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rTrain_Reverse》 전시 전경(RASA, 2021) ©서민우

나를 포함해, 많은 사람이 미술관에 간다. 미술관을 찾는 우리의 목적은 각기 다르지만, 그곳에서 취하는 행위는 대개 같다. 우리는 미술관에 가서 눈을 이용해 무언가를 본다. 거기 놓여 있는 무언가를 보거나 혹은 거기서 벌어지고 있는 무언가를 보거나. 미술관은 보는 공간이다. 의심의 여지없이 그렇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 ‘본다’는 행위가 생각보다 복잡하다는 점이다. 예컨대 시각문화 이론가 W. J. T. 미첼은 “시각 매체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적절하게 지적한 바 있다. 우리는 건축물을 눈으로 감상하지만, 또한 그 안을 떠돌고 거닐며 온몸으로 감각한다. 우리는 조각을 눈으로 본다고 생각하지만, 동시에 손으로 만지는 듯한 촉각성을 느낀다. 우리가 미술관에서 무언가를 볼 때, 시각 아닌 감각들이 계속해서 끼어든다.

이에 더해 사운드아트 연구자 더글러스 칸은 1960년대의 플럭서스 예술 운동을 분석하며 일부 주요 작가들이 음악에 해박한 전공자였다는 사실을 지적하기도 했다. 말하자면 ‘현대 미술’의 역사 초입에는 무엇보다도 음악이 있었다는 이야기다. 이와 같은 담화는 미술관에 숨겨져 있는 여러 감각을 되새기게끔 이끈다. 그렇다면 미술관은 단순히 보는 공간만은 아니다. 그곳은 언제든 이질적인 감각이 튀어나올 수 있는 감각의 싸움터다. 그러나 이 사실은 종종 잊히곤 한다.

서민우는 2021년 《EarTrain_Reverse》라는 제목의 개인전을 열었다. 전시장에는 단순한 형태의 조각이 놓여 있었다. 사각형 모듈이 층층이 쌓인 조각은 역사 속 미니멀리즘 조각을 떠올리게 만드는 형상이었다. 하지만, 추측건대, 전시를 방문한 관객은 작가의 조각을 보며 미니멀리즘의 전통을 쉽게 연상할 수 없었을 것이다. 조각에서 소리가 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민우, 〈열차 50-00, 50-08, 08-00, 2021, 혼합매체, 275x310x330 mm, 365x310x330 mm, 365x310x770 mm ©서민우

서민우는 이른바 ‘소리 조각’을 만든다. 단순한 형태의 스피커를 직접 제작하고, 그 위에 마치 조각처럼 보이는 외피를 씌워 전시장에 둔다. 조각도 스피커도 아닌, 혹은 조각이자 스피커인 어떤 것을 만든다. 이 ‘소리 조각’은 (당연하게도) 소리를 내고 있었다. 주기적인 간격으로 덜컹거리는 소리, 웅웅거리며 울리는 소리, 귀를 온통 감싸 안듯 먹먹한 소리. 터널 안을 지나는 기차의 소리였다.

작가는 전시에서 가상의 기차를 상상했고, ‘폴리 사운드’, 즉 이미 녹음된 음향효과를 이용해 기차의 소리를 재연했다. 가짜이되 진짜 같은 기차의 소리에 귀 기울이기 위해 관객은 잠시 눈을 감고 집중할 필요가 있었다. 청각이 시각에 앞서는 순간이었다.

서민우, 〈여행담 E&C, 2021, 혼합매체, 300x300x410mm, 1’14 ©서민우

조각의 소리를 듣기 위해 눈을 감는 것. 이것은 보는 공간으로 단단히 굳어진 미술관의 질서에 흠을 내는 사례가 될 테다. 소리는 조각을, 그리고 미술관을 거듭 감각하게끔 이끌고, 그 안에 숨은 잊힌 감각을, 이질적인 감각을 끄집어낸다. 공간을 다시 한번 싸움터로 만들고, 그 안에 가만히 놓여 있던 것들의 자리를 어지럽게 바꾼다.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은 동시대인을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동시대인이란 그저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누군가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동시대인이란 자신의 시대와 어울리지 않는 자, 자기 시대의 요구에 순응하지 않는 자, 시대의 환한 빛이 아니라 어둠을 지각하는 자를 말한다. 이 말을 조금 바꾸어 보자. 동시대적인 미술이란 미술이라는 이름으로 굳어진 감각에 순응하지 않는 것, 그 감각 어딘가 드리운 어둠을 찾아 헤매는 것이라고 말이다. 서민우는 소리와 조각 사이에서 갈등하고, 자신에게 어울리는 어둠을 찾아 터널 속으로 들어간다. 그가 찾을 어둠을, 그것의 소리를 기다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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