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다니는
사람들은 어떤 목적과 도착지를 상정한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그런데 떠다닌다고 말할 때, 그 말의 의미는 유유자적한 삶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도시에서, 바다 위에서, 그리고 전철 안에서 사람들은 어떤 경우에 공통의 목적을
확실히 표명하는 집단 구성하기도, 반대로 특정 목적의식 없이 집단 단위를 구성한다. 광범위에 걸친 외부적 요인에 추동된 이들은 거시적으로 보면 국가 대 국가, 국가
간 개인에 생긴 사회 정치적인 토양의 영향을 받는다.
한편 미시적으로 보면 회사의 조직 개편, 친척 간의 관계, 그리고 학업의 영향을 받아 사람들의 발걸음을 움직인다. 이들은 모두, 그러나 부분적으로 같거나 다른 목적을 향하여 움직인다. 특히 개별적이고 미시적 관점에서 보자면 목적을 집단 단위로 판단하기 어렵다.
공항에서 비행기를 같이 기다리는 사람들이 그렇듯이, 이동 수단이 대중적으로 보급되는 상황에서
이들은 같이 있지만, 모두가 같은 목적을 가진다고 볼 수 없다―수단만
같을 뿐이다. 마찬가지로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 역시 타임라인에 등장하는 팔로워가 같은 목적으로 그 공간을
쓰지 않는다. 이처럼 수단이 동일한 경우에도 각자 지향하는 목적은 다를 수 있다.
수단은
이들의 차이를 겉으로 출현할 일 없이 동질화할 뿐만 아니라 이들을 모두 같은 것으로 보고 통제하기도 한다. 인간
본성이나 모두의 평등이라는 이름 하에 주도권을 휘두르게 될 때, 수단은 전체주의적 성격을 띠게 될 뿐만
아니라 목적이 된다. 어떤 이상을 추구할 때 거시적 주체와 개별적 주체는 움직이(려)는 방향이 각각 다르다. 전자가
전체 윤곽을 구성하려고 한다면 후자는 그 윤곽 내에서/속에서 빠져나오려고 몸부림친다. 양자 모두 공통적으로 어떤 목적과 도착지에 도달하기 위한 누군가의 이동 즉 발걸음을 거친다. 그러나 발걸음은 추동하는 대상에 따라 다르게 작용한다.
국민, 젊은 층, 앱을 다운로드한 모든 사람처럼 광범한 차원과 달리, 개별자는 그 차원에서―어떤 경우에 명확한 목적의식을 갖고―빠져나간다. 미시적 차원은 전체를 뒤섞어 하나로 본다는 의미의 거시적
차원에서 실행되는 전체화와 동질화에 맞서 앞으로 열어 젓고자 한다―이 일련의 관계를 ‘휘젓기’라는 말로 설명할 수 있다.
지도자가 내리는 일괄적인 태도, 그것이 야기한 혼란스러운 상태, 그리고 목적을 수행하고자 개별적으로 부리는 몸짓, 나아가 답답한
상황을 타개하려는 집합적 목소리로 휘젓기는 각각 힘을 발휘한다. 휘젓기라는 수단은 무엇을 휘젓느냐에
따라 동질화를 야기할 수도 있고 동질화에 틈을 낼 수도 있다.
허연화의
개인전 《Floating People》에서 관람자는 편집하고 출력된 이미지, 페인팅, 옷을 입힌 캔버스, 인물
오브제 등 다양한 매체를 살펴볼 수 있다. 이들은 모두 다른 형식이면서 개별적인 작품이지만, 목재 구조와 외/내부용 철조망에 다수 배치됨에 따라 집단적으로 나타난다. 한 공간에 여러 구성요소를 순열 없이 배치했다는 점에서 우리는 전시 제목을 연관 지어 떠올릴 수 있다. 한편 ‘가변적 교류’나 ‘데이터화된 신체’라는 설명을 보면 전시 제목에 반영된 주제 의식을
유추할 수 있다. 붕붕 떠다니듯이 이루어지는 교류나 관계는 자연스럽게 오늘날의 사회상을 떠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제 그의 전시에서 ‘휘젓기’는 어떻게 강조되고 제목에 함축된 주제 의식과 연관될까. 휘젓기는
기법적 측면에서 추상화(化)를 통해서 작동한다. 이미지를 편집해서 여러 개 합치거나 모호해 보이도록 그린 페인팅, 얇거나
뚫린 재질의 물건으로 대상의 일부만 보여주고 점성을 가진 오브제를 보여주면서, 휘젓기는 여러 대상을
섞거나 하나로 응집하는 효과를 작품으로 보여준다. 이합집산하는 효과를 나타내는 휘젓기는 이번 개인전에서
전시 공간에서 집단적 또는 개별적으로 설치될 뿐만 아니라 작품 자체에 집단적 또는 개별적 요소들의 통합과 배치를 시도한다―그런 의미에서 ‘mixed media’와 ‘medium mixed’의 대상과 요소를 바꿔치기하는 장을 작품에 만든다.
그렇지만
대상을 왜곡하거나 똑바로 보여주지 않는다는 비판이 그렇듯이 추상은 부정적인 의미로만 들릴지도 모른다. 실제
또는 현실 그대로의 재현에 중점을 두는 판단 기준을 받아들인다면, 그의 작품은 안 좋은 의미의 ‘픽션’ 즉 ‘허구’로 전락한다. 허연화의 이번 전시에서 추상은 현실의 왜곡이나 실제의
곡해가 아니다. 그와 달리 여기서 추상은 현실과 실제에서 인간이 하는 몸짓 즉 ‘휘젓기’와 그것이 추동하는 효과를 말해주는 역할을 한다.
앞서 언급했듯 휘젓기는 그 자체만 가지고는 부정적이거나 긍정적이라고 단언할 수 없다. 그것은 차이와 상이함을 없애 동질성을 만들기도 하고 이를 돌파하려고 하는 개인의 발걸음, 나아가 공동의 목소리로 집합하는 수단이 된다. 허연화의 이번 개인전에서
추상은 억제와 배제뿐만 아니라 뒤섞어 단일화하거나 다른 요소가 함께 어울리는 장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휘젓기는 추상의 이런 양가적인 측면을 포착하고 더 나아가 작가가 염두에 둔 이합집산하는 오늘날의 모습과 공명한다.
휘젓기는
작품의 주제적 측면과 아울러 전시장 내 배치는 물론 작업 기법에 반영된다. 감상자는 이를 보고 휘젓기
자체가 부정적 또는 긍정적 성격을 지닌다는 판단 대신 그 몸짓이 무언가―국가일 수도 있고, 특정 집단일 수도 있고, 나나 당신일 수도 있고, 다시 사회를 향하는―휘저은 후의 결과에 따라 긍정과 부정으로 향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휘젓기의 몸짓, 그것은 손 모양의 오브제를
단 옷을 입힌 삼각형 캔버스로 집약적으로 나타난다.
팔짱을 낀 지도자의 모습, 억압된 사람의 모습, 그리고 연대하는 의지를 드러내는 모습으로 볼
수 있는 이 작품은 ‘묶기’, 즉 대상을 억압적으로 가둬놓는
일과 연결하고 힘을 합치는 일 사이에서 의미가 다르게 작용하는 것을 보여준다. 묶으려고 휘젓는 주체적
태도와 묶여 있는 상태를 열어 저어 앞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발걸음은 무엇을 휘젓는지, 전체적 또는 세부적
움직임을 꾀하는지에 따라 목적지가 다르다. 이번 전시에서 작가가 보여주는 것은 휘젓기의 작동 방식, 즉 거시적 차원과 미시적 차원, 통제와 연대, 그리고 하나로 향하는 포섭과 그곳에서 빠져나오는 이탈을 아우른 추동 관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