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진들을 누구의 자리에서 볼지 오래 고민했다. 나는 작가의
어머니의 관점에서 보기를 선택했다. 이 관점은 나에게 가장 익숙한 것이다. 이 사진을 촬영했거나 촬영의 대상이 되었던 사람, 전문가용 카메라를
다뤄본 일 없고, 일회용 필름 카메라나 보급화된 디지털(스마트폰) 카메라로만 사진을 찍어본 사람의 관점. 이것은 사진과의 관계에서
내가 내 마음대로 접근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경험이다.
나는
이 경험으로부터 다소간의 개념화와 이론화를 시도해볼 수 있다. 나는 이걸 ‘기록 없는 사진’이라고 부를 것이다. 이 사진은 결과물이 아니라 사진 촬영자의 의식에서 발생하고, 촬영
행위 자체를 성찰하며 발생한다. 후자부터 규명해보자.
사진은
다양한 분류 체계 속에서 각자의 목적과 방식으로 활성화된다. 정체성(아마추어, 전문가, 기술자 등), 소재(인물, 풍경, 오브제 등), 장르(언론, 예술, 상업 등)... 적고보니 각자의 목적과 방식에 따라 분류 체계가
만들어진다고 말하는 편이 낫겠다. 이 중에서 사진을 찍는 행위 자체를 의식적으로 기억하고 기록하고 타인에게
교육하며 유산으로 남기는 경우는 전문 예술 장르로서의 사진이 대표적이다. 사진이 사진에 영향을 미치는
이러한 되먹임 구조로 인해 사진은 근대 예술의 한 장르로 인준될 수 있었다.
반대로
사진 이외의 목적으로 그 행위가 정의되는 여타의 사진들을 생각해보자. 증거를 남기고(가령 법정에서), 행사를 기념하고(가령
결혼식에서), 자신을 문화적 이미지로 재현하고(가령 셀카를
찍으며)… 이러한 행위들은 사진의 담론이 아니라 사회학이나 인류학적 대상이 된다. 사진은 이렇게 사진 아닌 것에서 종결된다. 그 역은 관찰되지 않는다. 우리는 그것을 관찰할 이유나 동기, 제도 따위를 갖고 있지 않다. 하지만 정말 그 역이 발생하지 않을까? 어쩌면 이미 발생하고 있는
건 아닐까? 우리가 이것을 관찰하기로 결정한다면 무슨 일이 생길까?
1839년, 오늘날의 사진이 등장하기 수십 년 전부터 ‘필름 없는 카메라’는 다양한 방식으로 발전 및 변형되었다. 예컨대 ‘카메라 루시다’는 막대 끝에 장착된 프리즘 렌즈를 통해 렌즈 정면의
사물이 렌즈 아래에 겹쳐 보이게 만드는 장치로, 주로 회화의 드로잉을 위해 사용되었다. 어쩌면 우리는 그것을 화학물질 대신 ‘손으로 감광한 사진’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때 감광(말 그대로 빛을 감지하기)에 필요했던 것은 화학물질이 아니라 손기술이었다.
그리고 지금 같은 방식으로 평면에 이미지를 남기는 사진은, 윌리엄
헨리 폭스 탤벗(William Henry Fox Talbot, 1800~1877)이 자신의 “못 믿을 연필이 보기만 해도 우울해지는 흔적만 남기는… 형편없는
드로잉”에 대한 불평 끝에 다른 방법의 충동을 느끼며 시작되었다. 오늘날
사진의 기본 요소인 ‘인화’조차 당대에는 ‘렌즈의 이미지를 드로잉으로 남기지 않을 수 있을까’라는 소거법의
도식을 변형하며 ‘드로잉 없는 사진’으로 시작되었다. 오늘날의 예술 사진에서 ‘촬영 없는 사진’을 만드는 시도 또한 흔히 볼 수 있다. 이렇듯 사진의 관념과 실행은
그 조건과 기능을 (의도적이건 강제적이건) 하나씩 변경하며
새롭게 규정 받게 된다.
그렇다면 ‘기록 없는 사진’은 어떠한가? 나는
사진 이론의 최신 논문이 아니라 내 스마트폰 카메라 앨범을 채우고 있는 사진들을 보며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 기억이
특정한 방식의 기록에 의해 촉발되는 것처럼, 기록은 그것이 기억되어 의미를 갖는다. 스마트폰으로 찍은 수십만 장의 사진 푸티지를 선별하여 책으로 발간한 작가들 생각도 난다. 하지만 나는 내가 찍은 사진들을 다시 보지 않을 것을 안다. 이
사진들이 전부 삭제되어도 막연한 아쉬움 말고는 별다른 마음이 들지 않을 것이다. 싸이월드가 폭파된 이후
사람들의 반응도 유사했다. 우리는 그 사진들이 삭제되었다는 사실, 거슬러
올라가 거기에 어떤 사진들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잊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 사진들은 촬영의 순간에만 존재했다. 그것은 결코 다시 펼쳐보지 않을 책에 밑줄을 긋는 행위와 유사하다. 밑줄은 쓸모없지 않다. 밑줄은 순간을 순간인 채로 연장하는 기술이다. 주문한 음식을 앞두고, 공연 현장에서, 광활한 풍경 앞에서 작은 카메라로 촬영하기 바쁜 사람들을 보며 “눈앞의
현실을 보라”고 말하는 순진한 현실주의자들은 그때 거기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지 못했던 것이다. ‘사진 찍기’는 보이는 것이 적절하게 배열되고 노출되기를 조절하는
행위이고, 때로는 사물과 사건이 지속되기를 기다리는 행위이며, 이
모든 것을 바라보는 행위다. 어쩌면 우리는 그 작은 화면을 통해 처음으로 바라보았을지도 모른다. 이미지의 생산이 카메라의 보편성과 재현에 귀속될 때조차도, 촬영은
여전히 선택적 행위일 수 있다.
우리는
무엇을 선택하는 걸까? 기억에 관한 고대적 논의로 되돌아가는 기분이 든다. 문자 기록에 의존하기 시작하면 기억의 의지를 잃어버린다는 걱정은 고대에 시작되었다. 기록과 보존의 디지털화, 자동화는 그러한 걱정을 더 정당하게 만든다. 따라서 데이터 보존과 기억은 애초에 다른 종류의 논의일 수 있다. 그렇다면
순간을 기억하는 방법으로서 ‘기록 없는 사진’이란 데이터의
보존이 아니라 오히려 데이터의 소멸로 완성되는 것이 아닐까?
나는
방금 경험적 사태로부터 약간의 이론적 상상으로 도약했다. 그렇다면 대중 사진에서 발생한 ‘기록 없는 사진’에 예술 사진은 어떻게 반응할까? 작가 김상하는 사진을 감열식 프린터에 넣어 인쇄한다. 망점은 벌어지고
색깔은 흑백으로 환원된다. 열화의 정도를 조정하고 때로는 손으로 문질러 지워낸다. 특정인의 한때를 지시하고 추억을 인용하던 이미지는 이제 개인의 소유를 벗어난다.
누구의 일상 사진을 투입해도 같은 양식의 이미지가 생산되며 이미지의 양식이 더 큰 의미로 등장하는 이 작업은
하나의 장치인 셈이다. 그러나 개인성을 제거하고 다른 형식의 이미지로 대체하는 것은 (비예술 사진에 가해지는 흔한 비난처럼) 또 다른 자동화 장치는 아닌가? 우리의 사진이 이렇게 변형되는 것에 우리는 기뻐할 수 있을까? 이미지를
문댄 익명의 손, 이미지 외부에서 가해지는 신화적 손의 위협은 더 노골적이다. 우리는 기억의 기록도 반환도 요구하지 않았다. 그런 우리에게 전해진
개입과 위협, 이 신화적 기억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볼 것인가?
변형에서
시작한 손짓이 위협에 가까워질수록 뜻밖의 이미지를 마주한다. 사진을 횡으로 자르고 열을 가하고 복사를
거듭할수록, 지워버린다는 위협이 물리적 삭제에 가까워질수록, 이미지가
변화하고 다시금 자신의 특수성을 되살리고 있는 재생의 시간을 본다. 색도 형태도, 무에 가까워지고 있지만 무에 닿지 않는 가장 아슬아슬한 위치에서 이미지의 내부 요소들은 다시금 서로를 부르고
있다. 이 이미지는 심지어 기억을 거슬러 올라 어머니의 사진을 부르고 있다. 지금 우리는 어머니의 사진 속 땡땡이(도트) 원피스와 디지털적 열화를 거친 망점(도트)이 겹치는 것을 본다. 이제 어머니의 눈을 큰 망점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형태조차 남지 않은 추상적 패턴들이 ‘부른다’는 의지적 요소로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은 가히 마법적이다. 우리는
그것을 마법적이라고 부르면서 현실 원리를 벗어나는 원리로 진입하게 된다.
배자은은
이러한 부름을 미래에 투사한다. 부름의 대상이 없으니 그것은 새 몸을 요구한다. “작가는 자신의 사고와 닮아있는 공간에서 몸과 기억이 뒤엉키듯이 형태와 기능을 잃고 녹아내리거나 한 몸이 되어버린
것들을 사진으로 담는다”고 말하고 있다. 원치 않게 생산된
사고가 나를 통해 유통되고 나의 행위로 재생산된다면, 그것과 ‘닮은
공간’은 사고를 재현하고 그것은 사진으로 유통되며 감상으로 재생산된다.
우리는 현실 원리에서 시작해 매체 자신의 조작법과 감상법으로 구성되는 사진의 원리로 넘어간다. 우리는
이렇게 만들어진 사진의 세계 속에서, 그 세계의 고유한 논리와 기능 속에서 살아갈 수도 있다. 그것은 현실 원리를 대체하거나 덮어 버릴 수 있다. 하지만
김상하의 사진처럼 그것은 현실과의 겹침은 유지하고 암시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배자은은 유통되는 사진에서 감상으로 넘어가는 단계를 절단하고는 그것을 태우고 녹이고 붙인다. 변형된
이미지는 자신의 결과물에 대한 해석을 요구하지 않는다. 여기서 요구하는 것은 변형이라는 행위에 대한
해석이다. 이 평면적 결과물은 현실에 투영되지도, 고유한
세계를 구성하지도 않는다. 그럼으로써 이 이미지는 평면에 머물 이유를 잃는다. 그 이유 없음이 비디오 테이프 위로, 섬유의 표면 위로 사진을 옮겨
가게 만든다. 최초의 사건은 이제 사물의 상태가 된다.
‘어머니의
기억을 내 것으로 만들고 싶다’는 욕망은 김상하의 이미지를 해석할 준거가 되었다. 그리고 배자은의 작업은 김상하에 의해 “외상의 형태로 남은 기억을
작가가 계속해서 꺼내고 벌”린다고 소개되고 있다. 자해를
묘사하는 듯한 이 문장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 그것은 외상이기에 직접 꺼내질 수 없다. 그래서 우선 이미지는 태워져야 한다. 그것은 어쩌면 ‘삭제하고 싶다’는 욕망에 부합하는 적합한 행위다. 그러나 동시에 배자은의 작업에서 ‘사진을 태운다’는 ‘삭제’로 작동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진은 사진 아닌 것의 몸을 빌린다. ‘삭제한다’는 목적과 ‘기억한다’는
반대의 목적을 동시에 가져야만 허락되는 접근 속에서, 사진은 직접 볼 수는 없지만 어떻게든 보아야 하는
기억들, 어쩌면 보지 않기 위해서 보아야 하는 기억들에게 몸을 내준다.
그러나 이렇게 얻은 몸조차 사라질 것이 예정되어 있다. 나는 앞서 대중 사진에서 ‘기록 없는 사진’이 발생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것을 관찰하고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자신이 이것에
관찰되기를 시도하면 무슨 일이 발생할지 물었다. 그리고 이것이 영역들 사이에 위계가 아닌 영향 관계를
설정했을 때, 전문 사진이 보내온 응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