2021, 2채널 비디오 및 사운드, HD, 혼합, 스테레오, 8시간, 1시간, 15분. 《머나먼 안개 속의 세기》 전시 전경(SeMA 벙커, 2023) ©서울시립미술관

2021년도 작업인 〈천부적 증인께〉에서 정여름은 이스라엘 가자 공습이 개인들에 의해 실시간 중계되던 푸티지들을 모아 영상으로 엮었다. 작가는 가자 지구 공습 이후 3개월 동안 거주민들이 업로드한 이미지를 따라가는 과정에서, 찍히는 순간 생생함이 사라지는 초 단위의 이미지들이 하나의 폭력적인 현실을 응축해내지 못하고, 되려 현실을 여러 겹으로 덧씌우는 납작한 파편이 되는 것을 목격했다.
 
작품은 정적인 풍경 속에서 폭격의 단서를 부단히 찾으려는 작가의 도착적인 응시와, 스크린으로 납작하게 매개된 시각 정보 간의 공모 관계를 들여다 본다.


정여름, 〈조용한 선박들〉, 2023, 2채널 비디오, 4K, 컬러+흑백, 스테레오, 26분 ©정여름

한편, 각종 시각 테크놀로지가 제공하는 이미지들을 수집, 조합하여 ‘보기’를 시도하였던 전작들과 달리 〈조용한 선박들〉(2023)은 직접 촬영한 사진을 포함한 사진 매체를 통해 한 장소의 과거와 현재를 비추어본다.


정여름, 〈조용한 선박들〉, 2023, 2채널 비디오, 4K, 컬러+흑백, 스테레오, 26분. 《머나먼 안개 속의 세기》 전시 전경(SeMA 벙커, 2023) ©서울시립미술관

영상은 베트남의 비무장지대였던 지역을 돌아보는 투어에 참여한 화자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베트남의 주요 장소들은 투어리스트의 사진과 투어 가이드이자 참전 용사인 ‘민’의 목소리를 통해 제시된다. 가이드 ‘민’이 들려주는 해설은 경험과 흔적, 풍경 사이에서 좁힐 수 없는 시간차를 생성한다.
 
전장에서 관광 상품으로, 뒤바뀐 풍경 앞에서 화자는 단단한 동시에 어느 방향으로든 휘어질 수 있는 강철을 떠올린다.


정여름, 〈지하은행〉, 2023, 단채널 비디오, HD, 흑백, 5분. 《머나먼 안개 속의 세기》 전시 전경(SeMA 벙커, 2023) ©서울시립미술관

그리고 2023년 SeMA 벙커에서 열린 개인전 《머나먼 안개 속의 세기》를 위해 제작한 영상 〈지하은행〉(2023)은 죽음이나 전쟁과 같은 비극적인 사건을 겪은 사람들이 트라우마를 극복하려는 동시에, 기억을 잊지 않으려 한다는 점에 주목한다.
 
지전(紙錢)을 태우는 장면에 미국 달러를 오버레이한 이 작품은 지폐에서 경제적 가치가 탈락하는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의 경제 질서와 이념 사이의 간극을 드러낸다.


《머나먼 안개 속의 세기》 전시 전경(SeMA 벙커, 2023) ©서울시립미술관

이렇듯 정여름은 직접 촬영한 장면부터 시대적 배경을 담은 푸티지 파운드, 기술을 활용한 3D 이미지 등 과거와 오늘의 이미지 생성 방식을 자유자재로 오가고 교차시키며, 그 장소에 내재한 ‘보이지 않는 진실’을 들여다 본다.
 
과거와 현재라는 시공간을 오가며 파편처럼 흩어져 있는, 혹은 망각된 기억의 이미지들을 모아 엮은 그의 작업은, 기록된 역사와 그 잔해로서 남겨진 장소를 현재의 풍경으로 만들며 잊히고 묻힌 것들을 복구시킨다.

 "기록은 현실에서는 사라지지만 가상의 세계에서는 잔존한다."  (정여름, 〈그라이아이: 주둔하는 신〉(2020) 중) 


정여름 작가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정여름은 계원예술대학교 융합예술과를 졸업했다. 개인전으로는 《머나먼 안개 속의 세기》(SeMA 벙커, 서울, 2023), 《HAPPY TIME IS GOOD》(합정지구, 서울, 2021) 등이 있다.
 
또한 작가는  《메이데이 메이데이 메이데이》(복합문화공간 111CM, 수원, 2024), 《두산아트랩 전시 2024》(두산갤러리, 서울, 2024), 《과거가 영원히 현재로 오고 있다》(하이트컬렉션, 서울, 2023), 《2022 AAMP 포럼 페스티벌》(Manzi Art Space, 하노이, 베트남, 2022), 《Objects in Mirror are closer than they appear》(OCAT Shanghai, 상하이, 중국, 2021) 등 단체전 외 다수의 영화제에 참여했다.
 
정여름은 제15회 두산연강예술상 수상자로 선정되었으며, 그의 작품은 한국영상자료원에 소장되어 있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