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현빈(b. 1991)은 자연에서 마주하는 그리 특별해 보이지 않는 풍경을 오랜 시간 바라보며, 그것의 조각으로서의 가능성을 발견하는 작업을 이어왔다. 일상 속 당연하게 자리하고 있는 자연의 풍경을 관찰하며 시작되는 그의 작업은 그런 오랜 응시에 대한 기록이기도 하다.


권현빈, 〈분수의 꼭짓점, 하늘 그리고 기타등등 (1)〉, 2018, 스티로폼, 레진, 핸디코트, 안료, 유화, 90×120×316cm ©두산아트센터

권현빈은 계속해서 변화하는 자연의 풍경을 통해 무한한 가능성과 한계를 동시에 느끼며, 자신이 다루는 물질과의 거리를 조금씩 좁혀 나가는 과정을 거쳐 작업을 진행한다. 작가가 주로 사용하는 인공재료(스티로폼)나 돌과 같은 재료들은 그가 상상하는 상태에 가까워지려는 과정의 흔적을 그대로 담아내며, 작가와 대상 간의 시간과 작업에 대한 태도의 지표로서 드러난다.


《편안한 세상 속에서》 전시 전경(레인보우큐브 갤러리, 2018) ©레인보우큐브 갤러리

예를 들어, 첫 번째 개인전 《편안한 세상 속에서》(레인보우큐브 갤러리, 2018)에서 선보인 ‘구름 조각’ 연작은 시시각각 변화하며 모였다 흩어지는 구름을 다양한 형태의 덩어리로 표현한 것으로, 우연에 의한 부분과 의도에 의한 부분이 섞여 있는 기묘한 형태를 띠고 있다.
 
이때 작가가 선택한 구름 조각의 형태는 작가의 시야와 구름의 형태가 맞닿은 찰나의 순간을 기법적으로 보여준 결과물로 볼 수 있다.

《편안한 세상 속에서》 전시 전경(레인보우큐브 갤러리, 2018) ©레인보우큐브 갤러리

그 중, 사각형의 막혀 있는 형태는 구름이라는 대상이 지닌 ‘자유’라는 속성을 시간과 인체의 제약으로 한계를 지닌 모습을 관념적으로 표현한 것이었다.
 
작가는 인간에게는 신체의 한계에 따른 ‘보기 쉬운 시각 크기’와 ‘개인이 통제 가능한 크기의 한계’가 존재한다고 보며, 작업의 크기를 약 ‘얼굴 크기’와 ‘서서 두 팔을 최대한 벌린 높이와 너비’ 사이로 제한하였다. 대상의 모든 부분을 포착할 수 없는 인체의 한계를 수용함으로써 대상과 마주했던 순간의 감각과 정보를 작품으로 재현했을 때 왜곡의 정도를 최소화하기 위함이었다.

《편안한 세상 속에서》 전시 전경(레인보우큐브 갤러리, 2018) ©레인보우큐브 갤러리

이렇게 의도하여 만들어진 부분과 우연히 만들어진 부분이 섞여 있는 형태는 이후의 작업에서도 나타난다. 이때 의도치 않은 부분들은 대상에 대한 찰나의 인상과 감각들을 인식 가능한 형태로 만드는 과정에서 재료의 가능성과 한계를 지속적으로 질문하고 실험해 나간 작업의 흔적이라 볼 수 있다.


《Ongoing Track: 미래와 모양》 전시 전경(모노하, 2020) ©모노하

2020년 모노하에서 열린 개인전 《Ongoing Track: 미래와 모양》에서는 이와 같은 권현빈의 조각과 재료에 대한 태도를 엿볼 수 있었다. 이 전시는 스티로폼이나 돌과 같이 입자로 구성된 물질을 가상의 공간으로 바라보고, 덩어리 안팎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조각적 행위들에 대한 작가의 관심과 고민에서 출발했다.


《Ongoing Track: 미래와 모양》 전시 전경(모노하, 2020) ©모노하

그 자체로서 시간성을 지니고 있는 돌이라는 재료를 통해 작가는 먼 과거와 먼 미래를 동시에 사유하였다. 그리고 작가는 그 시간의 감각 중간에 서서 아직 조각되지 않은 돌에 대해 상상하며 작업을 진행해 나갔다. 
 
그 결과물로서 제시된 돌들의 형태는 덩어리이자 판, 구부러진 면의 모습을 띠고 있었다. 그리고 그 표면에는 돌을 두들기는 도구인 정을 사용해 생긴 점이나 선이 새겨져 있거나, 본래의 거친 표면을 연마해 드러난 돌 내부의 색이 나타나 있었다.


권현빈, 〈모두-하나 그리고 빛〉, 2020, 트라버틴, 잉크, 44x60x4cm (알루미늄 스탠드 90x10x10cm) ©기체

이러한 흔적들은 돌이라는 재료가 가진 가능성을 발견해 나가는 작업의 과정에서 생겨났다. 가령, 작가는 표면을 연마함으로써 그 내부의 색이 드러나는 순간 그것이 돌의 새로운 표면이 되어 어떠한 가상의 평면 공간을 만들어낸다고 보았다.
 
또한 덩어리나 판 형태로 제시된 돌 조각들은 특정한 무엇으로서 확정된 상태가 아닌 언제든 새로이 시작될 수 있는 열린 상태로 표현되며, 재료와 조각이 가진 가능성의 힘을 담아내고 있었다. 


《HOURGLASS》 전시 전경(기체, 2021-2022) ©기체

한편, 2021년 기체에서 열린 개인전 《HOURGLASS》는 구름이나 컵에 담긴 물과 같이 계속해서 변화하는 대상에 대한 작가의 조각적 상상이 돌로 드러난 전시였다.
 
모래시계를 뜻하는 전시 제목 ‘아워글래스(HOURGLASS)’는 비가시적인 시간을 아래에서 위로 고요하게 떨어지는 모래라는 물질로 드러낸다는 지점에서, 작가가 보내는 작업과의 시간과 태도를 은유적으로 담고 있다.


《HOURGLASS》 전시 전경(기체, 2021-2022) ©기체

모래시계 안에서 모래로 가시화된 시간처럼, 땅에서 떨어져 나온 돌과 하늘에서 떨어져 나온 구름은 대리석 조각 ‘구름’ 연작으로 형상화되었다. 또한 얼음이 담긴 물잔의 바깥 표면에 맺힌 물방울이 마치 내부에서 외부로 이동한 듯 보이는 현상은 대리석 돌판 위의 ‘얼음-물-컵 그리고 공기’(2021)와 ‘Humming Facades’(2021) 연작으로 표현되었다.


《HOURGLASS》 전시 전경(기체, 2021-2022) ©기체

전시에서 선보인 이러한 연작들은 흰 대리석에 수성 안료를 사용해 마치 돌을 파고 쪼는 것처럼 푸른 안료가 돌 안에 스며들도록 만든 2019년작 〈물부조〉로부터 시작되었다.
 
2019년 당시 검은 빛을 띈 오석이나 사암의 표면에 구멍이나 선과 같이 흔적을 파거나 쪼아 조각을 제작해오던 작가는 〈물부조〉 작업을 계기로 흰 대리석이라는 재료에 대한 탐색과 그것과의 관계를 어떻게 맺을 수 있을지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때 정으로 돌을 물리적으로 쪼개는 것이 아닌 안료가 스며들도록 만들어 부드럽게 액화된 쪼개짐을 상상하는 것에서 물체의 성질을 고정된 것으로 보지 않으려는 작가의 태도를 엿볼 수 있게 한다.  


권현빈, 〈Cumulus humilis-fractus (구름)〉, 2021, 스타투아리오, 잉크, 42x93x11.5cm ©기체

그리고 그로부터 약 3년 후 전시 《HOURGLASS》를 통해 작가는 중성적이고 외부의 이질적인 요소들을 상대적으로 잘 받아들여 작가의 개입이 보다 수월하게 이루어질 수 있는 물질인 흰 대리석을 주재료로 사용한 일련의 조각들을 본격적으로 선보였다.
 
먼저 ‘구름’ 연작의 대리석 조각들은 전시장 바닥에 흩어져 큰 덩어리에서 떨어져 나온 듯한 조각 구름의 형태를 이루고 있었다. 이제 지면을 딛고 더 이상 사라지지 않는 구름 덩어리들은 땅과 하늘을 함께 품게 된다.
 
바닥에 놓인 조각 구름들 외에 평평한 흰 대리석 판재를 이용한 ‘얼음-물-컵 그리고 공기’(2021)와 ‘Humming Facades’(2021) 연작은 평면의 형식을 띠는 것처럼 보이지만 돌 저편의 공간을 아우르고 있었다.


권현빈, 〈얼음-물-컵 그리고 공기〉, 2021, 대리석, 잉크, 80x41x3cm ©기체

‘얼음-물-컵 그리고 공기’ 연작에서 작가는 컵 안의 얼음이 녹아 물이 되는 과정에서 형태의 변화가 하늘에서 구름이 퍼져 나가는 모양과 닮아 있다고 생각하며, 대리석 돌판 위에 점을 파고 선을 긋고 색을 입히고 지우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새겨진 이미지는 특정 대상의 형태를 닮아 있는 것이 아닌 고정할 수 없는 존재에 대한 사유의 흔적인 동시에 돌의 물성을 조금 더 자신에게 가까이 끌어당기고자 했던 조각적 행위의 흔적이기도 했다.


권현빈, 〈Humming Facades〉, 2021, 대리석, 잉크, 30x21x2cm ©기체

또한 조각은 평편한 대리석 판재이지만 육면체로서 최소한의 형태를 유지하며 평면과 입체의 경계를 오간다. 이는 ‘Humming Facades’에서도 이어지는데, 여기서는 조금씩 구름, 물, 얼음과 같은 은유에서 벗어나기 시작한다.
 
이 작업에서 돌의 표면은 점점 더 얇게 갈리고 점과 선, 그리고 색은 조각 행위 자체의 흔적으로 자국을 남기기 시작한다. 이에 따라서, 돌 안에서 작가의 영역은 점점 더 커지기 시작하고 작가는 자신의 흔적을 더 각인시키기 위해 모서리가 부스러지기 직전까지 부지런히 갈고 또 갈고, 푸른 잉크를 입히고 지우기를 반복했다.


《We Go》 전시 전경(두산갤러리, 2024) ©두산아트센터

나아가, 2024년 두산갤러리에서 열린 개인전 《We Go》에서 권현빈은 이미 완료된 듯 보이는 대상들에 내재한 시간과 장면을 상상하며 탐색한 여러 종류의 운동성을 전시로써 실험하고자 했다. 
 
신작 조각 90여 점으로 이루어진 전시는 커다란 전체에서 쪼개져 나온 부분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전시장의 벽을 따라 길게 나열된 부분들의 행진은 하나의 조각, 혹은 하나의 시간이 n개의 면으로 펼쳐진 전개도와 같았다.


《We Go》 전시 전경(두산갤러리, 2024) ©두산아트센터

돌에 응축된 시간을 가늠하고 그 시간의 역사 내부에 들어가 작가의 시간을 개입해 만들어진 권현빈의 조각들은, 전시장 안에서 관객들의 감상하는 행위를 통해 또 다른 운동성의 흐름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이 전시에서 관객들은 전개도를 다시 조립해 그 형상과 시간을 추적하는 일을 부여 받게 되며, 전시장 가운데에 서서 자신의 주위를 둘러싼 조각들을 하나의 흐름으로 연결해 보거나, 한 발자국 더 가까이 다가가 그것에 새겨진 희미한 흔적들을 더듬으며 완결되지 않은 어떤 이야기를 상상하였다.
 
그렇게 만든 이의 움직임과 보는 이의 움직임이 교차할 때 발생하는 일종의 조각적 상태는 비로소 분산된 주체들을 그러모아 ‘우리(We)’를 형성하게 되며 서로의 시공간을 이을 실마리를 만들어 낸다.


《We Go》 전시 전경(두산갤러리, 2024) ©두산아트센터

이렇듯 권현빈은 돌을 비롯한 물질에 응축된 시간과 감각을 탐구하며, 깨짐과 스밈이라는 조각적 행위를 통해 물질과 인간이 세계 속에서 서로를 인식하는 방식을 조각으로써 시각화 한다. 자연을 품은 그의 작품은 작가의 손이 떠난 이후에도 관객과의 확장된 관계 속에서 계속해서 흐른다. 

 "돌은 먼 과거에도 있었고, 먼 미래에도 있을 것이다. 나는 그 중간에서 아직 조각되지 않은 돌을 상상해보곤 한다. (…) 돌은 단지 가만히 서 있음에도, 수많은 가능성과 자국을 만들어내며 진동하고 있는 것만 같다."   (권현빈, 작가 노트)


권현빈 작가 ©하퍼스바자

권현빈은 서울대학교 조소과 학사 및 동대학원 석사를 졸업했다. 개인전으로는 《We Go》(두산갤러리, 서울, 2024), 《HOURGLASS》(기체, 서울, 2021-2022), 《Ongoing Track: 미래와 모양》(모노하, 서울, 2020), 《피스 PIECE》(에이라운지, 서울, 2019) 등이 있다.
 
또한 작가는 《제25회 송은미술대상전》(송은, 서울, 2025-2026), 제7회 창원조각비엔날레 《큰 사과가 소리없이》(창원, 2024), 《사라졌다 나타나는》(경기도미술관, 안산, 2024), 《언두 이펙트》(하이트컬렉션, 서울, 2024), 《Project16》(WESS, 서울, 2022), 《작아져서 점이 되었다 사라지는》(아트선재센터, 서울, 2021), 《두산아트랩 2019: Part 1》(두산갤러리, 서울, 2019) 등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