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전시의 설치작업도 물론 마찬가지다. 회양목, 유리 외벽, 가로등, 심지어 아파트까지 전시장의 모든 모형은 실물 크기로 복제된
것들이다. 그러나 이번에도 작업들이 실물보다 다소 작게 보인다면, 그
까닭은 황문정이 그것들을 천으로 제작하여 마치 바람 빠진 풍선처럼 약간 숨을 죽여 놓았기 때문이다. 그것들이
마저 부풀어 올라 견고한 위용을 갖추게 될지, 아니면 더욱 오그라들어 버려진 허물처럼 널브러지게 될지, 공기의 향방은 불분명하다. 이곳이 갓 신축된 곳인지, 아니면 철거를 앞둔 곳인지, 도시의 향방은 불분명하다. 시민의 입주가 이뤄지는 곳인지, 아니면 퇴거가 진행되는 곳인지, 인간의 향방은 불분명하다.
사실 이 불분명함은 도시 그 자체의 운명일는지도
모른다. 도시에서 건축과 철거, 입주와 퇴거는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라 동시다발적으로 곳곳에서 일어나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 사건의 빈도가 과하게 높아질
때, 도시의 돌과 벽은 장소의 역사와 기억을 간직하고 건네줄 힘을 상실하게 된다. 이처럼 무력해진 도시의 비인간적 요소들은 취약한 천으로 재현되어 다소 지치고 덧없는 모습이다. 역사와 기억이 축적되지 않는 도시에 인간은 부재한다. 애착은 부재한다. 시간은 회전문에 갇히고, 현재는 과거로 이행하지 못한다. 무수한 현재가 모래알처럼 흩어질 뿐이다.
황문정이
시도하는 동식물적 시각, 광물적 시각은 전시가 열리는 실제 건물로도 향한다. 작가는 건물의 기둥을 천으로 본떠 부풀린 실물 크기 모조품을 원래 기둥들 사이에 놓아두고, 건물의 재료가 된 광물들과 건물 주변에 조경한 화단 식물들의 ‘표본’을 채취하여 마치 건물의 껍질을 발라내 그 ‘속살’을 끄집어내듯이 늘어놓는다. 이처럼 그는 도시를 구성하는 비인간적
요소들을 모방하고 검출하여 가시화한다.
그의 눈에 포착된 《무애착 도시》의 풍경은 인간의 풍경이기보다는 오히려 광물의 풍경, 동식물의 풍경인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인간과 비인간을 단순히
대립시키거나 인간의 부정을 도모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자연과 환경에 대한 인간의 우위를 주장했던
근대적 인간주의와 다르게,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를 동등한 방식으로 재규정하기 위한 예술적 시도로 보인다. 이때 자연/문화, 인간/동물, 인간/기계 등 근대적인
이분법들이 재검토의 대상이 될 것이다.
요컨대, 황문정의 작업은 인간과 비인간의 이분법적 위계를 극복하려는 포스트휴먼의 태도를 지닌다. 그런데 기존의 포스트휴머니즘이 테크놀로지와 생명공학의 비약적 발전을 통해 등장한 것이라면, 황문정의 포스트휴먼 감성은 그것과 유사하면서도 두 가지 측면에서 독특하다. 첫째, 그의 작업은 첨단 과학의 성취와는 무관하게 작동한다. 그는 계단, 사다리, 새총 등 구식의 도구나 기술을 참조하여 포스트휴먼의 가능성을
꾀한다.
그가 시도하는 인간과 식물의 하이브리드는 현대 유전공학과는 상관없이 공기정화식물을 방독면에
결합시킨 ‘식물 마스크’를 착용하는 것이다. 그의 이런 로우테크 감수성은 포스트휴먼의 의제가 일상의 영역에서 다양하게 실현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둘째, 황문정의 작업은 독특한 유머를 포함하고 있다. 〈손가락 휘트니스〉(2016)나 〈식물 마스크〉(2017) 같은 작업들이 불러일으키는 웃음은 피식하고 흘리는 헛웃음에 가깝다.
이번 전시에서도 어쩐지 시무룩해 보이는 아파트와 가로등, 건물 기둥들 사이에 천연덕스럽게
자리한 가짜 기둥, 벗겨진 허물처럼 하릴없이 제자리를 맴도는 옷가지 등이 비슷한 헛웃음을 자아낸다. 전시장 한쪽 벽면에 보이는, 마치 찢겨진 것 같은 구멍은 어쩌면
그렇게 ‘피식’하고 생겨난 웃음자국일 수도 있다. 그것은 《무애착 도시》에 숨겨진 한 줌의 ‘애착’이 지나간 자국일 수도 있다.