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은
흩어진다. 중심은 지탱되지 않는다.” (W.
B. 예이츠의 『 재림』 , 1919)
"불안정한
우리는 누구이며, 우리의 경험은 어떻게 이토록 불안정하게 짜여져버린 것일까?” (프랑코
베라르디 '비포'의 『 프레카리아트를 위한 랩소디』, 2013)
물리적
공간이 작동되지 않는 현시점에서 사람들에게 지속가능한 장소는 온라인 공간이다. 코로나 19의 사회적 거리두기로부터, 인류는 온라인에 접속하여 공동체, 집단, 군중으로서 네트워크를 지속해 나간다. 물리적 공간의 속도가 둔화될수록, 이에 반응한 온라인의 속도는 가속화되고
시스템의 규모는 걷잡을 수 없이 팽창해 나간다. 팬데믹의 영향으로부터 광장과 온라인 아고라, 물질계와 비물질계를 구획하던 머뭇거림은 이미 사라졌다.
이러한 시대를
반증하듯 온·오프라인 공간의 슬로건이나 광고 이미지 또한 변화되어 나간다. 넷플릭스, 앱서비스, 게임, 온라인쇼핑 광고가 부쩍 늘어나고, 드물게나마 물리적 세계를 지시하는
광고로는 신축 아파트 분양과 부동산 투자 홍보가 있다. 영화를 보러 넷플릭스로, 전시를 보러 유튜브로, 친구나 동료를 만나러 SNS와 줌을 접속한다. 사람들은 랜선에서의 네트워크 흐름을 따라
움직이고 모이고 흩어지며, 노동하고 상품을 생산하고 이윤을 도모한다.
온라인 공간에서 사용자의 사고와 행동의 흐름은 데이터 값으로 전환되어 나간다. 그런데 이
공간에서 우리의 신체는 어디쯤에 있을까? 그리고 신체는 온라인 공간에서 파생된 감정, 사물, 가치와 어떻게 만나고 있는 것일까?
허연화의
작업은 물리적 세계와 비물리적 세계, 오프라인과 온라인의 관계로부터 재조직된 사회 시스템과 이로부터
영향한 신체성의 존재 방식을 탐색한다. 온라인 네트워크 속 공동체, 특히
취향과 목적을 함께 하는 사람들과의 공동구매나 화폐거래 구조에 관심을 둔 작가가 이번 전시를 구상하면서 블록체인 시스템이나 암호화폐를 떠올린 것이
이상스러울 것은 없다. 오히려 이 지점에서 작가는 그러한 시스템이 사회·경제적으로 광범위하게 유통되고 있는 세계에서, 자신이 속한 구조적
모순을 자각하고 이를 시각적 감각과 배치로서 다뤄보고자 한다.
이러한 시스템의 불협화음은 가령 사이버
범죄에 사용되는 블록체인 시스템과 파일 공유에 쓰는 P2P 시스템이 서로 동일하다는 데서 오는 혼란과
갈등이다. “일종의 체계를 공고히 하는 방식에 나도 참여를 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한 집단에 소속되는 상황, 그 안에서 서로 간의 가치가 충돌할
수밖에 없는 모순된 상태로부터 이전보다도 더 부유하는 느낌을 받는다.”(작가 인터뷰 中) 중앙 관리가 아닌 참여자들에 의해 정보가 분산되고 공유되는 시스템, 전체의
한 조각이 일탈하여도 다른 참여자의 조각에 의해 정보 운용이 가능한 시스템 속에서 작가가 감각한 것은 “인간의
사회 구조, 인간이 그룹을 생성하는 과정과도 유사하다.”(작가
인터뷰 中)라는 입장이다.
자율적인
네트워크로 보이는 온라인 환경에 담긴 역설적 상황은 전시공간의 기본 구조를 이룬다. 전시장의 주요 동선을
구성하고 있는 벽의 존재는 견고한 지지체라기보다는 구멍이 송송 뚫린 벽과 다소 헐거워 보이는 메쉬 구조 펜스의 조합이다. 전시장에 들어서면서 마주하는 벽면에는 3개의 커다란 구멍을 두고는
그 주변에 지하철, 유리잔, 하늘, 핸드폰을 든 손과 같은 이미지가 뒤섞여 있다. 구멍은 보고자 하는
욕망을 지시하나, 대상의 부재는 시선을 그 다음의 장면 및 사건으로 이끈다.
여기서 구멍은 공백이자 틈새로서 단순하게 남겨지지 않는다. 블록체인의
구조처럼 그 자체로 한없이 불안정한 채로, 파편들과 연결되어 다음 사건의 장에 진입하는 통로가 된다. 벽체를 지나 전시장의 내부로 이어지는 펜스와 공간 한가운데에 놓인 블록 구조물에는 여러 물성의 오브제들이 놓인다. 서로 간에 별 개연성이 없어 보이는 이 작업들은 작가의 일상 속 이미지, 단상, 사건의 파편들이 각각 담긴 것들로 조각, 회화, 설치, 출력물 등 형식적 경계 없이 등장한다. 그러한 가운데 특이점은 하나의 사건에서 도출된 파편들이 사후 독립적인 방식으로 타작업의 발생에 개입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작가가 마음에 들어 한 옷의 파란장미 무늬는 투명한
아스테이지에 패턴화 되어 회화의 막을 형성하고, 한참 후 또 다른 작업인 눈 내리는 회화에서 눈송이와
공명한 패턴으로 재등장한다. 이러한 과정으로부터 분리되었던 개체들은 시차를 두고 사후적인 방식으로 관계를
맺는다.
전시장의
나선형 동선에서 또한 이러한 시간의 순환적 구조를 엿볼 수 있다. 벽체가 관객을 유도하고 있지만 전면과
후면의 구분은 없으며, 동선 또한 열려 있어 인터넷 브라우저 마냥 유동적인 구조이다. 그러한 전시구성 한가운데 목재 구조물 위로 배치된 조각은 매핑된 이미지의 매끄러운 질감과는 반대편에서 과잉의
신체성을 갖는다. 신체 이미지를 부분적으로 재현한 것들로, 형태는
왜곡되거나 일그러져 있으며 다양한 물질들의 조합으로 구성된다.
이 조각들은 물질성을 중심으로 하여 몇
가지 특징을 공유한다. 첫째, 인간의 신체 부분이나 기관을
연상시킨다. 둘째, 외부와 내부, 안과 밖이 서로 뒤틀린 구조를 갖는다. 셋째, 규정하기 어려운 애매모호한 형태이다. 넷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과 뼈대가 뒤얽힌 인상을 남긴다. 대게 석고나
시바툴 캐스팅 후 플라스틱 점토와 실리콘이 입혀져 살과 같은 물성이 더해진 것들로, 그 중에는 캐스팅하지
않고 점토와 실리콘만으로 질감을 살린 조각도 있다.
이
다채롭고도 미세한 질감의 향연으로부터 작가가 조각을 전공했다는 사실을 상기할 수 있으나, 그가 조각을
사유하는 과정은 전통적인 조각가의 태도와는 결별한다. 한 예로, 상단에
놓인 푸른색의 삼인 인물상을 보자. 이 인물상은 2016년에
작가가 3D로 제작한 인물을 이후 조각의 골조로 재현한 다음, 시차를
두고 같은 조각을 복사하여 제작한 것이다. 시뮬레이션을 손으로 자기 복제하여 탄생시킨 이 조각은 점토와
실리콘이 서로 녹아나듯 엉킨 신체로부터, 묘하게도 19세기
낭만주의 조각의 비극적 정서를 환기시킨다.
이 전시에서의 불협화음은 디지털기술의 효과를 재현하는 손의
물성으로부터 역설적인 방식으로 강조된다. 매끈한 표면을 훼손하고, 형태의
윤곽을 애매하게 하고, 표면과 형태의 분화에 맞서는 방식으로, 조각은
점차 살점과 뼈대가 뒤엉킨 감각의 덩어리가 되어간다. 이와 더불어, 점토로
빚어낸 디지털 얼굴 조각, 마치 필터 처리한 것처럼 부드러운 파스텔 톤의 셀카 조각, 석고로 만든 갈비뼈 모양의 조각, 정성스럽게 옷이 입혀진 조각 등
다양한 조각 작업에는 물질성과 비물질성, 평면과 입체, 현재와
과거, 고전과 동시대성 사이에 존재하는 대립과 긴장이 조각의 물성 안으로 녹아든다.
한 얼굴 매핑 조각을 향해 “프로그램에서 매핑 할 때 얇은 이미지를
얼굴에 씌우듯 작업을 했다”(작가 인터뷰 中)라 표현하는
작가의 조각적 수행은 스스로의 신체를 3D 소프트웨어로 가정하여 툴의 감각을 차용하나, 결국 가장 대립적인 감각으로 물질과 비물질 사이의 간극을 물성으로 재해석해 낸다. 타임라인처럼 무수한 현재만이 존재하는 동시대적 감각을 신체적 존재로 전환시키는 작가의 조각은, 시간의 뒤틀림까지도 포용하는 물질적 존재의 가능성을 발굴한다.
한편, 전시장의 한쪽에는 매핑 데이터를 프린팅 포맷으로 변환한 후 접어서 만든 도형 조각들이 놓여, 조각의 물질화가 압축된 시간의 격차를 다시 평평하게 펼쳐 보인다. 벽면에는
이미지, 꿈, 기억, 인상, 감정, 소망들이 서로 뒤섞인 추상적 그림들이 차분히 자리한다. 조각과 회화의 몽환적이고 몽롱한 감흥에 빠져들 때쯤, 이로부터의
각성을 촉구하는 상품 유령의 메시지가 바닥에서 감지된다.
수면 유도 어플리케이션의 광고 영상에서 가져온 “당신의 몸을 편안하게 하세요.(Let your body relax)”는
구조체의 밑바닥, 마치 의식의 하위구조에 작동하는 무의식의 장막처럼 바닥에 깔린다. 안정을 독려하고 지지하는 것 같지만 상 품가치와 자본의 축적을 최우선으로 둔 시스템의 불안정함은 궁극적으로
지속이라는 시간의 흐름과 서사 자체를 위태롭게 한다. 파편적일 수밖에 없는 개별 작업들의 관계는 물성의
연쇄작용을 통해 사후적으로 접촉함으로써, 구멍 난 시스템으로부터의 자기분열과 소외에 맞선다. 작가는 이렇듯 양립할 수 없는 세계에서 부유하는 동시대인의 초상을 파편적으로 재조직하며, 알고리즘에 의한 인터넷 배너창 마냥 “도무지 진지해질 수 없는” 시대의 진중함을 한껏 발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