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llation view of 《The Other Self》 © Ilmin Museum of Art

끊임없이 갱신을 요구하는 ‘동시대’라는 시스템의 굴레는 예술에도 적용되어 확장성, 해체, 재맥락화, 탈장르 등의 프레임에 의해 변화를 거듭해오고 있다. ‘뉴 제너레이션’, ‘포스트 조각/회화’, ‘동시대 미술의 면모’라는 정해진 ‘워딩’에 갇혀버린 듯한 텍스트들은 흡사 패션지에서 볼 법한 최신 트렌드에 대한 소개, 하루가 멀게 데뷔하는 아이돌을 소개하는 연예계와도 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이러한 시대적 흐름에서 멀티 플레이어와도 같이 자신을 어필하는(혹은 해야만 하는) 것이 익숙해진 세대에서 권오상과 최하늘은 자신들을 ‘조각가’라고 소개하기를 주저하지 않고, 각자의 방법론을 통해 조각의 새로운 형식의 궤를 탐색한다.

조각의 확장성에 대한 고민과 ‘조각’의 의미가 다소 모호해지던 시점1이 발생한 이후부터 조각은 끊임없이 운명이 좌지우지되었다. 오늘날 ‘설치’라는 용어가 빈번하게 혹은 무분별하게 사용되며, 전통적인 조각의 규범에 대한 논의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조각이라는 매체로 작업하여도 자신을 조각가로 소개하거나 조각가가 아니라고 말하는 작가로 구분되며, 자신을 어떤 지점에 위치시키는지에 대한 태도가 중요해지기도 했다. 게다가 조각을 바라보는 관점은 납작한 스크린 속으로 옮겨가며, 가상현실에서의 조각에 대한 논의로까지 이어졌다. 온오프라인의 경계에 대한 감각이 무뎌진 현시점에서 비물질 세계에서 마주하는 조각에 대한 경험 역시 고민해봐야 하는 시점이 온 것이다.

《나를 닮은 사람(The Other Self)》 역시 조각이라는 매체의 근원적 논의가 축적된 동시대 미술의 토대에서 조각의 정체성을 살펴본다. 권오상은 기존 조각의 방법론을 거부하고 일상적 요소와 재료를 자신만의 조형언어로 삼는 한편, 최하늘은 전통의 참조와 재소환으로부터 동시대 조각의 새로운 흐름을 주도한다. 이번 전시에서 두 작가는 전시 공간을 공유하며 지속적으로 구축해온 서로의 방법론을 교환하고 참조한 결과물(혹은 과정)로서의 조각을 선보이며 조각의 근원에 대한 매체적 사유를 보여준다.

이번 전시에서 권오상은 최하늘의 조각을 지지체로 삼아 전통적으로 다루어져 오던 조각의 개념을 새롭게 접근한다. 최하늘은 권오상의 작업을 참조하여 제작한 3D 프린트한 작품을 나란히 두거나 권오상의 초기 작업 ‘데오도란트 타입’(Deodorant Type)에서 속이 빈 채 표피만 존재했던 조각의 물성을 탐구한다. 이와 함께 인간의 시각에서 3차원으로 인지되는 조각의 표면에 기계의 언어인 QR 코드를 부착하고 별도의 사물(스마트폰)을 매개로 하여 모바일 스캔을 통해 마주하는 조각을 경험하게 하며, 물질의 영역인 조각을 비물질적 형태로 탐색해본다.

시대의 요구와 흐름에 따라 새로운 재료와 기술이 넘실거리는 현시점에서 예술가에게 결합은 시시각각 다른 형태로 다양하게 요구된다. 이번 전시에서 권오상과 최하늘은 서로의 작품세계를 깊이 탐구하고 교류하며, 물질과 비물질 경계 사이에서의 조각에 대한 결합을 요구받았다. 전시 공간에서 전시의 형태로 결합된 그들의 매체적 사유는 마치 결박당하지 않으려는 결합의 움직임과 같이 적시 적소에서 결합되었다가 해체되어 흩어진다.

결합(結合)과 결박(結縛)은 떨어져 있던 개체, 사물, 관계 등이 어떠한 요인을 통해 붙거나 이어지는 상태를 의미하지만, 결합과 결박의 연결성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결합은 두 개체가 관계를 맺어 하나가 되었으나 해체의 가능성을 전제에 둔 임시로 합쳐진 상태를 뜻한다. 반면, 결박은 주체성을 상실한 채 묶여버린 정체의 상태를 의미하며, 속박되어 벗어날 수 없다.

육중한 몸체를 가진 조각을 지탱하기 위해 결박은 불가피하다. 그러한 의미에서 두 작가가 인터뷰2에서 공통되게 언급한 조각의 무게감과 조각가의 건강을 해치는 재료의 물성으로 인해 가벼운 재료를 찾게 된 계기와 과정은 주목해볼만 하다. 가벼움을 지향하려는 작가들의 움직임으로 인해 그들의 작품은 전시 공간에서 ‘고정’되는 것이 아닌 ‘놓여진’ 상태로 설치된 것이다. 육중한 몸체를 버린 가벼운 재료의 사용, 각자가 미술사를 바라보는 태도에서 비롯된 속이 빈 조각의 형체, 그리고 비물질 환경에서 전시 공간을 감싸며 새로운 조각적 경험을 유도하는 모바일 스캔이라는 권오상과 최하늘의 방법론. 이 글은 한없이 가벼운 그들의 조각‘적’3 움직임을 세 가지 흐름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물리적으로 가벼운 성질의 조각이라 해도, 어떠한 미동도 느껴지지 않는 결합은 결박되고야 만다. 그러한 의미에서 권오상의 〈세 망령들-주름들(The Three ShadesWrinkles)〉(2022)과 최하늘의 〈낡은(Old)?〉(2022)은 전시장에서 그들만의 조각‘적’ 움직임으로 작동하며 결박을 피해간다. 〈세 망령들〉에서 권오상은 평면의 사진 이미지를 사용하지만, 사진은 스핑크스 고양이의 피부 주름으로 인해 굴곡진 이미지로 인식되며 표면에 대한 착시를 불러일으킨다.

〈세 망령들〉과 형태적 유사성을 보이는 최하늘의 〈낡은〉은 부식된 철의 질감이 도드라져 육중한 무게의 조각 같아 보이지만 실제로는 3D 프린트나 스티로폼으로 이루어진 가벼운 조각이다. 권오상은 조각이라는 매체의 3차원성이 아닌 평면 이미지가 지닌 입체감을 통해 환영을 불러일으키고 최하늘은 재료의 물성을 오인하도록 유도하는 조각 기법을 통해 조각을 마주한 관람객의 인지 감각을 마구 교란시킨다.

최하늘의 〈뻔뻔하게(Become a kenta)〉(2022)에 기댄 채 놓여있는 권오상의 〈무의미한 배출(Meaningless Emission)〉(2022) 간의 관계 역시 주목해 볼 만하다. 〈뻔뻔하게〉는 그리스 로마 신화에 등장하며 상반신은 인간이고 하반신은 말인 켄타우로스를 모티브로 삼았다. 미술사를 차용 혹은 참조하여 자신만의 방법론으로 삼은 작가는 고대 조각가들이 주로 다루고 수 세기 동안 문화사, 인문학, 대중문화에서 언급되어 온 켄타우로스를 4시간 만에 조각으로 완성해버린다.

이와 함께 최하늘의 작품에 무심히 기대놓은 권오상의 〈무의미한 배출〉은 일반 쓰레기 종량제 봉투를 형상화한 ‘사진조각’으로 실제 배출되는 모습처럼 최하늘의 작품을 전봇대 삼아 기대어 설치되어 있다. 두 작품의 설치 방식은 조각의 전통적인 규범을 해체하려는 권오상과 미술사적 참조를 통한 재해석을 골조로 작업하는 최하늘의 조각‘적’ 움직임이 교차하며 공명한다.

전시장에 매달려 울퉁불퉁한 표면에 이질적으로 달라붙은 QR 코드를 통해 인스타그램 필터로 유도하는 최하늘의 〈새 이름(Always reboot: Ghost)〉(2022; 재출력), 평면과 입체 사이 어디에 속한다고 섣부른 판단을 하기 어려운 접이식 병풍에 도장처럼 각인된 QR 코드에서 생경하게 마주하게 되는 코드들은 관람객에게 스마트폰 카메라를 들고 자신들을 스캔하도록 유혹한다. QR 코드가 전시 공간에 자리하게 된 것은 비단 팬데믹으로 인한 온오프라인의 자연스러운 연결이라기보다는 어느 때보다 더 강력해진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결합 욕구4 로 해석해볼 수 있다.

전시장은 감상과 판단에 이르기 전에 속절없이 혹은 끊임없이 이미지 데이터로 변환되고 SNS로 빠르게 소비된다. 작가는 오히려 이러한 시류를 적극적으로 작품에 끌어들이고 소위 ‘인스타그래머블’(instagramable)한 사물과 기호가 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이 과정에서 권오상의 조각 역시 최하늘의 초대한 비물질적인 스마트폰 유저 환경으로 편입되며, 가상공간에서 새로운 몸체를 부여받는다.

최하늘의 SNS 조각은 전시장 밖에서도 그의 조각을 소환해볼 수 있지만, 역설적이게도 이 코드는 전시 기간 중 전시장 안에서 현존하는 조각들을 감싸는 비물질적 결합을 시도하였을 때 그들의 조각‘적’ 움직임을 경험할 수 있다. 권오상과 최하늘의 조각이 육중한 몸체를 버리고 한없이 가벼워졌음을 신체적으로 감각하며, 그 무게감이 가상으로 옮겨지는 조각적인 경험을 하였을 때 결합이 완성된다. “앞으로의 조각은 자신의 몸뚱아리를 조금씩 버리고 조금 더 가벼워지지 않을까?”5 라는 최하늘의 질문처럼, 육중한 중량감을 떨쳐버리고 한없이 가벼워져야 결박을 차단할 수 있다. 이들의 조각‘적’ 움직임은 계속하여 가벼워질 것이고 결박당하지 않을 것이다.


 
1. 로잘린드 크라우스(Rosalind Krauss)는 1968년부터 1970년대까지 많은 예술가가 거의 동시적으로 확장된 장을 생각할 수 있는 허가(또는 압력)을 느꼈고 ‘조각’의 의미가 다소 모호해지기 시작했다고 보았다. 로잘린드 크라우스, 「확장된 장에서의 조각」, 『모더니즘 이후 미술의 화두』, 유승민 옮김(서울: 눈빛, 2017), 158.
2. 일민미술관, ‘권오상×일민미술관─What’s my collection?’, 2022년 8월 26일, https://youtu.be/MSpI6jxewkM, 일민미술관, ‘최하늘×일민미술관─What’s my IDOL?’, 2022년 9월 8일, https://youtu.be/Wv9C4AjeZuI.
3. 조각‘적’이라는 의존명사를 붙인 이유는 그들의 움직임을 현재 진행 중인 상태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글은 조각이라는 매체에 대한 그들의 태도가 조각‘적’이라 말하고자 한다.
4. 문화연구자 김상민은 QR 코드가 전시공간에 적극 개입된 현상에 대해 현실과 –가상, 오프라인과 –온라인이라는 이분법적 경계에 대해 생각하게 만들기(혹은 생각하도록 강제하기) 때문에 오프라인 전시라는 것도 결국은 온라인으로의 연결성(검색, 공유, 저장 등)으로 확장되지 못한다면 관람객들이 자신의 관람 경험을 제한적이라고 여길 수 있다고 보았다. 김상민, 「비인간 시각성 시대의 예술 경험」, 『큐레이팅 팬데믹: 비장소·비물질 시대의 예술 경험』(무빙북, 2021), 89.
5. 최하늘, 이문정과의 인터뷰, 「[이문정 평론가의 더 갤러리 (90) ‘조각충동’] 메타버스 시대에 조각은 계속 입체일까」, 『문화경제』, 2022년 6월 29일 자, https://m.weekly.cnbnews.com/m/m_article.html?no=143997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